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는 이점진 회원께서 한 회 휴재하시게 되어서, 번외편으로 이전에 금속노조 기관지 <금속노동자>에 인터뷰한 글을 옮겨 싣습니다. 제가 이점진 회원에게 연재를 부탁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글이니 독자 여러분들도 같이 재밌게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자주] |
“끊임없는 관심이 싸우는 사람의 큰 힘이죠”
[사람과 현장] 음식으로 투쟁사업장 연대하는 이점진 동지
김형석 편집국장
어렵게 열린 교섭이었다.
2년 전 불어 닥친 노조설립 열풍에 힘입어 투쟁은 벌어졌지만 경험 있는 간부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사람 재미있고 마이크 앞에서도 할 말 잘했던 이점진은 자의반 타의반 교섭위원을 맡았다. 겉보기완 달리 내심 수줍음 많고 감성 풍부한 성격이라 난생 처음 해보는 중요한 교섭을 앞두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쭈뼛쭈뼛 들어선 교섭 장소에서 맞은편 테이블에 근엄한 표정으로 도열해 앉아 있는 조장 언니들을 보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아버렸다. 순식간에 테이블을 뛰어 넘어 회사쪽 교섭위원 테이블로 돌진했다.
“이런 씨XX들이...”
낮게 중얼거리며 무서운 기세로 한 조장 머리끄덩이를 낚아챈 이점진 입에서 속사포 같은 육두문자가 튀어 나왔다.
“야, 이 개X아 네가 왜 여기 앉아 있는데? 우리 쪽에 있어줘야 되는 거 아냐?”
평소 엄하기 짝이 없던 나이 많은 조장 언니들이었지만 배신감에 휩싸여 분노 모드로 돌변한 이점진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겁에 질린 회사 교섭위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초조하게 교섭 결과를 기다리던 조합원들은 다시 수줍음 모드가 돼 빈손으로 돌아온 이점진을 어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못하면 죽을 것 같아요”
아산 갑을오토텍 농성장에서 만난 이점진 동지(공공운수노조 대전일반지부)는 자신이 겪은 노동조합과의 첫 인연을 액션활극으로 소개해 듣는 사람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저녁쌀을 씻으며 인터뷰를 기다리던 이점진 동지는 갑을오토텍지회 한 조합이 ‘설정’이라며 놀리자 액션에 강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물 한 바가지를 들고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갑을오토텍지회 조합원과는 이미 스스럼없는 사이였다.
쾌활해 보이는 사람 내면이 여린 경우가 많다. 처음 하는 인터뷰와 사진촬영의 어색함을 애꿎은 지회 조합원 추격으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점진 동지는 그 조합원 혼자 쌀 씻는 모습이 안쓰러워 팔을 걷고 나선 참이었다.
이런 감정이입은 젊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골프장 캐디로 일 년 동안만 일해 대학 학비를 마련하겠다던 스물여섯 이점진은 친목모임을 하던 동료들이 노조를 만들어 모두 간부를 맡게 되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라도 맡아야겠는데 한 눈에 봐도 골치 아파 보이는 ‘교육선전부장’ 대신 뭔지 모르지만 쉬워 보이는 ‘운영위원’을 택했다고 했다. 조합 임원이 됐다.
‘머리끄덩이’ 사건 후로는 교섭실패에 대한 책임감으로 아예 총대를 멨다. 조직 확대 사업을 벌이던 끝에 동료 16명과 해고됐다. 3년 동안 해고투쟁을 벌이던 이점진은 근로기준법으로는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노조법으로는 노동자라는 이상한 논리지만 결국 93년에 특수고용직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최초 대법원 판결을 받은 주인공이 됐다.
교사가 꿈이었던 이점진은 노조를 경험하고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벌어지는 모든 집회에 참가하고 받을 수 있는 모든 교육을 받았다. 동료들로부터 빨갱이 됐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부엌칼을 갖다 놓고 같이 죽자며 뜯어 말릴 때 “못하면 죽을 것 같아요”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파본 놈이 아픈 마음을 안다”
이점진은 해고 이후로도 대전 풀뿌리 지역단체 활동과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며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다 2009년 무렵부터 노조와의 인연을 다시 이었다. 이명박 정권 들어 노동탄압이 거세지자 일요일마다 식당을 운영해 그 수익금으로 투쟁사업장을 지원하는 사업에 참여했다.
매주 음식을 장만하던 이점진은 시장에 갈 때마다 투쟁사업장 동지들 처지가 떠올라 울었다. 20대 끝자락을 고통스런 노조 설립 투쟁으로 보내고 세상과 이별하려고까지 했던 이점진은 “아파본 놈이 아픈 마음을 안다”고 했다. 유달리 자살하는 노동자가 많았던 이때 ‘밥이라도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자살할 생각이 안 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3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음식연대’를 시작했다. 대전에 있던 원자력연구원 비정규직지회 투쟁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점진은 라면을 먹지 않는다. 캐디 노조 시절 라면 먹다 토하고 한 없이 서러웠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한겨울 노숙농성을 벌이면서도 모아 놓은 돈이 없어 라면에 김밥을 먹는 모습이 몹시 가슴 아팠다.
당시 우유 영업사원을 하던 이점진은 저녁 퇴근길에 시장을 봐 밤새 호박죽을 끓여 새벽에 농성장을 방문했다. 40여명 비지회 조합원들은 그날부터 하루 세끼를 든든히 채우게 됐다. 식대는 원가만 정산해 투쟁이 끝난 뒤 받기로 했다.
이점진은 젊은 조합원들이 모두 자식처럼 느껴졌다. 쾌활함을 발휘해 “서른여섯 이상은 누나, 그 아래는 이모, 20대 초반은 엄마라고 불러”라고 명령했다. 매주 금요일에는 지역 동지들과 함께 문화제를 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승용차를 갖다 대고 음악을 크게 틀어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사람 할 짓 아니라는 겨울철 노숙농성이었지만 이모뻘 되는 이 동지와 조합원들은 그렇게 신나게 투쟁을 이어 갔다.
“힘들지 않았냐고요? 천만에요. 투쟁하며 변하는 애들 모습을 보고 함께 노는 것이 너무 즐거웠어요.”
지회 조합원들이 투쟁에 승리해 현장으로 돌아가기까지 정확히 80일 걸렸다. 이점진은 낮에는 우유영업, 저녁엔 시장보기, 새벽엔 농성장 방문을 78일 동안 거르지 않았다. 서울 집회에서 밤늦게 돌아온 날과 폭설로 길이 막혔던 이틀만 농성장을 못 갔다.
투쟁이 끝나자 힘든 줄 모르고 석 달 가까이 보낸 이점진에게 공허함이 몰려왔다. 한 밤 중에 농성장이 있던 자리를 찾아가 조합원 소리가 들리나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밥을 안 줘? 내가 하지 뭐.”
허전해 하던 어느 날 페이스북으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투쟁 소식을 접했다. 천명 가까운 조합원들이 서울에서 농성을 벌인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점진은 원자력연구원 투쟁에서 만난 민주노총 대전본부 박모은 교육부장에게 전화했다. 새벽 6시였다.
“모은아, 삼성에 가야겠다.”
“어떻게?”
“돈을 모아라”
“언제?”
“이번 주에 가자”
반찬으로 메추리알을 삶았다. 농성 조합원이 한 개씩만 먹어도 천개다. 언니 부탁을 거절 못하는 박모은 부장은 욕을 해대며 천명 분의 메추리알을 함께 깠다.
작년에는 화섬노조 소속 사업장 투쟁에도 연대했다. 지회가 전면 파업에 돌입하자 회사는 식당운영을 중지했다. 두 주면 지회가 밥값으로 투쟁기금을 바닥내고 항복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점진은 역시 망설임이 없었다. “밥을 안 줘? 내가 하지 뭐.”
그러나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조합원 70명에 연대단위까지 총 1백 인분 식사를 하루 세끼 매일 마련해야 했다.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 밥을 안쳐 식사 준비를 마치고 7시에 장을 보러 갔다. 우유 영업을 그만두고 아예 인근 학원에 급식을 납품하는 1인 사업을 시작한 뒤라 조리 시설이 도움이 됐다.
투쟁은 45일간 이어졌고 이번에도 승리로 마무리했다. 한 끼도 같은 메뉴를 내놓지 않았던 이점진은 투쟁 45일 동안 손톱을 깎지 않았다. 그 많은 식재료를 혼자 다듬고 썰고 끓이고 하는 통에 손톱이 닳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투쟁이 끝나고 지회로부터 “우리는 밥을 먹은 게 아니라 정성을 먹었다”며 감사패를 받았다. 사람들은 “이점진이 손대면 매번 이긴다”고 했다. 이점진 동지는 그 말이 반만 맞는 말이라며 “조합원이 포기하지 않으면 저도 포기하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음식연대, 자금책은 ‘삥’ 뜯고 운반책은 때려 싣고
이 동지가 요즘 연대하는 사업장은 경기지부 하이디스지회, 대전충북지부 피엘에이지회, 충남지부 갑을오토텍지회 세군데다. 하이디스와 피엘에이지회에는 매주 일주일치 반찬을 보낸다.
4백 명 규모인 갑을오토텍지회에는 하루에 적어도 한 가지 반찬이 오를 수 있도록 준비한다. 지난 8월초부터 매주 일요일에 반찬을 가득 싣고 방문한다.
일주일 가운데 가격이 제일 싼 날을 기다려 식재료를 구입하고 더운 날씨에 쉽게 상하지 않도록 장아찌를 만든다. 매번 정성스레 육수를 내고 간장에 끓이다 보니 눈가는 짓무르고 냄새에 질려 식사는 하루에 한 끼밖에 못한다.
몸이 부서져라 음식을 장만하다 보면 지칠 법도 하지만 조합원들의 감탄과 기다림이 특급 활력소가 된다. 이점진 동지는 “얼마 전에도 갑을 조합원이 페이스북에 기다려진다고 썼다“며 피곤이 순식간에 싹 사라진다고 말했다.
이점진 동지가 이렇게 음식연대에 몰두할 수 있는 데에는 민주노총 박모은 부장과 더불어 전교조 대전지부 전 사무처장인 안동수 동지 힘이 크다. 박 부장은 ‘자금책’이고 안 동지는 ‘운반책’이라고 소개했다.
이점진 동지 전화를 받으면 박 부장은 바로 ‘삥 뜯기’에 나선다. 지역 동지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몇 만원 씩 지원 받는다. 요즘엔 지역 사업장을 돌며 후원금을 받기도 한다. 반복되는 요청에 난처해하기도, 혀를 차기도 했지만 후원금이 어떻게 쓰이는 지 잘 아는 민주노총 사업장들은 군말 없이 지원금을 내놓는다.
많은 동지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자금책’ 박모은 부장은 얼마 안 남은 식자재비가 걱정이다. 박 부장은 “카이스트지부가 거금 백만 원을 쾌척하기도 했는데 10월 달이면 남은 돈이 소진돼요”라며 지원을 당부하면서도 “아무렴 갑을이 10월 전에 승리하겠죠”라고 말했다.
음식연대 활동이 제법 알려지고 나서는 전국 이곳저곳에서 식재료를 지원받기도 한다. 이때는 안동수 동지가 차를 끌고 나선다. 이점진 동지는 “전북 장수에서 쌀을 욕심껏 받아 때려 싣고 오다 쇼바(완충기)가 나갔는데 미안해서 어쩌냐”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탄압은 분노로 오지만 무관심은 좌절로 온다”
이점진 동지는 신규 투쟁사업장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로 전투모드로 돌입한다. 음식연대를 하는 동안은 아파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투쟁사업장 조합원에겐 안정감이 중요해요. 농성장에서 음식을 만들면 장소도 함부로 바꾸지 않아요. 일관되게 음식을 만드는 내 모습을 보며 안정감을 느끼라는 거죠. 그래서 전 연대를 시작하면 술도 안 먹어요. 다음날 힘들어서 똑같이 일을 못해요.”
박모은 부장은 이런 언니 건강이 걱정이다. “몸 챙겨가며 하면 좋겠지만 언니가 한번 돌면 눈에 봬는 게 없어요. 어제도 장아찌를 만든다며 감 3백 개를 갖다 깎고 자르더라고요.”
이점진 동지는 그런 성격이다. 율동패 활동을 하는 이 동지는 율동도 진이 다 빠져 토가 나올 정도가 돼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한다. 이점진 동지는 인터뷰를 마치며 자신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전국현장율동패연합(전율)’ 얘기를 많이 써달라고 수줍게 부탁했다. 민주노총 율동패에 애착이 대단하다.
패원들도 지원요청에 익숙하다. 대전지역 연합 몸짓패 패원들은 공연하고 받은 식사비를 따로 모아 후원금으로 전달한다. ‘전율’에도 제안해 율동패 별로 후원금을 내기도 한다.
노동탄압이 있는 한 투쟁사업장은 끝없이 생긴다. 지치지 않느냐는 우문에 이점진 동지는 현답을 내놓았다.
“내가 겪어 봤기 때문에 누군가 끊임없이 밥을 해주며 지지하는 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자본가 탄압은 분노로 오지만 동지의 무관심은 좌절로 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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