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교과위원
적록 동맹 : 공유지와 장애물 ②
세 가지 변화
1) 삼중 소용돌이
오늘날 우리는 세 가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질서가 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저물었는데, 새로 동튼 시대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채 혼란스럽게 흘러가고 있다. 이어서 생산기술의 변화가 있다. 지금까지 발달해온 모든 기술에 21세기 디지털 기술이 추가되면서 우리의 생산과정과 소비과정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구생태계의 변화가 있다. 특히 기후위기는 점점 더 가속도가 붙으면서 우리의 노동과 삶을 위협하고 있다.
세 가지 변화는 따로따로 흘러가고 있는 세 줄기 강물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하나의 복잡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맞닥뜨린 변화를 ‘삼중 소용돌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노동해방운동과 생태운동이 서로 동맹을 맺어야 할 이유는 이쪽도 저쪽도 모두 삼중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저마다 혼자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친다면? 아마 어느 쪽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삼중 소용돌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는 적색과 녹색이 동맹을 맺어야 할 이유를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중 변화의 소용돌이를 본격적으로 파헤쳐보기 전에 잠깐 용어를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시대의 전환 또는 사회질서의 전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흔히 ‘전환’이라는 용어를 두고 발생하는 불필요한 오해와 비생산적인 논쟁을 미리 피하기 위해서이다. 뒤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유엔 사회개발조사연구소’(UNRISD)에 소속된 ‘정의로운 전환 공동연구단’(JTRC)은 전환의 수준을 다음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1) 현상 유지
2) 관리적 개혁
3) 구조적 개혁
4) 체제 전환
나도 이 구분법을 차용하여 ‘전환의 4수준 분류법’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제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소용돌이 속으로 잠수하여 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의 발생하던 때로 되돌아가보자.
2) 긴 19세기
역사가 흘러가는 속도는 물리적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은 ‘긴 19세기’, ‘짧은 20세기’라는 말을 썼다. 그를 따르자면, 19세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시작해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완료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20세기는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끝난다. 홉스봄을 모방하면서 조금 수정하여 나는 20세기를 1917년에 시작해서 1989년에 끝난 것으로 볼 작정이다. 러시아 혁명과 함께 시작해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끝나는 기간이다.
19세기는 자유주의 전성시대였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상공인집단이 봉건주의 지배집단을 몰아내고 불가역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질서로 정립한 시기였다. 자유주의는 절제와 배려를 몰랐다. 죽느냐 사느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자본은 국경선을 넘어섰고, 그런 자본들이 충돌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이 벌어지고, 마침내 인류를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몰아가게 된다.
그와 동시에 19세기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대중운동이 태동하고 성장해간 시기였다. 시기적으로 노동운동이 앞섰다. 자본의 무자비한 지배와 착취에 맞서서 먼저 공장과 도시의 노동자들이 이곳저곳에서 뭉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민주의’ 등등의 이름을 내걸면서 다양한 이론적‧실천적 모색을 이어갔다.
인민대중의 보편적 정치권을 목표로 삼았던 19세기 민주화운동의 대중적 추동력도 실은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 운동에서 나왔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일찍부터 민주화운동이 활발했던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보편적 선거권이 확장되면서부터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사민주의 세력이 전체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리고 20세기 접어들면서부터 선거를 통하여 때때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에 반하여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던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노동자들이 무장봉기를 통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노동운동이 이런 길을 걷게 된다.
19세기 말까지 노동운동은 - 선거를 통해서든 무력을 통해서든 -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 노동운동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출발했던 협동조합운동은 역사가 흐르면서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뒷날을 기다리면서 명맥을 유지한다.
한편, 19세기는 무자비한 성장주의 시대였다. 자유경쟁 시장에서 자본은 성장하지 못하면 죽어나가야 했다. 성장의 피해자 중에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연도 있었다. 마치 마이다스의 손이 닿는 것마다 모두 황금으로 변화시켰듯이, 자본의 손길은 닿는 곳마다 자연을 상품으로 변화시켰다. 상품의 운명은 시장경쟁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다. 자유주의 시장경쟁은 절제와 배려를 몰랐고, 19세기 내내 자연은 착취당하고 파괴당할 수밖에 없었다. 생태위기가 아직 인간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해지지는 않았지만, 선각자들은 곧 그것이 인류의 삶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쯤 근대적인 생태운동이 시작된다.
이처럼 태어난 때는 서로 달랐지만, 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의 고향은 서로 같았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였다.
3) 짧은 20세기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민중이 세상의 주인이 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였다. 그것은 노동운동이 마침내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입증한 인류사적 대사건이었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지향하는 노동운동 세력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던 때였다. 러시아 혁명의 기운은 국경선을 넘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제3세계 국가들 안으로도 뻗어나갔다. 그에 맞서서 각국의 자본주의 세력도 민첩하게 대응했다.
20세기는 뭐니 뭐니 해도 동방 사회주의와 서방 자본주의 사이에 진행된 동-서 체제경쟁이 세계 정치경제 질서를 규정한 시대였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대결이었다. 이 대결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공세를 둔화시키기 위해서 자본주의 세력은 사민주의 혼합경제 질서를 수용한다. 순수한 자본주의 질서를 고집하다간 체제가 안에서 뒤집어질 판이었기 때문이다.
혼합경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구조적인 수준의 개혁을 동반하였다. 체제대결이 시작될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저마다 손이 하나뿐인 외팔이였다. 자본주의는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만 가지고 있었다. 아담 스미스가 말했던 바로 그 손이었다. 사회주의는 ‘정부’라는 ‘보이는 손’만 가지고 있었다. 일당독재 정부의 중앙계획이 경제의 모든 운동을 결정하였다.
1930년대, 밖으로는 동-서 체제대결을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는 대공황과 맞닥뜨린 자본주의 진영은 한 손만으로 위기를 헤쳐나올 수 없었다. 그러자 ‘보이는 손’을 이식해서 양손을 사용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확장함으로써, 시장경제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있던 19세기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다행히(?) 양손은 서로 견제하고 양보하는 타협에 성공하였고, 그 결과 자본주의는 체제안정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
한편, 사회주의 진영도 양손을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보이지 않는 손’을 이식할 셈으로 생산영역에 포드주의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일당독재 정부의 ‘보이는 손’은 자신의 권한을 양보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을 이어주는 시장은 도입하지 않았다. 대신에 관료집단의 ‘5개년 계획’이 그 역할을 맡았다. 생산영역에 이식된 두 번째 손은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보이는 손’이 행사하는 거부반응에 내내 시달리다가 결국 괴사하고 만다. 이식은 실패했다. 그 결과 경제는 성장을 멈추게 되고, 이어서 체제가 통째로 흔들리게 된다.
1989년, 세계 역사는 다시 한번 요동친다. (한국에서는 - 조금 다른 요인들이 작동하여 - 두 해 전에 터져나온 6월 시민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역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1989년 여름, 베를린 장벽은 바닥까지 흔들리고 있었지만, 아직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장벽의 존망에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장벽이 버티는 한 세계 역사가 장차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 여름에 미국의 정치·외교 연구자 후쿠야마가 쓴 <역사의 종말?>이라는 짤막한 논문이 출판된다.
이 논문에서 후쿠야마는 곧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인류역사는 끝나게 된다고 단언한다. 그의 논리는 단순명쾌하였다. 인류 역사는 진화의 역사이다. 더 우등한 질서가 출현하여 열등한 질서를 제압하는 식으로 진화해왔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더 나은 질서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여기서 후쿠야마의 논리가 비약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우등한 질서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는 더 이상 출현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함께 인류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1989년 11월,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때부터 후쿠야마는 ‘시대정신의 화신’으로 대접을 받게 되고, ‘역사의 종말’은 절대진리로 군림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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