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 "노동해방, 오래된 꿈" 두 번째 글입니다.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2. 청년 맑스 : 노동해방 철학자
“혼자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자주 듣는 말이다. 평범한 상식으로 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속에 인간세상의 변화와 노동해방 운동의 온갖 진리가 녹아들어 있다면?
인간의 꿈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널리 전염될 수 있다는 특성과, 차차 여물어간다는 특성이다. 널리 전염될수록, 단단하게 여물수록, 꿈은 점점 더 강력한 물질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노동해방의 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진리를 칼 맑스(Karl Marx)는 이렇게 표현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을 통해서 뒤집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론도 인민대중을 사로잡는 즉시 물질적 힘으로 된다.
(맑스, <파리 수고>, 1844)
모든 이론은 처음에 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노동해방에 대한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그 꿈이 현실로 되자면 우선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혼자 꾸는 꿈이 함께 꾸는 꿈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그러자면 꿈이 전염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널리 퍼져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꿈은 전염될 수 있다. 꿈의 바이러스를 흔히 ‘밈’(meme)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꿈을 전염시킬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인류가 동물의 세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먼 옛날 몇몇 원시인간들이 문명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하였고, 그 꿈을 동료인간들에게 전염시켜나갔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본주의 세상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상으로, 대안사회로 나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 그것을 꿈꿀 때, 그리고 그 꿈이 단단하게 여물면서 함께 꾸는 꿈으로 될 때, 그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일이다. 거꾸로 말해서, 아무도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면, 또는 그런 꿈이 널리 전염되지 않는다면, 모든 운동은 정지될 것이며, 세상은 변화를 멈출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이 노동해방에 대해서 가장 왕성하게 꿈을 꾼 시기를 꼽으라면 19세기를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가장 널리 퍼져나간 곳은 유럽이었다. 가장 단단하게 여물도록 만든 사람으로는 맑스를 첫손에 꼽을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해방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19세기 유럽을 찾아가서 맑스의 꿈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틈틈이 나의 질문과 의견을 보태는 것이 옳을 것이다.
1840년대 초, 청년 맑스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당시 유럽은 대전환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다. 과거를 연장하려는 지주귀족 세력, 현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산업자본가 세력, 그리고 미래를 꿈꾸는 노동자 세력이 한꺼번에 충돌했던 대격변의 시대였다. 혁명의 물결과 반동의 물결이 서로 부닥치고 소용돌이치면서 장차 역사의 물결이 흘러갈 방향을 정하기 위하여 요동치던 때였다.
이런 때에 맑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1841, 이하 <박사 논문>)라는 매우 생뚱맞아 보이는 논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다. 고대 그리스의 두 원자론 철학자를 비교한 이 논문은 시대에 대한 고민을 단 한 줌도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미래사회에 대한 꿈이 단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당대 철학계를 호령하고 있던 헤겔의 절대정신 철학에 대한 비판도 없었다. 당시 산업계를 지배하고 있던 아담 스미스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고찰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새로운 미래세계를 모색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박사 논문>과 달리 맑스가 남긴 다른 저작들은 노동해방에 대한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 반하여 <박사 논문> 안에는 그것이 단 한 줄도 없었다. 그러니 그것을 딴 사람이 썼다고 말하더라도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너무 생뚱맞아 보여서 맑스의 열렬한 추종자들조차도 그의 학위논문을 읽어보지 않게 된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맑스는 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저작들 중에서 ‘철학적’ 저작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뿐이다. 박사학위 논문이다. 이 논문을 끝낸 뒤부터 맑스는 더 이상 철학을 ‘연구’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엥겔스-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진 전통적인 맑스 해석을 따르자면, 맑스는 스스로 자신의 <박사 논문>을 내다버리고 정치경제학으로 옮겨갔다. 이른바 ‘이론적 단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주류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활동들 중 청년 맑스의 활동을 삭제해버린다. 아직 미성숙 시기의 활동이므로, ‘맑스다운 맑스’의 활동으로 봐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전통을 만들어낸 사람은 맑스의 절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였다. 맑스가 죽은 뒤 엥겔스는 맑스의 사상적 변모과정을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요약하였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명제들>(1845) 이전에는 포이어바흐주의자였는데, <명제들>을 전환점으로 하여 역사적 유물론자로 변신하였다.” <명제들> 이전의 저작들과 이후의 저작들 사이에는 전혀 연속성이 없다는 뜻이었다. 엥겔스의 공식을 곧이곧대로 이어받아서 레닌도 청년 맑스의 활동을 삭제해버린다. 그때부터 전통적인 맑스주의 안에서 청년 맑스는 다시 호명될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1980년대에 한국의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왕성하게 받아들였던 맑스주의는 엥겔스-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지면서 정립된 ‘소련 교과서의 맑스주의’였다. 그것은 ‘청년 맑스가 삭제된 맑스’였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자 한국의 대다수 진보적 지식인들은 앞 다투어 맑스주의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열광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 10년도 걸리지 않은 셈이다. 그러면서 청년 맑스는 한국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호명된 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진짜 그럴까? 청년 맑스와 장년 맑스 사이에는 진짜 이론적 단절이 있었을까? 아니면, <박사 논문> 안에 이미 그의 정치경제학과 변혁론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는데, 다만 추종자들이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일까?
맑스의 <박사 논문>에 대한 나의 공부는 이런 의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찾아낸 대답을 미리 요약하면 이렇다. “청년 맑스와 장년 맑스 사이에는 이론적 단절이 없다. <박사 논문>은 노동해방 철학의 존재론에 해당된다. 그것은 맑스가 평생 동안 수행한 모든 연구활동과 실천활동의 철학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한때 한국의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던 맑스주의, 그리고 그들이 가볍게 내다버린 맑스주의는 맑스가 쓴 것이 아니라 실은 엥겔스가 쓴 것이었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안티 뒤링>을 레닌과 스탈린이 소련의 철학 교과서에 실으면서 ‘맑스주의’라고 이름 붙인 것이었다. 그것은 청년 맑스가 삭제된 맑스였다. 그 맑스주의는 1990년대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져버렸다.
그와 함께 노동해방의 꿈도 무너져버렸을까? 무너진 것은 ‘소련 교과서의 맑스주의’가 아닐까? 청년 맑스는 여전히 건재하지 않을까? 그와 더불어 노동해방의 꿈도 여전히 건재하지 않을까?
지금부터 청년 맑스가 노동해방 철학의 존재론을 정립하는 과정과, 이어서 그것을 구상화(具像化)해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보자.
* 짝퉁농부에게도 농번기가 닥쳐서, 5월에는 연재를 건너뜁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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