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인문학] 노동해방, 오래된 꿈_ (4) 연결 감수성 : '공정'의 뿌리

한 회 쉬고 돌아온 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 입니다. [편집자주]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3. 꿈의 뿌리를 찾아서

2) 연결 감수성 : '공정'의 뿌리

 

두 장의 그림

 

찰스 1세, 화가미상, 17세기 말~18세기 초 그림, 영국 국립초상화박물관

연결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하여 먼저 두 장의 그림을 비교해보자. 첫 번째 그림은 찰스 1세를 그린 초상화이다.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어 찰스 1세의 머리위에 왕관을 씌워주는 모습을 담고 있다. ‘왕권신수설’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림도 드물 것이다.

 

찰스 1세는 중세가 저물고 근대가 동트던 무렵, 1625년부터 1649년까지, 영국을 통치한 왕이다. 그는 왕권신수설의 열렬한 옹호자로서 의회를 강제해산시킴으로써 영국을 내전상태로 몰아넣었다. 1642년부터 8년 동안 지속된 이 전쟁을 흔히 ‘청교도혁명’이라고 부른다. 내전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1649년 크롬웰에 의해서 목이 절단된다.

 

<리바이어던> 표지그림, 1651년 영국 런던 출간

 

두 번째 그림은 토머스 홉스가 1651년 출간한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그림이다. 인민대중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통치자의 몸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통치자는 인민대중으로부터 절대권력을 위임받아 국가를 통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느님의 개입 없이 자연상태의 인민대중이 자유의지에 따라 계약을 맺음으로써 정치사회를 설립하고 통치자를 선출한다는 ‘사회계약론’의 핵심내용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림도 드물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은 중세 봉건주의 사회질서가 근대 자유주의 사회질서로 전환되고 있던 17세기 영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처음 주창한 ‘자연법’ 개념과 ‘사회계약’ 이론은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주춧돌을 놓았다.

 

 

중세 봉건주의 사회 : 끈의 지배

 

자유주의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연결을 절단하면서 태어난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탯줄을 절단하면서 세상에 태어나듯이. 모든 끈을 절단해버렸으므로, 당연히 노동의 끈도 절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이었다. 중세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기존의 모든 사회적 굴레들을 단칼에 싹둑 잘라버린 뒤에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유주의 혁명도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맨땅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대 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허물어버리고자 했던 중세 봉건주의 사회질서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중세시대를 지배했던 사회사상도 훑어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왜 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절단에 집착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중세시대를 지배해온 기독교는 유태교의 유일신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 기독교 사회구성 이론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유태교의 천지창조 신화였다. 하느님이 우주만물과 인간세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우주만물과 인간세상의 모든 관계들을 주재한다는 내용이다.

 

기독교 교리를 따르자면, 인간사회의 바깥 위에는 절대권능을 가진 유일신이 존재한다. 모든 인간은 유일신의 피조물이며 종속물이다. 그러므로 개인들은 독립적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신의 섭리에 따라 형성된 사회질서 속에서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중세 천 년 동안 지상의 정치질서를 결정한 최종적인 근거는 유태교 신화에서 따온 왕권신수설(王權神受說)이었다. 하느님이 왕을 선발하고, 그에게 지상사회를 통치할 권력을 위임했다는 이론이다. 왕의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왕은 오로지 하느님에게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된다. 나머지 인간들에 대해서는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며,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인민대중은 하느님에게 절대복종해야 하듯이, 하느님의 대리자에게도 절대복종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종으로 존재하듯이, 인민대중은 왕의 소유물로 존재한다. 인민대중의 저항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혈통이라는 끈을 따라 왕권을 세습시켰으며, 나머지 개인들의 신분과 직업도 혈통의 끈을 따라 세습시켰다. 이런 사회질서 속에서 개인의 능력과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혈통과 세습의 끈은 고래심줄처럼 질겼고, 그 뒷배를 봐주고 있는 신의 섭리는 철통같이 엄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럽 중세 봉건주의 사회는 하느님의 끈이 지배한 사회였으며, 인간들은 그 끈에 옭매인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인간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노동도 고래심줄로 옭아매었다. 앞서 살펴본 적이 있는 수메르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매우 솔직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노동하기 싫으니, 인간을 창조하여 노동을 떠넘겨버리자.” 그에 비하면 기독교가 물려받고 있는 유태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솔직하지 못하다. 매우 교활하고 교묘하다. 그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노동을 떠맡도록 속여 넘긴다. <구약 성서> 창세기에 실려 있는 에덴동산 이야기가 이런 사정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시고 …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 오시자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따 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 먹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아담은 아내를 인류의 어머니라 해서 하와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공동번역 성서>, 창세기 2장7절~3장24절

 

이처럼 <구약 성서>는 인간이 평생 동안 고생하면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를 인간의 원죄 탓으로 돌리고 있다. 신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저지른 행위 탓으로 노동의 굴레를 덮어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사회의 인간들은 죽도록 노동을 하면서도 오로지 자기 자신만 탓할 수밖에 없게 된다. 노동의 끈이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에게 노동의 굴레를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낙원추방, 미켈란젤로, 시스틴 성당 천정벽화, 1508~12제작

 

기독교 교리를 따르자면,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사회까지 함께 창조했다.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와 질서까지 함께 창조한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를 하나의 대가족처럼 보았다. 그곳에서 인간은 독립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었으며, 언제나 섭리와 혈통의 끈에 묶여 있었다. 우선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주(主)의 종(從)으로 존재했다. 그에 따라 모든 인간은 저마다 하느님이 그에게 부여한 위치에서 하느님이 그에게 부여한 소명(召命)을 수행해야 했다. 노동의 소명을 부여받은 인간들은 대대로 똑같은 직업, 똑같은 노동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남자 또는 여자, 둘 중 하나로 존재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모두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었으므로, 아담과 이브가 범한 원죄의 굴레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중세시대의 모든 개인은 저마다 하느님이 엮여놓은 섭리와 세습의 끈에 옭매여 있었다. 아무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기독교의 사회구성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해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초월적 존재와 섭리의 끈이 일차적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 입자들은 부차적, 종속적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빛은 입자일까 파동일까? 물리학에서 오랫동안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이다. 이 문제에 빗대어서 표현한다면, 기독교는 입자설을 부정하면서 파동설을 주창해온 셈이다. 개인을 독립적 입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근대 자유주의 혁명 : 끈의 절단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맡고나선 역사적 과제는 개인들을 옭아매고 있던 섭리와 세습의 끈을 끊어버리고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인간은 저마다 독립된 신체를 가지고 있으며, 독립된 머리를 가지고 있다. 얼마든지 다른 장소로 옮겨갈 수 있으며, 다른 지위를 꿈꿀 수 있다. 특히 자신이 다른 위치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은 주어진 곳에 붙박여서 주어진 일만 수행해야 하는 현실에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기존의 사회적 끈들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게 되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불만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중소 지주귀족들과 신흥 상업자본가들이 이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신체와 정신을 옭아매고 있던 봉건질서의 사회적 끈들을 더 이상 참아내기 어려웠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뭉쳐나갔다. 불만의 표적은 왕과 극소수 대지주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던 왕당파 세력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배집단 안에서 권력투쟁이 폭발하게 된다.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세 차례나 맞붙은 내전에서 마침내 의회파가 왕당파를 누르고 승리하게 되는데, 이것을 흔히 ‘잉글랜드 내전’ 또는 ‘청교도혁명’이라고 부른다.

 

찰스1세 처형, 성명미상의 네덜란드 화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힘과 그것을 뺏으려는 힘이 정면으로 충돌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전세력에게 정신적 무기를 제공해주는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바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었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선두에 섰고,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가 뒤를 따랐다. 곧 이어 프랑스에서는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자유주의 깃발을 치켜들게 된다.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자임하고 나선 가장 중요한 과제는 개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개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욕구와 능력에 따라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사회질서를 해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세 천 년을 버텨온 ‘하느님의 나라’가 호락호락하게 해체될 리 없었다. 얽히고설켜 있는 낡은 끈들이 고래심줄보다 더 질기게 개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것을 풀어헤치려는 힘과 그것을 지켜내려는 힘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힘의 세계에서 반작용력은 작용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은 반대이다. 기존의 힘이 양보도 타협도 없이 완고하게 버틸수록 새로운 힘은 꼭 그만큼 강력하게 반대쪽으로 운동하게 된다. 풀어헤칠 수 경우에는 차라리 끊어버리고자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차라리 기존의 모든 사회적 끈들을 몽땅 끊어버린 뒤에 백지상태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끈들을 엮어나가는 길을 선택한다.

 

개인들에게 독립성과 자유를 부여하자면 우선 옥상옥(屋上屋)으로 존재하고 있던 초월적 존재의 목을 잘라버릴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자유자의자들이 찾아낸 무기는 ‘자연’이었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언제나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라면, 초월적 존재의 끈에 묶일 필요 없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연상태로부터 사회가 생겨나게 되는 경위와 과정을 밝혀내기만 하면 된다.

 

처음 이 과제를 맡고나선 사람은 토머스 홉스였다. 천 년 동안 갇혀 있던 암흑시대의 댐을 허물어서 근대 자유주의 강물의 물꼬를 튼 위대한 해방투사였다. ‘자연상태’, ‘자연권’, ‘자연법’, ‘사회계약’ 등등 자유주의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들을 개발해낸 인물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자면 우선 낡은 세상을 허물어야 한다. 홉스는 기존의 사회상태를 불도저로 말끔하게 밀어버린 뒤 자연상태에서 출발하였다. 그가 상상해낸 자연상태에는 독립적인 개인들만 존재했다. 인간 입자(粒子)들만 존재한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연적 본성에 따라 저마다 자유롭게 살아갔다.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사회적인 끈은 아직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구성 원리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처럼 ‘세상의 출발점’을 설정하는 일은 실은 그와 동시에 ‘인간의 본성’을 설정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는 ‘천지창조’를 세상의 출발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실은 인간에게 ‘신의 피조물’이라는 본성을 부여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는 ‘자연상태’를 세상의 출발점으로 상정함으로써 그와 동시에 인간에게 ‘독립된 입자(粒子)’라는 본성을 부여하였다. 자연상태에서 인간들은 저마다 독립된 개인들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아직 아무런 연결이 없다. 모든 사회적 관계와 질서는 그들이 자유의지에 따라 수립해나가면 될 것이다.

 

실제로 자유주의 사회구성 이론은 새로운 인간본성에서 출발하여 사회의 설립 이유와 설립 경위를 설명해나가는 식으로 전개된다. 개인의 모든 권리와 의무, 그리고 통치자의 모든 권리와 의무도 바로 이 본성에서 연역해나간다.

 

자유주의자들이 볼 때,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독립적 개인들뿐이며, 그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것은 자연법밖에 없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 관계 이전에, 또는 바깥에, 존재하는 독립적 입자들이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이후에 그들의 자유로운 결정을 통하여 맺어지게 된다. 달리 말해서, 사회는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들이 동의와 약속이라는 절차를 통하여 만들어낸 인공적 창조물에 불과하다. 인간 입자들이 서로의 독립성을 보장해주면서 관계의 끈을 맺을 수 있는 방법으로는 ‘계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서 ‘근대 사회계약론’이 태어나게 된다.

 

근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사회구성 원리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럴 것이다. 일차적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은 독립적 인간 입자들이다. 사회적 끈은 이차적, 파생적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초월적 존재는 목이 잘려버렸다. 그러므로 그가 주재하는 섭리와 세습의 끈도 존재할 수 없다.

 

빛은 입자일까 파동일까? 다시 이 문제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파동설을 부정하면서 입자설을 주창한 셈이다. 그들이 상정한 자연상태의 개인들은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이 세상의 근본으로 삼았던 원자들과 닮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데모크리투스가 상정했던 원자들이 아니라 에피쿠로스가 상정했던 원자들을 빼다 박은 듯하다. 이 주제는 뒤에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을 다루는 대목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튼, ‘자연상태’ 개념에 힘입어 근대 자유주의 사상은 중세 봉건주의 사회형성 이론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역사적 과제를 완수할 수 있게 된다. 이 개념은 ‘하느님의 창조’라는 개념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하였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독립적 개인으로 존재한다.” 누구나 이 개념을 직관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 사상의 힘은 바로 이런 직관성에서 나왔다.

 

과연 이 개념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가?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근대 자유주의자들이 출발점으로 내세운 ‘자연상태’ 개념은 뒤에 역사학과 생물학이 밝혀낸 인간의 자연상태와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설정하고 있는 ‘자연상태’는 시간적-역사적 상태가 아니라 실은 논리적-존재론적 상태를 가리켰다. 그들이 그것을 설정한 이유는 인간에게 기독교가 부여했던 본성과는 다른,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여한 본성은 ‘독립성’이었으며, 그것이 발현되는 모습은 ‘자유’였다.

 

사실에 부합하는 개념만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하느님의 창조’라는 개념도 결코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개념도 얼마든지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악의적인 거짓말조차 엄청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득력은 진실의 영역을 다투는 힘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을 다투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물어보는 것은 얼마든지 유효할 것이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개념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천지창조’에서 출발한 기독교 세상이 완고한 세상으로 될 수밖에 없었듯이, ‘자연상태’에서 출발한 자유주의 세상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완고한 세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뒤에 역사가 보여주게 된다.

 

그런 완고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오늘날의 사례를 한 가지만 확인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단군 이래 5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던 ‘꼰대주의’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혁명적으로 등장한 젊은 정치가의 사례이다. 그는 자기 입으로 ‘자유주의자’라고 표방하면서 나섰다. 이미 오래 전에 자유주의 시대가 흘러가버렸으며, 이어서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저물어버린 21세기의 대낮에 새삼스럽게 자유주의를 되살리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 자유주의가 얼마나 완고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겠다. 그가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공정성’은 실은 인간들 사이의 모든 연결을 절단해버리는 공상(空想)의 파생물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를 따라서 ‘공정성’을 떼창하고 있는 사람들은 실은 흘러간 옛노래를 신곡이라고 믿으면서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