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본문의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편집자의 편집의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상임교과위원
구체성, 과학성, 실현가능성 ②
문명이 시작된 뒤에도 1만 년 동안 인류는 신의 섭리(또는 자연의 섭리)를 진리의 근거로 믿어왔다. 그것을 타파하고 이성을 진리의 근거로 정립한 것은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업적이다. 이때부터 ‘과학성’이 진리의 잣대로 자리잡게 된다. 노동해방 사상가들 사이의 논쟁도 여기서 예외로 될 수 없었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창조한 것으로 알려진 프루동은 자신의 사상이 과학적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1840년 발간된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다.
그런데 맑스와 엥겔스가 프루동을 비판한 이유도 ‘과학성’이었다. 그들은 프루동의 노동해방 이론이 ‘비과학적’이며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이론이야말로 ‘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의 발전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1880)에서 엥겔스는 맑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정립한 업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자본주의가 토대로 삼고 있는 노동착취 메커니즘을 규명한 점과 인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유물론적 역사관을 정립한 점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과학적 사회주의’는 맑스의 노동해방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게 된다.
과연 맑스의 과학주의는 미래 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무산자계급 혁명은 자본주의 경제법칙의 필연적(=과학적) 결과일까? 자본의 내재적 모순과 객관적 운동법칙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는 무너지게 되고, 무산자계급 혁명과 무산자계급 독재를 거쳐서 노동해방 세상으로 이행하게 될까?
‘무산자계급 혁명 → 무산자계급 독재 → 생산수단 사적소유 철폐 → 노동해방 → 인간해방’이라는 맑스의 변혁이론이 현실에 적용되었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옛 소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그람시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자본론>에 반(反)하는 혁명”이었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곳에서 무산자계급 혁명이 터져나올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거의 발전하지 못한, 자본주의 후진국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무산자계급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할 때까지 기다리자던 멘셰비키에 맞서서 볼셰비키는 공산당과 무산자계급 혁명군을 결성하여 돌격전을 감행하였고,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바로 이 점이 그람시가 레닌에게 열광한 이유였다. 레닌은 맑스의 <자본론>에 반하여 자본주의 후진국에서 무산자계급 혁명을 추동하였고, 그리고 성공시켰다! 혁명의 성패는 경제법칙이 아니라 정치투쟁에 달려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레닌의 변혁이론을 서유럽 자본주의 선진국들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공산당과 무산자계급 혁명군을 결성하여 돌격전을 감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당 주역 중 한 사람이자 뒤에 총서기 직책을 맡기도 했던 그람시는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러시아 사례는 서유럽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는 재현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양쪽의 정치지형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도 무산자계급 혁명은 정치투쟁으로 진행될 테지만, 그것은 러시아에서 전개된 것과는 다른 방식의 투쟁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람시는 자본주의 선진국의 정치지형에서 실현가능한 무산자계급 혁명의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였고, 그 결론으로 새로운 변혁이론을 제안하게 된다. ‘시민사회-진지전’ 이론이다.
아무튼, 1917년 무산자계급 혁명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한 소련 공산당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무산자계급 독재를 통하여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했다. 자본가계급은 소멸당했고, 그와 더불어 노동착취를 통한 이윤추구도 사라졌다. 그다음 단계는? 소련 공산당은 시장경제를 철폐하고 그 자리에 중앙계획경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레닌에 이어 공산당을 장악한 스탈린은 일당독재를 일인독재로 변모시켰다.
만약 맑스가 이런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더라면, 그것을 ‘무산자계급 독재’라고 평가했을까? 반혁명 세력의 역공에 맞서서 혁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일당독재와 일인독재가 불가피했다고 말했을까? 혁명의 존립을 위협하는 동-서 체제대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보았을까?
아무튼,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등장은 맑스의 변혁이론이 실현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의 발전과 동-서 진영대결은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던 나라들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주의 구성요소들을 대폭 수용한 혼합주의 정치경제로 변모해나간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동-서 체제경쟁에서 어쩌면 사회주의 진영이 승리하고 인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이 점은 뒤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건너뛰기로 하자.
동-서 진영대결은 실천의 영역뿐만 아니라 이론의 영역에서도 진행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가 곧 작동불능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가치이론이었다. 시장이 철폐되면 가격이 더 이상 수요공급의 지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며, 그에 따라 노동생산물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게 된다. 달리 말해서, 자원과 노동의 사회적 할당은 오로지 정치적 결정에 따라 진행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 자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정치는 아무런 판단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런 결정이 사회적 자원과 노동을 무모하게 낭비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이런 경제시스템은 오래 작동할 수 없다. 이런 비판과 경고에 맞서서 중앙계획경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시장이 없어도 얼마든지 노동생산물의 가치를 계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양쪽이 치고받으면서 이른바 ‘사회주의 계산 논쟁’이 이어지게 된다. ‘계산 불가능’을 주장하는 사람도 ‘계산 가능’을 주장하는 사람도 저마다 자신의 주장이 과학적이라고 내세웠다.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이 한창 번영하던 시기에 시작된 논쟁은, 그 진영이 존속하던 내내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이론과 이론이 서로 맞부딪치는 곳에서 싸움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실물 증거뿐이기 때문이다. 변혁이론 논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것은 실물 역사뿐이다. 마침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도 마침표가 찍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인 마침표가 찍힌 것이 아니라고 항의하면서, 논쟁을 이어나가자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논쟁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있다고 본다. 과연 노동생산물 가치를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중앙계획경제가 작동하지 못한 것일까? 중앙계획경제가 옛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도록 만든 핵심 이유였을까? 공산당 일당독재와 수령 일인독재를 맑스가 예측했던 무산자계급 독재로 볼 수 있을까? 등등.
아무튼, 오늘날의 통념은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더불어 무산자계급 독재 및 중앙계획경제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실험을 끝나버린 역사의 사소한 에피소드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 남긴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우 강력하고 생생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유산을 확인해보자.
먼저 러시아 혁명과 그에 이어진 동-서 체제대결이 서방 자본주의 진영의 경제질서를 크게 변화시킨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수정주의(=혼합주의) 경제질서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 변화’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사소한 변화’라고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 큰 변화였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자본주의 진영의 무산자계급에게도 꿈과 힘을 실어주었다. 때마침 시작된 대공황은 자본주의 진영 안에서도 무산자계급 혁명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아마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가 전통적인 자유주의 경제질서를 고수하고자 했더라면 어쩌면 자본주의 진영은 안으로부터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뉴딜 정책’을 통하여 루즈벨트 정부는 무산자계급에게 돌아가는 몫을 대폭 늘림으로써 혁명의 기운을 빼고자 했다. 그러자면 정부가 경제에 깊숙하게 개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자유주의 전통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행보였다. 이어서 터져나온 제2차 세계대전은 정부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계속해서 증대시킬 수밖에 없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동-서 냉전이 지속되던 30여 년 동안에도 사회주의 진영의 팽창이 이어졌다. 중국 대륙이 붉게 물들었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곳곳에서도 무산자계급 혁명이 터져나왔다. 자본주의 진영은 뉴딜 정책 식의 계획경제를 이어나감으로써 그에 맞섰다. 이 시기 자본주의를 흔히 ‘사민주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과 더불어 정부는 이른바 ‘경제 3주체’ 중 한 주체로 되었다. 오늘날 모든 경제학 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이 ‘경제 3주체’ 이론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자유주의 경제학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정부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지표들 중 하나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정부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민주의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정부가 국내총생산의 1/3 또는 절반 이상을 계획에 따라 분배하고 재분배하는 것이 경제질서의 구성요소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특히 사회보장 예산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정부들 사이의 성격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완전히 거꾸로 되돌려놓은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국내총생산에서 정부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두고 본다면, 사민주의 황금시대에 구축된 경제질서의 뼈대는 여전히 건재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자본주의를 그냥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2차 대전 이후의 자본주의를 20세기 초엽의 자본주의와 ‘똑같은’ 자본주의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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