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 입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자유주의 탄생의 비밀 : 생각의 불법유턴
로크는 노동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노동해방의 역사에 위대한 이정표를 남겼다. 그의 위대함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로크는 모든 가치의 원천은 ‘그냥 노동’이 아니라 ‘연결된 노동’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가 먹는 빵의 가치를 계산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단순히 경작하는 자의 수고, 수확하는 자와 타작하는 자의 노고, 그리고 제빵공의 땀뿐만 아니라, 황소를 길들인 사람들, 철과 광석을 캐내어 제련한 사람들, 쟁기, 제분소, 화덕 그리고 곡물의 씨를 뿌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빵이 될 때까지 필요한 다른 많은 도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나무를 베고 다듬은 사람들의 노고가 모두 노동으로서 평가되어야 하며, 그 결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자연과 대지는 그 자체로서는 단지 거의 무가치한 재료를 제공할 뿐이다. 모든 빵 조각에 대해서 그것이 향유될 때까지 노동이 제공하고 활용한 물자들을 우리가 추적한다면, 그것은 실로 사물의 엄청난 목록이 될 것이다. 철, 나무, 가죽, 나무껍질, 목재, 돌, 벽돌, 석탄, 석회, 옷, 염색약, 역청, 타르, 돛대, 밧줄, 그리고 노동자가 사용하는 모든 상품을 작업장까지 가져오는 배에 사용되는 모든 재료들 등등, 그 목록은 너무 길어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로크, 통치론, 40절, 42절)
이처럼 인간의 노동을 독립된(=고립된) 노동이 아니라 연결된 노동으로 파악함으로써 로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주었다.
인간은 저마다 육체적으로 독립된 입자로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의 삶은 실은 수많은 입자들의 노동이 서로 연결되는 파동을 통하여 실현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소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연결된 노동이 없다면 인간은 빵 한 조각, 밥 한 그릇조차 먹을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노동의 연결을 통하여 상호 의존하고 상호 보완하면서 존재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노동은 연결된 노동이며, 모든 노동생산물은 연결된 노동의 결과물이다.” 이런 명제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 그의 생각이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결과물을 서로 나누어 가질 것인가?”
그러나 역사가 일직선으로 발전해나가지 않듯이, 한 인간의 생각도 직선에서 벗어나기 일쑤이다. 때로는 감정에 복받쳐서 이성을 상실하기도 한다. 때로는 데이터 부족으로 상상력에 의존하다가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타산하면서 논리를 외면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위대한 사상가들도 생각의 일관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자연상태’와 ‘사회계약’ 개념을 발명하여 중세 천 년의 사상적 기반을 무너뜨린 위대한 홉스조차도 생각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여 다시 ‘절대권력자’를 부활시킨 사례를 보라! 로크는 달랐을까?
“모든 가치의 원천은 연결된 노동이다.” “모든 소유권의 원천은 연결된 노동이다.” 로크가 정립한 이 두 개념은 뒷날 사회주의 사상의 토대가 된다. 만약 자신이 정립한 이 두 개념을 일관성 있게 전개해나갔더라면 어쩌면 로크는 사회주의 사상의 아버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크는 사회주의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자유주의 사상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런 반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위대한 사상은 역사의 발전방향을 선취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사상은 시대의 아들딸이다. 로크도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17세기 말 영국은 자본의 원시축적이 진행되던 단계에 있었다. 아직 자본주의 공장노동과 시장이 발전하기 전이었다. 여전히 혈통과 세습을 통하여 자본을 획득한 왕과 대지주 귀족들이 지배적인 정치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왕당파’였다. 그에 맞서서 생산활동과 상업활동을 통하여 자본을 축적해나가고 있던 상공인 집단이 신흥 정치세력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흔히 직접 농업경영에 종사하기도 했던 중소지주 집단은 신흥 상공인 집단과 이해관계를 같이 했으며, 양쪽이 뭉쳐서 ‘의회파’를 형성하였다. 노동인구의 대다수는 여전히 농민이었으며,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지주들에게 매여 있었다. 그들은 대안세상을 건설할 정치세력으로 형성되기 어려웠다.
그 시대에는 아직 임금노동자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로크가 중소지주와 신흥상공인 집단을 대안세상의 건설자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을 새로운 주체세력으로 옹호하자면 노동가치론을 그에 맞게 굴절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로크는 화폐이론을 통하여 신흥 자본가 집단을 옹호하는 길을 걷는다.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의 아버지로 된다. 새로운 화폐이론을 수립할 때도 로크는 ‘하나님의 말씀 = 자연법’이라는 공식을 사용한다.
소유권에 관한 나의 견해에 대해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법하다. 만약 대지의 도토리나 다른 과실 등을 주워 모으는 것이 그것들에 대한 권리를 준다면,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만큼 많은 양을 독점하게 될 것이라는 반론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하겠다. 우리에게 노동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소유권을 부여하는 동일한 자연법이 또한 그 소유권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셔서 향유하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신약성경 디모데 전서> 6장 17절). 이 구절은 영감에 의해 확인된 이성의 목소리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주셨는가? 향유할 수 있는 만큼,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든지 그것이 썩기 전에 삶에 이득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주셨다. 누구든 그가 노동에 의해 자신의 소유로 확정할 수 있는 만큼 주셨던 것이다. 그것보다 많은 것은 그의 몫을 넘어서며, 다른 사람의 몫에 속한다.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썩히거나 파괴해서 버리도록 만들지는 않았다.
자연은 소유권의 한도를 인간의 노동의 양과 삶의 편의에 따라 적절하게 규정한다. 어떤 사람의 노동도 모든 것을 정복하거나 수취할 수 없다. 또한 그가 향유하여 소비할 수 있는 것도 매우 적은 양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그의 이웃에 피해가 될 정도로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어떤 사람이 소유하게 된 것들이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고 상하게 되면, 즉 그가 소비하기 전에 과일이 썩거나 사슴고기가 상하게 되면, 그는 공통의 자연법을 위반한 것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그는 이웃의 몫을 침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사용 할 수 있는 것, 그에게 삶의 편익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권리를 결코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크, 통치론, 31절, 36~37절)
이처럼 본래 자연은 인간들이 저마다 소유할 수 있는 양을 제한해두었다. 그런데 사회계약이 체결되기 전에 형성된 자연사회 안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인간들이 저마다 소유의 양을 무한정으로 늘려나갈 수 있는 수단방법을 개발해낸 것이다. 다름 아닌 화폐였다. 로크는 자연사회 안에서 교환경제가 발전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또는 달리 말하자면,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를 통하여, 화폐제도가 발생했다고 본다. 그가 화폐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100부셀[=40가마니]의 도토리나 사과를 주워 모은 자는 그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 그것들은 주워 모으자마자 그의 재물이다. 그는 그것들이 상하기 전에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몫 이상을 취한 셈이며,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은 셈이 된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동안 그것들이 상해서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일부를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면, 그는 그것들을 이용한 셈이다. 또한 만약 그가 1주일이 지나면 썩었을 법한 자두를 주고 1년 내내 상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호두와 교환하였다면, 그는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은 셈이다. 그의 수중에서 어느 것도 무용하게 상하지 않는 한, 그는 공동의 자산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재물의 일부분을 파괴하지도 않은 것이다. 만약 그가 다시 한 번 그의 호두를 주고 색깔이 마음에 드는 한 조각의 금속을 받는다면, 또는 조개껍질을 받고 그가 키우던 양을 주거나, 반짝이는 자갈 또는 다이아몬드를 받기 위해서 양모를 준다면, 그리고 그가 그것들을 자기 곁에 평생 동안 보관하고 있다면, 그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은 셈이며, 따라서 그는 그러한 내구재들을 그가 원하는 만큼 많이 쌓아놓을 수 있다. 그가 정당한 소유의 한계를 초과하여 소유하고 있는가의 여부는 그가 가진 소유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상해서 무익한 것이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식으로 화폐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화폐는 인간이 썩히지 않고 보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호간 합의를 통해서 참으로 유용하지만 썩기 쉬운 생활용품과 교환하여 화폐를 받게 되었다. (로크, 통치론, 46~47절)
여기서 주목할 점은 로크가 교환(=거래) 성향을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뒤에 아담 스미스도 그렇게 한다. 이 본성이 발현되면서 화폐가 발생했다고 보는 있는 것이다. 화폐를 대하는 로크의 태도는 매우 이중적이다. 우선 그는 화폐의 기능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화폐는 사물의 본질을 변질시킨다. 사용가치를 밀어내고 교환가치가 사물의 본질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의 본성과 자연권조차 변질될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인간의 주된 본분은 [사용가치를 지닌 사물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금이나 은은 식품, 의복 및 운송수단과 비교해볼 때 인간의 삶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들의 동의에 의해서만 가치를 지닐 뿐이다.
최초에는 오로지 인간의 삶의 유용성에 따라서 사물의 본질적인 가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사물의 본질적인 가치를 변화시키게 된다. 마모되지도 썩지도 않고 지속하는 황금색의 작은 금속 조각이 커다란 고깃덩어리 또는 곡물더미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사람들이 서로 합의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은 자연이 제공한 것들을 각자가 사용할 수 있는 만큼만 노동을 통해서 수취할 수 있는 권리만 가지고 있었다. (로크, 통치론, 37절, 50절)
그런데 인간사회에 화폐가 도입된 결과 경제적 독점과 불평등이 발생하고 확대된다. 그렇지만 이 불평등은 자연법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며, 공정 원칙을 위배하는 것도 아니다. 화폐는 사람들의 암묵적 합의를 통하여 도입되었으며, 그 과정에 자연법을 위반하는 폭력과 기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화폐를 통한 교환활동은 자유의지에 따른 활동이므로, 여기에도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화폐를 통한 교환은 등가교환(等價交換)이기 때문에 공정의 원칙을 침해하지 않는다. 등가교환을 통하여 엄청난 재물을 독점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불공정하지 않다. 그 결과 사회에 엄청난 불평등이 생겨나더라도 그것은 불공정의 산물이 아니며,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잉여생산물을 주고 금과 은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묵시적이고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서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생산물과 땅을 공정하게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였으며, 그 결과 토지를 불균등하고 불평등하게 소유하는 데 합의했다는 점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금속들은 소유자의 수중에서 상하거나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저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사유재산제도와 같은 사물의 분배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인간이 사회의 경계 바깥에서 [=사회계약이 체결되기 전에], 아무런 [명시적] 협정도 없이, 단지 금과 은에 가치를 부여하고 화폐의 사용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감히 대담하게 주장하고자 한다. 화폐를 발명하고 묵시적 합의를 통해서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던 인간들이 대규모 재산과 그에 대한 권리를 도입하지 않았더라면, 재산에 관한 동일한 규칙, 즉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소유해야 한다는 규칙이 여전히, 어느 누구도 궁핍하게 함이 없이, 유효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로크, 통치론, 50절, 36절)
지금 로크는 명시적 사회계약을 체결하는 대목에 와 있다. 자연사회에서 암묵적 합의를 통하여 형성된 것들 중 계승할 것을 계승하고 폐지할 것은 폐지하는 결정을 내리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연사회에서 형성된 세습군주제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해치는 것이라고 진단하였고, 사회계약을 통하여 그것을 폐지할 것을 주창하고 나선다. 그와 마찬가지로 화폐제도의 암묵적 도입이 인간사회에 엄청난 불평등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진단했다면, 사회계약을 그것을 폐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획기적으로 개정하자고 제안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만약 로크가 그런 제안을 했더라면 그는 어쩌면 사회주의 사상의 아버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그는 입을 닫는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갑자기 유턴을 한다. 오히려 독점과 불평등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로크의 생각에서 일관성이 무너지는 지점이다. 그는 독점과 불평등이 자연법을 위반하는 것도 공정 원칙을 위배하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독점과 불평등이 자연사회 안에서 암묵적 합의를 통하여 생겨난 것들이며, ‘공정성’이라는 자연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것들이라면, 명시적 사회계약에서 그것들을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다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자연사회에 현존하고 있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사회계약을 통하여 근대적 시민사회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여기서 로크가 노동가치론의 꼬리에 화폐이론을 붙여둔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의 화폐이론은 실은 불법유턴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이론이었다.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전환시대의 신흥 지배세력이 필요로 했던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사회계약론은 세습군주제의 정당성을 무너뜨렸다. 노동가치론은 대지주집단의 불로소득재산을 부정한 재산으로 몰아붙였다. 그와 동시에 화폐이론은 신흥 자산가들이 양심(=자연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무한정 많은 재산을 독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은 17세기 영국의 신흥 자산가 집단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상이었다. 그가 불법유턴을 거쳐서 완성한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뼈대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히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되는데, 맨 앞줄에 아담 스미스도 있었다. 그들이 정치학에 종사했든 경제학에 종사했든, 그들은 모두 불법유턴이라는 탄생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다. 뒷날 청년 맑스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숨기고 있는 탄생의 비밀을 이렇게 폭로하고 나선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시작된] 국민경제학은 사적 소유라는 기정사실을 더 이상 캐물을 수 없는 근본전제로 삼아 이론을 전개해나가기 시작한다. 국민경제학은 사적 소유의 기원에 대하여 규명해주지 않는다. 국민경제학은 오로지 사적 소유가 현실 속에서 경과하는 경험적 과정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공식들로 표현할 뿐인데, 그러고 나서 그 공식들을 불변의 법칙들로 간주한다. … 국민경제학자는 설명을 하고자 할 때 하나의 가상적인 자연상태를 설명의 근거로 설정한다. … 국민경제학자는 그가 규명해야 할 과제를, 즉 두 가지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예컨대 분업과 교환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마치 태초부터 주어진 상태 또는 사건인 양 전제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학자도 악의 존재를 근거로 삼아 원죄라는 사건을 설명하지 않고, 원죄라는 사건을 악의 기원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규명해야 할 과제를 마치 태초부터 주어진 역사적 사실인 양 전제하는 것이다. (맑스, <파리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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