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전/읽을꺼리

[읽을꺼리] 노동역사기행 8 - 블랙리스트 때문에 7번 해고된 여성노동자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읽을꺼리> 꼭지에 기존 [함께하는 품]에서 연재중이던 노동역사기행을 계속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기 연재된 1~7편을 파일로 첨부하니 아직 못 읽어보신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읽을꺼리> 꼭지에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은 [e-품] 편집팀(nodonged@gmail.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노동역사기행_1_서울의 숨은 그림찾기.pdf
1.24MB
노동역사기행_2_일제강점기 서울지역 노동역사.pdf
0.94MB
노동역사기행_3_생존을 위한 절박한 외침, 5,60년대 노동자들 투쟁.pdf
1.05MB
노동역사기행_4_박정희 경제개발의 한계가 '10월 유신' 낳아.pdf
1.04MB
노동역사기행_5_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해태제과 투쟁.pdf
1.02MB
노동역사기행_6_70년대 구로공단 밖 서울지역 민주노조 건설투쟁.pdf
0.98MB
노동역사기행_7_여성노동자가 이뤄낸 유신의 종말.pdf
0.87MB

 

블랙리스트 때문에 7번 해고된 여성노동자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블랙리스트는 1978년 동일방직 사건 때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이 작성해 19784월 각 사업장에 배포한 이래 민주노조나 노조민주화운동을 한 해고 노동자들의 해고 사태가 속출하면서 세상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198310월 인천지역 노동자 6명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이유로 해고되자 노동부 인천 지방사무소를 찾아가 복직과 블랙리스트 철폐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일방적 폭력으로 노동자 전원을 구속해 블랙리스트는 정면으로 사회문제화됐다.

 

  블랙리스트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시민사회단체는 1984110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 문제 대책위원회(위원장 문익환 목사)’를 결성했다. 블랙리스트 대책위는 19846월 영등포 산선회관에서 노동자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블랙리스트에 의한 해고노동자 복직촉구대회를 열었다.

 

  실제 1978년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김모 양은 해고 직후 버스안내양, 봉제공장 시다, 미싱사, 합판공장, 방직공장 등을 전전하면서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블랙리스트 때문에 7번이나 해고당했다.

 

 

70년대 노동운동의 선봉은 오롯이 여성

 

  1972~1984년까지 생산직 노동자의 사업장 규모별 임금격차의 추이를 통해 우리는 60~70년대 노동운동을 오롯이 여성노동자가 개척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1-1] 규모별 임금격차의 추이 
  중화학공업 경공업

사업장 규모별

시간당 임금

1972 1976 1980 1984 1972 1976 1980 1984

10-99

 

100-499

 

500명 이상-

 

총급여액

10-99

 

100-499

 

500-

 

76

(100)

92

(121.1)

111

(146.1)

 

15,581

(100)

21,102

(135.4)

27,385

(175.8)

233

(100)

226

(101.3)

247

(110.8)

 

54,322

(100)

62,782

(115.6)

71,817

(132.2)

518

(100)

483

(93.2)

516

(99.6)

 

127,000

(100)

124,906

(98.0)

143,889

(112.9)

826.3

(100)

805.0

(97.4)

899.2

(108.8)

 

206,766

(100)

231,283

(111.9)

267,112

(129.1)

62

(100)

71

(114.5)

77

(124.2)

 

13,090

(100)

15,883

(121.3)

18,310

(139.8)

173

(100)

185

(106.9)

186

(107.5)

 

45,679

(100)

48,342

(105.8)

53,538

(117.2)

405

(100)

374

(92.3)

390

(96.3)

 

101,665

(100)

102,002

(100.3)

111,191

(109.4)

310

(100)

330.4

(106.6)

326.8

(105.4)

 

175,046

(100)

184,510

(105.4)

187,981

(107.4)

(자료 : 전병유, “한국 중화학공업 노동자에 관한 연구 - 생산직 노동자의 내부 구성 및 상태를 중심으로”, 서울대 경제학과 석사논문, 1987)

 

  임금은 1972년 사업장 크기에 따라 임금격차가 상당했지만, 점차 감소하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남성들이 많은 중화학공업의 시간당 임금은 1972100인 미만 사업장을 100으로 봤을 때 500명 이상 대공장은 146.1로 큰 차이를 보인다. 임금 총액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100 175.8로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진다. 이런 사업장 규모별 임금 격차는 8년 뒤인 1984년에 와선 100 108.8(시간당 임금)이나 100 129.1(임금 총액)로 줄어든다.

 

  여성이 많이 일했던 경공업에선 이런 격차 완화가 더 급격하게 일어났다. 경공업에선 시간당 임금이 1972100인 미만 사업장을 100으로 봤을 때 500인 이상 대공장은 124.2였는데, 1984년에 와선 100 105.4로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100~499인 사업장과 500명 이상 사업장의 1984년 시간당 임금은 100~499인 사업장이 오히려 더 높다. 이는 70년대 제일제당, 해태제과, 동일방직 등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기업을 상대로 줄기차게 싸워온 결과다.

 

  다른 자료를 통해서 같은 시기에 연령별 임금격차도 계속 줄어들어 든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60~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서 싸워온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덕분에 80년대 초중반에 생산직 노동자 임금이 전반적으로 동질화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같은 사업장 안에서 성별 임금격차는 상당했다.

 

 

폭력 관리자를 통한 손쉬운 노무관리

 

  70~80년대 구로2공단에 있었던 섬유봉제업체 협진양행은 산업체 학생 150명 포함해 700~750명이 일했다. 이 가운데 생산직은 600~650명이었고 이들 중 여성이 550~600명으로 절대 다수였다. 관리직은 70여명이었다. 협진양행은 완제품을 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 아프리카로 수출했다. 전국에 직계공장이 7, 방계공장이 4개나 있었다.

 

  협진양행 이용호 회장은 11(1981~1985)12(1985~1988) 때 경기도 파주 고양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용호 회장은 버거킹(햄버거)과 농수산물 판매, 무역대행업, 부동산투기 등도 겸했다.

 

  협진양행 여성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 일하고 토요일에도 8시간 일했다. 기숙사생에겐 하루 평균 1시간 정도 무료임금으로 연장근무도 시켰다. 기본급은 시다 초임이 1985년에 2450, 1986년에 3050원이고 상여금은 생산직이 200%, 사무직이 400%이다. 이처럼 30년 전엔 생산직과 사무직 사이에 상여금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식대는 월급에서 21000원을 공제해 먹지 않아도 돈을 내야 했다. 기숙사는 방 50개가 있고 방 1개에 8~9명씩 구겨져 잤다.

 

  협진양행에는 장00 주임이라는 폭력 관리자가 악명 높았다. 손찌검 구타는 기본이고, 결근한 노동자 집에 쳐 들어가 머리채를 끌고 나오기 일쑤였다. 1986218일 오후 745분 장00 주임이 21, 2반 전원을 강제소집해 생산량이 적다고 지랄을 15분이나 했다. 주임은 여성노동자의 머리와 등을 손으로 후려치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여성노동자 70~80명이 일제히 일을 멈추고 장 주임에게 야유를 보냈다. 당시 구로공단 어느 공장을 가도 이런 남성 하급 관리자가 한 두 명씩 있었다. 회사는 이들을 통해 효율적으로 노무관리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런 불합리한 폭력이 노동자 대투쟁을 불렀다. 이문열의 소설을 영화화한 구로아리랑도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어용인 듯 어용 아닌 듯 : 한층 교묘해진 어용노조

 

  역시 구로공단에 있었던 삼경복장은 1976년 자본금 3억원으로 설립한 코오롱그룹 계열의 봉제업체였다. 수출품은 코트, 자켓 등이다. 생산직은 미온 여성 노동자 약 600명에, 기혼 여성 50, 미혼 남성 50명 정도였다. 1978년 전기기사와 검사반원들 중심으로 노조를 만들어 1980년 전두환의 사회정화 조치 이후 김모 위원장이 계속 집행했다. 김 위원장의 남편 송모 씨는 유명한 노조 브로커였다. 노조위원장은 직선제로 임기 3년이다. 대의원은 약 40명이었다. 관리자인 주임까지 조합원이었다. 김 위원장은 능숙한 노조관리로 노조원들은 위원장에 충성 경쟁을 벌였다.

 

  상여금은 300%였고 1986년 임금은 양성공 초임이 3340원이었다. 기숙사는 한 방에 22~24명 자던 걸 15명으로 줄였다. 모범방을 만들어 각 방끼리 경쟁시킨다. 모범방은 인원 수가 적어 훨씬 쾌적하게 지냈다. 식사는 1끼에 210원을 내야 했다.

 

  80년대 중반 삼경복장에도 학생 출신 노동자와 현장노동자 20여명이 뭉쳐 어용노조 민주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어용이 아닌 것처럼 교묘히 조합원을 기만하던 노조 때문에 힘들었다.

 

  어용노조는 19856월 구로 동맹파업 때 제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이 노조 김 위원장은 동맹파업 직후 1985922일 경기도 안양에 있던 한국노총 교육연수원에서 실시한 노조 소그룹장 교육 때 손 들어 질문했던 조합원 명단을 몽땅 적어 회사에 넘겨줬다.

 

  김 위원장은 1985111일엔 남영나일론의 깡패 출신 어용노조 위원장인 강모를 강사로 초빙해 정보과 형사와 안기부 요원 등을 대동하고 조합원 교육을 실시했다. 노조민주화 세력은 19851122일 아침 노조의 반노동자적 작태와 어용노조 위원장 비리,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담은 소식지를 현장에 배포했다. 김 위원장은 이를 갈며 인근 롬코리아 민주노조와 합세해 회사를 뒤엎을 음모라며 노조 간부 2명과 소그룹장 1명을 노조에서 제명했다. 퇴근하는 노민추 활동가 뒤를 미행하고 이에 항의하면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삼경복장은 19863262명을 해고하고 4명을 출근정지한 공고를 붙였다. 김 위원장은 회사의 공고에 대학생들이 뒤에서 조종했고 그 애들은 환각제를 먹고 행동했다고 선동했다. 해고된 여성노동자들이 의식화된 대학생들에게 성폭행 당해 그들로부터 조종 받고 소식지 등을 배포했다고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이처럼 80년대 들어 노동현장은 어용노조를 앞세운 노노 갈등이 본격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