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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반 구로공단엔 무슨 일이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우리는 전두환이 집권했던 80년대를 ‘3저 호황’의 시대로 기억한다. 그러나 ‘3저 호황’의 콩고물은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3저 호황 즉 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현상으로 수출이 크게 늘었다. 저금리·저달러 현상은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정책 때문이다. 미국은 1970년대 말부터 경기침체에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계속되자 경기침체를 타개하려고 레이거노믹스 정책을 실시했다. 그 내용은 정부 지출 삭감, 소득세 감세, 고금리 정책 유지 등이었다. 그 결과 미국은 재정수지 불균형이 심화되고 고금리 때문에 막대한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이처럼 한국의 저금리·저달러 현상은 레이거노믹스 정책 실패의 역기능 때문에 생겼다. 여기에 저유가까지 겹쳐 한국경제는 역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저유가는 세계적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산유국들이 경기 침체를 타개하려고 유가를 낮춰서다. 이 기시 우리나라와 대만 등 신흥공업국은 수출이 늘어 상당한 국제수지 흑자를 이뤘다.
그러나 80년대 우리 국민 모두가 3저 호황을 누린 건 아니다.
3저 호황인데 실업자가 늘었다
1985년 11월15일 당시 조철권 노동부장관은 “산재보험이 적용되는 10인 이상 사업체 대상조사에서 1985년 들어 10월말 현재 1913개 업체가 휴폐업하고 8만 2400여명이 실직했다”고 발표했다. 조 장관은 85년 10월말 현재 노사분규도 모두 23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01건보다 배 이상 늘었다고 했다. 노동부가 밝힌 1985년 1~10월 사이 230건의 노동쟁의엔 전국에서 2만 8800여명이 참가했다. (동아일보 85년 11월15일 1면 톱기사 ‘근로자 실직 8만2천여명’)
당시 구로공단은 427개 입주업체 중 가동 공장은 391개로 가동률이 81.7%에 머물고 전체 근로자수도 매월 1천여명 씩 줄고 있다. 더구나 85년 6월 대우어패럴 사건 이후 휴폐업이 겹쳐 5천여명이 실직했다.
노동부는 당시 통계를 발표하면서 위장취업자가 일으킨 노사분규 건수가 60건에 이른다고 별도로 밝혔다. 230건의 노동쟁의 가운데 60건이 학생운동 출신, 소위 ‘학출’이 벌인 싸움이란 거다. 당시 노동현장에 많은 학출이 들어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게 이 발표로도 드러난다. 이 통계를 뒤집어 읽으면 230건의 노동쟁의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170건을 학출의 도움없이 노동자 스스로 일으켰다는 소리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자본 축적과정에서 형성된 한국 자본주의의 재생산 구조가 70년대말부터 80년대에 봉착하면서 안팎에서 자본축적의 위기가 도래했다. 이런 위기의 결과로 실업자가 늘었다. 기업은 3저 호황을 누리는데 실업이 늘어나는 이상한 노동시장 구조는 결국 노동자들의 불만 폭발로 이어졌다. 이 속에는 산업 구조조정까지 가세해 노동자들은 더욱 어렵게 했다.
당시 국제경쟁력을 상실해가는 섬유, 봉제, 합판, 신발 등 노동집약적 업종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휴폐업, 조업단축 등을 단행하고 대량 실직을 낳았다.
1980~1984년 농가 취업자 수 감소는 114만 4천명인데 반해 같은 시기 광공업 고용자 수 증가는 40만명도 안 됐다. 유출 농민 중 상당부분은 비경제활동 인구로 빠지거나 도시 내 전근대적 부분이나 3차 산업에 불완전, 불안정 취업해 과잉인구로 쌓여갔다. 이런 과잉인구는 비숙련 직종의 임금하락 압박으로 작용했다.
독점 대기업들은 이 시기 중소 영세기업을 매개로 한 수탈 연대 고리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내부 노동시장과 외부 노동시장으로 이원화 했다. 피해는 외부 노동시장에 떨어진 불안정 노동자에게 몰렸다.
1985년 상반기 중 국내 임금 근로자의 35.7%가 불안정한 임시고용이거나 일용직으로, 일본의 10.3%보다 무려 3배나 많았다. 불완정 취업상태의 가내 노동자나 무급가족 종사자도 전체 취업자의 14.1%나 차지했다.
임시고, 일고 동향(비농가)
시기 | 합계(천명) | 임시고용 | 일용직 |
(임시고+일고) /피고용인 |
80 | 1,847 | 914 | 933 | 34.39 |
81 | 1,816 | 879 | 937 | 30.77 |
82 | 1,836 | 880 | 956 | 29,90 |
83 | 1,996 | 1,062 | 934 | 30.52 |
84 | 2,492 | 1,421 | 1,071 | 35.09 |
85.3 | 2,425 | 1,404 | 1,021 | 33.12 |
85.6 | 2,989 | 1,588 | 1,401 | 36.08 |
85.9 | 2,861 | 1,572 | 1,289 | 36.94 |
* 출처 : 경총 <노동통계연감> 각 연도
노조 결성투쟁과 법적, 폭력적 탄압
80년대 중반 노동자 투쟁을 담은 저술가 유경순씨의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에 당시 구로공단 상황이 잘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1984년 6~8월 민주노조를 결성한 곳은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뿐이었다. 정부와 자본은 1984년 9월부터 학출이 가담했다며 노조결성을 방해했다. 유니전, 협진양행, 성원제강, 동국제강에서 노조결성 시도가 일어났고 영창악기에선 일상투쟁이 일어났다. 20여곳에서 학출이 활동을 벌인 결과다.
학출이 민주노조 결성을 시도한 유니전은 1천명가량 일하는 사업장이었다. 1983년 11월부터 학생운동 출신의 노동자 5~6명이 소모임을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준비했다. 이들은 1984년 9월 1일 35명이 한국노총 금속노련회관에 모여 노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구로구청은 탈퇴 규정이 없다며 노조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회사는 노조위원장과 사무장 등 핵심 6명을 해고하고 이들은 복직투쟁을 벌였다.
협진양행에서도 1984년 6명의 소모임을 구성해 노조 설립을 준비했다. 이렇게 63명이 1984년 9월 18일 금속노련회관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구로구청에 설립신고서를 냈다. 노조 결성되자 회사는 노조 임원들을 감금하고 탈퇴를 종용했다. 노조 간부의 출근도 저지해 출근투쟁하는 노동자 12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런데도 350명중 300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구로구청은 시간을 끌면서 신고필증을 내주지 않다가 1984년 10월 2일 총회 내용이 부실하다며 반려했다. 회사는 부서이동과 탈퇴강요, 폭행으로 조합원 반수 이상이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가도록 괴롭혔다.
유니전과 협진양행 노조는 설립부터 정권과 회사, 어용 상급노조의 결탁으로 설립신고증이 반려되고 노조간부가 폭력과 해고에 몰렸다.
성원제강은 회사가 어용노조를 만들어 대응했다. 1985년 1월 27일 노동자 14명이 모여 노조준비위를 결성했다. 81명이 3월 3일 노조를 만들자 회사는 설립신고서를 탈취했다. 구로구청은 3월 13일 노동자들이 낸 신고서를 ‘가맹인준증 미첨부’로 반납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금속노련을 찾아가 항의하자 금속노련 간부들은 무책임하게 회피했다. 그 사이 회사는 군 출신 관리자를 앞세워 어용노조를 설립해 쉽게 신고필증을 받았다. 분노한 노동자는 3월 14일부터 어용노조 물러가라며 현장에서 파업에 들어갔다. 3월 19일 농성노동자들은 전경에게 강제해산 당했다. 6명이 해고당하고 17일간 투쟁은 막을 내렸다. 정권과 회사, 금속노련이 결탁해 민주노조를 무력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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