이번 호 이모저모에서는 교육원 기획전시 '힘展'의 전시기획을 맡아주신 이충열 작가님의 전시후기를 싣습니다. 사진이 많습니다! [편집자주] |
기획전시 '힘展' 후기
이충열
스튜디오 여리 대표, 서울 39기 수강생
새해가 밝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연초부터 임혜숙 부원장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올해 교육원 10주년을 맞이하여 전시를 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2021년 추운 겨울 날, 2018년의 한여름처럼 전시를 위한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커다란 공간에 전시 설치를 하느라 억수로 고생하고는 ‘앞으로 전시회 같은 것은 죽어도 안 하겠다!’고 선언(?!)을 했던 예준 동지도 참여했습니다. 3년이라는 세월이 새삼스레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작가로서 창작활동만 하던 제가 전시기획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던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2018년에는 “파종을 하고 나니 먹을 양식이 떨어졌다”던 후원의 밤 포스터에 있던 문구처럼 교육원 재정이 바닥나 있었습니다. ‘코시국’도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시민단체들처럼 후원주점을 열면 우리 술 좋아하는 동지들이 기꺼이 달려와 매상을 팍팍 올려주었을 텐데도, 교육원은 그 쉬운 길을 놔두고 교육원다운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후원을 받기 위한 행사만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노동자를 가시화하는 전시를 통해 동지들에게 문화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교육의 효과까지 의도하셨던 것 같은데, 문제는 혁신파크 상상청 1층의 그 커다란 전시장에서 사진전을 열려면 돈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묘책이 필요하던 때, 부원장님이 저를 떠올리셨고, 결국 전시준비팀은 ‘재료와 설치비 백 만원으로 백 평 넘는 공간에 전시를 연다!’는 말도 안 되는 미션을 ‘클리어’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 만에 드림팀 일부가 모였습니다.
3년 전 ‘사진전’이지만 사진이 거의 없고 노동운동의 역사 현수막과 사진 슬라이드 영상, 작업복과 집회시위용품들의 공간설치 등 생소할 수 있었을 현대미술 전시를 잘 감상해주셨던 동지들의 높은 예술적 안목에 힘입어서, 이번 전시는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했던 작업 중에서 관객참여가 중요한 것을 이번 전시에 응용하기로 하면서 두어 번의 회의 만에 전시 내용 구성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져서 혁신파크 등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공간은 대여가 불가능했고, 다른 공간들을 빌리자니 대여료만 해도 어마어마해서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계속 전시공간을 수소문해보고, 공간대여 공모사업도 신청해보았지만 아쉽게도 떨어져 전시를 언제 열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교육장에서 전시를 열어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내 가장 익숙한 공간이 새롭게 바뀐 것을 경험하면 동지들도 무언가 새로운 시도와 도전 자체에 대한 부담이나 걱정을 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육장은 계속 교육 일정이 잡혀있어서 전시 설치와 철수를 포함해서 2주 이상 우리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단체들의 양보가 있어야 가능했는데요, 이 글을 읽으실지 모르지만 민주노총 서울본부 건물의 동지들께 감사의 말씀도 드리고 싶네요!
전시장 벽에 작품을 거는 전시가 아니고 일상의 공간을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변신(!)시키는 것이라, 신경 쓸 일이 더 많았습니다. 창문을 막아 빛도 차단하고, 형광등 선을 빼서 전시 조명도 달아야 했으니까요. 설치에 필요한 준비물과 설치 방법 등을 도면으로, 리스트로, 설명서로 만들며 설레는 맘으로 전시를 기다렸고, 바로 설치 당일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놀고 있던 짝꿍을 깨워 전시용품들을 옮겨왔고, 아침에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예준 동지도 제때 오고, 역시나 부지런히 먼저 와계시던 부원장님과 사무국장님까지 다섯이 모였습니다. 교육장 안의 집기들을 모두 옮겨놓고, 오래 묵은 먼지들도 닦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뚝딱뚝딱 열심히 설치를 했습니다. 다음날에는 단병호 위원장님이 오셔서 3년 전 저를 감동시켰던 ‘착실한 일꾼’의 모습을 또 보여주셨고, 소소한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 계획대로 설치를 모두 무사히 마쳤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 서문과 준비한 이들의 이름을 볼 수 있고, 1) 미로를 통과해서 나오면, 2) ‘나에게 교육원은 00이다’ 손피켓을 써서 인증샷을 찍어 보내주신 동지들을 만나며 힘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3) 교육원 수료생들이 보내주신 ‘교육원은 나에게 00을 주었다’ 인터뷰 영상을 보여 교육원의 의미를 공유하고, 4) 책상에 앉아 촛불카드에 색칠을 해서 나만의 촛불을 만들어 5)‘우리가 옳다’ ‘우리가 이긴다’는 문장을 쓰고 지우고 지우는 영상 옆에 꽂아 동지들의 끝없는 투쟁을 응원한 후, 6)다시 책상에 앉아 카드에 색을 칠한 후에 7)뒷면의 번호 자리에 붙여서 커다란 그림을 함께 만들어가도록 했는데요, 많은 사람의 참여가 있어야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아름다운 문장이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8) 교육원 약사를 보며 10년의 시간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9) 교육원이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나아갈지 동지들에게서 듣는 ‘교육원에 바란다’ 인터뷰를 보는 것으로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드디어 전시 오픈날이 되어 테이프 컷팅식도 급조하고, 차고 넘치기를 바라며 예쁜 돼지저금통도 놓았습니다. 오픈 소식을 듣고 건물에 근무하시는 몇 분이 오셨다가 급히 둘러보고 가셔서 아쉬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시는 관객을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라, 한번 쓱 둘러보는 것으로 전시를 인식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여성주의 현대미술가’로서 스스로 선언하고 명명하며 활동하는 저로서는 우리의 삶과 분리된/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만 향유하는/ 관객을 소외시키는/ 작가의 천재성을 과시하는 과거의 ‘예술’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경험하고 참여하고 함께 만드는 현대의 예술(!)을 동지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우리에게 전시를 볼 시간적 여유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수록 시간을 요청해서 빠듯한 일상을 살아내느라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들을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있는 미로의 문장은 저도 39기로 수료했던 교육원의 ‘활동가 기초과정’ 교재에 있는 문장들이어서 수료생들에게는 복습이 되는 곳이기도 했는데요, 관찰 결과 많은 분들이 ‘노동조합은 권리의식이 아니라, 연대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라는 문장에서 ‘예/아니오’의 선택을 망설였습니다. 시민으로서의 권리의식을 배우지 못한 채로 소비자로서의 ‘권리’만 체화했기 때문에 자신도 노동자면서 다른 노동자가 당하는 착취에 무관심하고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 개인의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연대를 통한 승리를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문장을 넣었습니다만, 연대의 힘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저 문장에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슬펐습니다.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권리 회복과 평등에 대한 열망을 현실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눈앞의 자기 이익만을 위한 것이 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었습니다.
열흘간의 전시를 무사히 마치고, 작두콩차를 만드시느라 고생하셨던 원장님과 전시준비팀이 전시 철수를 했습니다. 교육장은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전시는 신기루 같다는 생각이 들며 쓸쓸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저는 전시를 준비 덕분에 ‘활동가 기초과정’을 수료했고, 지식을 독점한 자가 권위를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가르치던 과거의 ‘교육’과 달리, 노동자가 학습의 주체로서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토론하는 교육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교육원의 지향점이 제가 작업을 하는 이유와 너무나 닮아서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즐거웠답니다.
전시는 끝났지만, 전시를 경험한 분들의 기억 속에 남는 전시였기를 바랍니다. 전시와 행사를 통해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묵묵히 애쓰고 계신 교육원의 구성원들이 조금 덜 불안해하면서 활동해나갈 수 있도록 재정적 안정이 마련되었기를 소망합니다. 제 소망에 동의하신다면, 아직 후원하지 못하셨다면 교육원에 후원을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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