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회차 쉬고 돌아온 노동역사기행 입니다. 이번 호는 <읽을꺼리> 꼭지가 많습니다^^ <읽을꺼리> 꼭지에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은 [e-품] 편집팀(nodonged@gmail.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위장취업 대학생과 현장노동자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공장체질이었던 위장취업 여대생 박씨
80년대 여대생 비율은 대학생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여대생 대부분이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런 사람들이 공장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가였던 황광우씨가 2014년에 쓴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는 책엔 ‘위장취업 여대생 박00’이란 인물이 나온다. 황씨는 그를 매우 기이한 여대생이라고 했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 교육학과 83학번, 박씨는 1985년초 2학년 겨울방학 때 한 달여 공장 경험을 쌓으려고 들어간 공장이 대학보다 더 편해 그 길로 노동자가 돼버렸다.
박씨는 1985년 초 여동생의 주민등록증으로 인천 부평공단에 있는 하인벨이라는 시계 공장에 취업했다. 85년 3월 말 어느 토요일, 언니와 동생 세 자매가 공장에서 만났다. 동생은 등록금을 내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집에 연락이 없어 지난 설에 집에 두고 간 하인벨 시계를 보고 찾아왔다. 박씨와 언니, 동생 세 자매는 공장 앞 길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박씨의 자매들도 대학 가고 싶었지만 공부 제일 잘하는 박씨를 위해 포기했다. “언니 대학 졸업하라고 공장 다니는데 어떻게 배신할 수 있어?” 동생은 서럽게 울었다. 언니나 동생 모두 노동자였다. 박씨는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언니가 일당을 물었다. 3200원이라고 답하자 ‘짬뽕도 못 먹겠구나’하며 자신의 벌이에서 매달 일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20년간 언니는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다.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너보다 내가 더 잘안다. 엄마 아빠 걱정하시니 가끔 집에나 들러라” 언니가 남기고 간 이 한마디는 평생 잊히지 않았다. 박씨의 집안은 학교를 다니기 힘들만큼 가난했다.
언니는 서울서 식모살이하면서 호구를 이어갔다. 하루는 부잣집 갈비구이가 맛있어 어린 여동생을 데려와 먹였다. 주인에게 발각돼 쫓겨났다. 겨울이면 군밤 장사, 여름이면 공사판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앞잡이였다. 아침에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면 일어나 청소했다. 동네 아이들에게 ‘애국가’를 합창하도록 가르쳤다.
박씨는 공장에서 고향에 온 것처럼 편했다. 공장에서 만나는 모든 여동생과 모든 아주머니들이 다 이웃이었다. 박씨는 여공들보다 더 검소했고 여공들보다 더 부지런했고 여공들보다 공장 밥을 더 잘 먹었다. 하인벨에서 연세대 출신 박모, 이모(이영희 선생 딸)씨가 위장취업 여대생으로 밝혀졌을 때 노동자들은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박씨도 유명 사립대 출신 위장취업자라는 사실 앞에 노동자들은 수긍할 수 없었다. 화장기라곤 없고 자기들보다 더 후진 옷 하나 걸치고 자기들보다 더 게걸스럽게 식당 밥을 작 먹는 시골에서 올라온 아줌마처럼 보였던 언니가 대학생이라니. 회사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떼어 와 붙여놓은 뒤에야 노동자들은 믿게 됐다. 노동자들은 박씨의 학교 성적을 외우고 다녔다. 국 영 사 과는 우 수 수 수. 그런데 수학만 미. 언니 수학공부 못해서 공장들어왔다는 농담이 유행했다.
임금투쟁이 시작됐을때 박씨는 식당 벽에 “노동자가 개돼지만도 못하냐. 개밥식사 개선하라”는 구호를 썼다. 평소 박씨의 식사량을 알고 있던 노동자들은 다들 웃었다. “지는 그렇게 잘 처먹고선 이제와 개밥이라고?”
하인벨에 위장취업했던 고 이영희 선생의 딸은 잠이 많았다. 위장취업자로 드러나 해고되자 출근투쟁을 했는데 선생의 딸은 자주 불참해야 했다. 잠이 많아서. 선생의 딸은 술 먹고 초인종 누르기 미안해 자주 담을 타고 넘어 제집에 들어갔단다. 어느 날 담을 타고 넘었는데 아버지 이영희 선생이 그때까지 뜰에 서 계셨다. “아가, 내가 본 일제시대의 사회주의자들은 너처럼 안 했다” 근엄하게 한 마디 던지시더라는 것이다.
위장취업 대학생, 지금 그들은 모두 떠났다. 그들 중 극히 일부는 극우정당의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정부 고위 관료가 돼 주류계급이 됐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남은 사람
구로공단에 있었던 한일도루코는 지퍼와 면도날 문구용 칼을 생산했다. 1600명이 넘게 다니는 공장엔 여성 노동자가 더 많았다. 유난히 10대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중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했다. 물론 하루 12시간씩 2교대 맞교대였다. 일요일도 대부분 출근해서 일했다. 한 달에 겨우 한 번 정도 놀았다. 퇴근할 땐 정문 앞에서 남성 경비들이 여성 노동자를 몸 수색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입사했기에 구로공단에서도 임금이 낮은 편이었는데 이마저도 체불이 심했다.
도루코에 노조가 만들어진 건 1975년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탄압으로 주동자가 해고돼 이름만 남았다. 주로 반장들이 1975년 노조를 깨는데 앞장섰다. 그 반장들이 1978년 6월5일 노조를 재건했다. 회사가 40대 후반 여성 반장들을 정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우자 노조로 막으려고 했다. 이때 노조 교선부장이었던 김문수가 자기가 위원장(분회장)을 하겠다고 나서 위원장 직무대리를 맡고 노조는 활력을 되찾았다. 김문수는 1979년 6월 총회에서 직대 꼬리표를 떼고 분회장이 됐다. 당시만 해도 김문수는 헌신적이었다. 조합원이 아파 결근하면 병문을 다닐 정도였다. 70년대 말 도루코 노사교섭에서 회사 측 교섭위원들은 “여공들은 월급 많이 올려주면 화장품으로 사치생활 한다”고 발언했다. 노조 측 여성 교섭위원들은 “월급 대부분을 시골 부모님께 보낸다”고 소리쳤다. 1000명이 넘던 도루코는 1980년 들어서 600여명으로 줄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대 초 도루코 민주노조를 깨기 위해 혈안이었다. 먼저 김문수 분회장을 삼청교육대로 보낸다고 협박해 사직서를 내게 하고 1980년 10월 해고했다. 그 뒤 김문수는 사라졌다. 그해 연말 여성 노조간부 대부분은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사직서를 강요당했다. 안기부는 끌려 와 20여일 불법 고문 끝에 사직서를 쓴 노동자들을 차에 태워 용산역에 내려놓고 교통비 2000원씩을 주고 풀어줬다.
풀려났지만 노동자들은 대부분 다시 구로공단 제조업 사업장을 전전했다. 회사는 민주노조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을 발견 즉시 해고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80년대 초반 7~8곳의 사업장을 전전해야 했다. 기업주들끼리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돌려 봤다.
한일도루코는 서울 개봉동 공장을 부동산 투기꾼들에게 아파트 부지로 팔고 경기도 용인 등 몇 군데 공장으로 분산시켰다. 노조는 대책 없는 이전 반대투쟁을 벌였지만 소용없었다. 이렇게 서울 외곽으로 분산된 구로공단 제조업체들은 10여년 뒤 다시 공장 부지를 아파트 투기꾼들에게 넘겨 큰 돈을 챙겼다.
현장 노동자들은 80년대 중후반 NL이니 제헌의회그룹이니 하는 여러 지식인 운동권들의 득세에 홍역을 치렀다. 기승을 부렸던 제헌의회 그룹은 갑자기 모래알처럼 부서지더니 일부는 NL그룹으로, 일부는 PD그룹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의 갈등과 혼돈을 지켜본 현장 노동자들은 80년대 말이 되면서 스스로를 추스렸다.
현장 노동자들은 주부가 돼 아이 키우면서 지역에서 참교육학부모회나 학교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생활 정치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주변 작은 것부터 챙기면서. 그 사이 그들은 분회장 김문수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는 것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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