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 여덟번째입니다.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루소의 사회계약론 비판
로크의 시대를 거친 뒤에도 노동해방의 역사는 꾸역꾸역 전진해나간다. 뒷날의 진행방향을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하나는 철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학적인 것이다.
먼저 철학의 영역에서, 로크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라는 건널목에서 불법적으로 유턴하는 장면을 보자. 로크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앞서 인용했듯이,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로 그것을 인정하였다. 자연상태의 인간도 원자(原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構成員)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다음과 같은 피조물로 만들었다. 그는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필요, 편리 및 성향이 강력히 요구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생활을 하도록 만들었으며, 나아가 이해력과 언어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생활을 지속적으로 향유하도록 만들었다. 최초의 사회는 남편과 아내의 사회였으며, 그로부터 양친과 자식 간의 사회가 비롯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기에 주인과 노예 간의 사회가 추가되었다.
(로크, 통치론, 77절)
그러나 로크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돌아서면서 부정해버린다. 하느님이 맺어준 부부사회조차도 실은 ‘두 개인이 자유롭게 체결한 인위적 계약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셈이다. 불법유턴이다.
부부사회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자발적인 계약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 계약은 그것의 주된 목적인 생식에 필요한 상호간의 육체적인 교섭과 육체에 대한 권리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계약은 그것들과 더불어 상호부양과 협조 및 이해관계의 일치를 또한 끌어내는데,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배려와 애정을 결합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동의 자식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들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부모로부터 양육받고 부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로크, 통치론, 78절)
최초의 사회가 존재하기 전에 ‘남편’이라는 원자와 ‘아내’라는 원자가 먼저 존재했으며, 그들이 자유롭게 계약하여 부부사회를 형성하였다. 이것이 로크의 진짜 존재론이며, 이것이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원자론적 존재론이다. 원자론에 대해서는 뒤에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제 경제학의 영역으로 넘어가서, 로크가 ‘교환’이라는 건널목을 신호등도 무시하고 황급히 건너가는 장면을 보자. 앞서 살펴봤듯이, 로크가 소박한 화폐이론을 개발한 이유는 재산의 독점과 불평등을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부터 유래되는 자연적 결과물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연발생적으로 화폐제도가 도입된 사회에서 독립적 경제주체들 사이의 자유교환을 통하여 재산의 독점과 불평등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도토리 줍는 사람, 자두를 생산하는 사람, 호두를 생산하는 사람, 화폐를 소유한 사람 등등은 저마다 독립적 경제주체로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타인에게 종속된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독립된 자영업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다. 여기에 자연법을 위반하는 사항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자유교환의 결과 재산의 독점과 부의 불평등이 발생한다. 로크가 볼 때, 그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화폐가 ‘썩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정당한 소유의 한계를 초과하여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는 그가 가진 소유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상해서 무익한 것이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식으로 화폐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화폐는 상하지 않고 보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은 상호간 합의를 통해서 참으로 유용하지만 썩기 쉬운 생활용품과 교환하여 화폐를 받게 되었다.
근면함의 상이한 정도에 따라 사람들이 상이한 비율의 재산을 가지는 것처럼, 이같은 화폐의 발명은 사람들에게 재산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로크, 통치론, 46~48절)
여기서 우리는 로크가 내세운 화폐이론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갈 것이다. 다만 그의 화폐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한 가지 전제만 짚고 넘어가자. 로크가 화폐이론에서 모든 자유교환을 등가교환이라고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만약 자유교환들 중 일부는 등가교환이 아니라 부등가교환라면 어떻게 될까? 등가교환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등가교환이라면? 그래도 로크는 자유교환을 공정한 과정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 결과 발생하게 되는 재산의 독점과 불평등을 자연스럽고 정의로운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제대로 대답하자면 우선 임금노동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임금노동 속에 숨어 있는 부등가교환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로크는 아직 임금노동이 거의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임금노동이 널리 일상화된 것은 자본주의 공장생산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러므로 공장생산을 목격할 수 없었던 그에게 임금노동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책임을 묻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로 될 것이다.
임금노동 시대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세 번째 사회계약론,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다. 루소는 평생 동안 노동에 대해서 별로 연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사회계약론을 건너 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가 새로운 관점에서 출발하여 홉스의 자연권 이론과 로크의 소유권 이론을 비판하는 대목은 그 자체로도 매우 재미있지만, 뒤에 맑스의 노동해방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빼먹을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태어났으며,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 불어권 스위스에 위치하고 있는 제네바 공화국은 종교개혁운동의 지도자 칼뱅이 공화국으로 설립한 도시국가였다. 프랑스에서 개신교 탄압이 지속되는 동안 수많은 위그노 개신교도들이 제네바 공화국으로 망명해갔는데, 루소의 5대 선조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루터가 촉발하고 칼뱅이 폭발시킨 종교개혁운동은 유럽에서 중세 봉건주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절서를 수립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앞서 살펴봤듯이, 영국에서 1651년 청교도혁명을 일으킨 것도 개신교 세력이었으며, 1688년 명예혁명을 일으킨 것도 청교도 개신교 세력이었다. 두 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의 봉건귀족 집단과 신흥상공인 집단은 대타협을 한다. 한쪽은 신분과 토지를 보존받기로 하고, 다른 한쪽은 자유영업권을 보장받기로 한 것이다. 이제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설 장애물은 없어보였다.
같은 기간 프랑스는 영국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1589년 왕위에 오른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켰다.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던 개신교도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금지시킴으로써 낭트 칙령은 프랑스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디딤돌로 작동했다. 그와 동시에 앙리 4세는 봉건영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발전시켜나갔다. 이대로 절대주의 군주와 신흥상공인 집단이 손을 잡고 봉건적 지주귀족 집단을 밀어내는 쪽으로 전진했더라면 아마 프랑스에 좀 더 일찍 근대 자본주의 질서가 성립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앙리 4세에 이어 1610년 즉위한 루이 13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창하면서 왕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어서 1643년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 때 절대주의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는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큰소리쳤고, 사람들은 그를 ‘태양왕’이라고 불렀다. 그의 치세 동안 프랑스 국력은 막강해졌다. 그는 여기저기 전쟁을 벌여서 국토를 넓혔으며,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루브르 궁전을 세웠다. 그러나 절대군주와 상공인집단 사이에는 동맹도 타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로 상공인들이 신봉하고 있던 개신교는 교황의 신앙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국왕의 권력독점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있던 위그노들을 눈엣가시로 여겼으며, 그들과 타협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1685년, 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반포하여 가톨릭만 프랑스 국교로 인정한다. 그것은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조처였다. 이렇게 해서 위그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된다.
그러자 수십만 명의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탈출하여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 미국, 스위스 등지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그들은 주로 과학자, 기술자, 상공인 등이었다. 퐁텐블로 칙령은 향후 백 년 동안 프랑스 상공업 발전의 걸림돌로 작동하게 된다. 절대주의와 왕권신수설은 1789년 대혁명을 통하여 루이 16세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릴 때까지 프랑스를 지배한다.
1712년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태어난 루소는 평민 출신 사상가이며, 독학으로 위대한 사상을 쌓아올린 천재였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시계공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5일 만에 출산후유증으로 죽었다. 루소는 변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열두 살 되던 해부터 재판소 필사 견습공, 조각가 도제, 귀족부인 집사 등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청년이 된 루소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는데, 태양왕 루이 14세의 뒤를 이은 루이 15세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루이 15세는 무능했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절대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교류했으며, <백과전서>에 음악 관련 항목을 집필하기도 했다. 1752년에는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발표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오페라의 일부 선율은 뒤에 찬송가 또는 동요로 채택되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며, 오늘날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로 알려져 있는 곡이다. -각주-)
“르네상스 이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도덕의 개선과 교양에 기여했는가?” 1750년, 디종 시 학술원이 이 주제로 학술논문 현상모집을 했다. 여기에 루소는 <학문예술론>을 써서 응모하였고, 1등으로 당선되어 상금과 명성을 함께 얻었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자연법으로 허용되는가?” 1753년, 디종 시 학술원은 이 주제를 내걸고 학술논문을 모집했다. 여기에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써서 응모했지만, 낙선하고 만다.
“르네상스 이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도덕의 개선과 교양에 기여했는가?” 1750년, 디종 시 학술원이 이 주제로 학술논문 현상모집을 했다. 여기에 루소는 <학문예술론>을 써서 응모하였고, 1등으로 당선되어 상금과 명성을 함께 얻었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자연법으로 허용되는가?” 1753년, 디종 시 학술원은 이 주제를 내걸고 학술논문을 모집했다. 여기에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써서 응모했지만, 낙선하고 만다.
루소는 2년 뒤에 그 논문을 책으로 출간했는데, 아무 데서도 호평을 받지 못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조차 그 저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볼테르는 루소에게 편지를 보내어 “당신의 저작을 읽으면 사람은 네 발로 걷고 싶어질 정도입니다”라고 비아냥거렸다. ‘이성의 계발을 통한 인류의 진보’를 굳게 믿고 있던 계몽주의자들이 볼 때 루소의 반(反)이성주의와 반(反)문명주의는 수긍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루소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그가 1762년에 내놓게 될 <사회계약론>과 짝을 이루는 저작이다. <기원론>은 <계약론>을 쓰게 되는 이유를 담고 있으며, <계약론>은 <기원론>이 제기한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원론>이 전반부를, <계약론>이 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한 편의 저작을 읽듯이 읽어야 두 저작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홉스의 절대주의 사회계약론과 로크의 자유주의 사회계약론을 정면으로 반박하였으며, 뒤에 루소가 제3의 사회계약론을 쓰기 위한 준비작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기원론>은 당시 영국의 자유주의자,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등 유럽의 모든 진보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자연법 사상을 정면으로 까면서 시작된다. 모든 자연법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유용하면서도 가장 진보되지 않은 것이 인간에 관한 지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단 한 마디 격언이 수많은 도덕주의자들이 쓴 두툼한 책들보다도 더 중요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인간 그 자체를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있겠는가?
[홉스와 로크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법의 참된 정의에 대해서 그처럼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주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법의 관념, 특히 자연법의 관념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최석기 옮김, 동서문화사, 37쪽, 40쪽>
루소의 도발은 뒷날 청년 맑스가 선배·동료 사상가들에게 도발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도발의 이유도 비슷하다. ‘인간의 뿌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을 통해서 뒤집어져야 한다. 그런데 사상도 인민대중을 사로잡는 즉시 물질적 힘으로 된다. 사상은 그것이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비로소 인민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리고 사상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되는 즉시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근본적이라 함은 대상을 그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의 뿌리는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이다.
(맑스, <파리 수고>, 1844)
루소가 볼 때 자연법 사상가들은 결과를 전제로 내세우고 있었다. 미개인을 그린다면서 실은 문명인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홉스, 로크 등 모든 자연법 사상가들은 자연상태의 인간이 이성을 타고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사회계약을 이성의 발현으로 보았다. 그러나 루소가 볼 때 이성은 역사의 산물이지 결코 출발점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것은 본능과 감성뿐이었다.
[홉스와 로크처럼] 사회의 기초를 검토한 철학자들은 모두 자연상태까지 소급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그곳에 도달한 철학자는 없었다. 그들은 미개인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실은 사회인을 그렸을 뿐이다.
인간 영혼의 최초의 가장 단순한 움직임에 대해 고찰해본다면, 나는 거기에서 이성보다 앞선 두 가지의 원리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자기보존과 안락에 대하여 강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의 동류인간이 죽거나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역정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회성의 원리 따위를 끌어올 필요조차 없다. 이 두 가지 원리를 우리의 정신이 혼합함으로써 자연법의 모든 규칙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45쪽, 41~42쪽>
홉스와 로크는 이성을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 보았으며,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주는 인간고유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 자연적 본성만 부여하고 있다. 육체성과 정신성이다.
그와 달리 루소는 ‘이성보다 앞서는 두 가지 원리’를 도입하고 있다. 자기보존 본능과 공감 본능이다. 그리고 ‘공감 본능’이 곧 ‘사회성’의 다른 말이라는 점을 루소는 위의 인용문에서 반어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루소는 인간에게 세 가지 자연적 본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육체성, 정신성, 사회성이다.
이처럼 사회성을 인간의 자연적·원초적 본성 중 하나로 규명했다는 점에서 루소의 천재성과 혁명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홉스도, 로크도, 프랑스 계몽주의자들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것을 루소가 찾아낸 것이다. 루소가 보기에 홉스와 로크가 그려낸 사회는 사회성이 없는 원자들의 사회, 소시오패스들의 사회였다. 루소가 홉스나 로크와는 전혀 다른, 세 번째 사회계약론을 쓰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따르자면, 자연상태의 인간은 이성과 권리만 가지고 있다. 감성과 의무는 가지고 있지 않다. 타인에 대한 의무는 오로지 합리적인 상호계약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호계약 이전에는 어떤 의무도 있을 수 없다.
그에 맞서서 루소는 자연상태의 인간이 자기보존 본능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감 본능도 타고난다고 주장한다. 이때 자기보존 본능은 권리의 원천에 해당되며, 공감 본능은 의무의 원천에 해당된다. 루소의 말을 들어보자.
타인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오로지 [이성의] 지혜가 주는 뒤늦은 교훈으로서만 명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연민이라는 내적 충동에 거역하지 않는 한, 다른 인간에 대해서 또는 다른 어떤 감성적 존재에 대해서도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기보존에 관계되기 때문에 자기를 우선적으로 앞세워야 할 정당한 경우만은 예외이다.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42쪽>
공감 본성이 인간의 자연적 본능에 속한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루소는 맨더빌이 쓴 <꿀벌 이야기>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창살에 갇혀 있는 죄수 이야기다. 창살 바깥에는 어머니와 아기가 있는데, 사나운 짐승이 아기에게 달려들고 있다.
그 죄수는 한 마리의 짐승이 한 어린아이를 그 어머니의 가슴에서 가로채 무시무시한 이빨로 손발을 물어뜯고 그 아이의 살아 움직이는 창자를 발톱으로 찢고 있는 것을 감옥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건에 아무런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목격자라도 어찌 무서운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광경을 보고 정신을 잃어버린 어머니와 숨이 끊어져 가고 있는 아이를 위해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뻗지 못하는 일에 어찌 심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모든 이성적 성찰에 앞서는 자연의 순수한 충동이며, 이것이 아무리 타락된 풍속이라도 파괴하기 힘든 자연의 연마된 힘이다.
만일 자연이 인간에게 이성의 보완물로 연민의 정을 주지 않았다면, 인간은 그 모든 덕성을 가지고 있어도 괴물에 지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꿀벌 이야기>의 작가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바로 이 특질로부터 (그가 인간에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회적인 미덕이 흘러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어떤 사람이 괴로워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동정이란 괴로움을 당하는 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감정일 뿐이며, 미개인에게는 희미하지만 왕성한 감정인 반면, 문명인에게는 선명하지만 미약한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 동정은 옆에서 보고 있는 동물이 괴로워하고 있는 동물에게 깊이 동화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강력한 것이 된다.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91~92쪽>
죄수와 아기의 장면을 보면서 절대주의 사회계약론자들과 자유주의 사회계약론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들은 죄수가 비통해 하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수와 아기는 상호계약을 맺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수가 아기를 보호해야 할 의무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아기가 죽든 살든 죄수에게는 아무 이익도 손해도 없다. 마지막으로, 두 사회계약론을 따르자면, 인간은 아예 공감 본성을 타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시오패스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수는 아기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어야 한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따르든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따르든, 아무리 찾아봐도 죄수가 비통해 하는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오늘날 자유주의 사회계약론이 유일하게 올바른 사회계약론이라고 교육받고 나서 자본주의 사회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아마 죄수와 아기의 장면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외치고 있는 구호를 들어보자.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여기 어느 구절 속에 인간의 공감 본능이 내포되어 있을까? 비정규직의 고통에 대한 정규직의 애통함이 담겨 있을까?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먼저 홉스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홉스는 절대주의 사회계약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루소가 볼 때 자연상태는 전쟁상태가 아니라 실은 평화상태였다. 그리고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공감 본능에 있었다.
홉스처럼 인간은 선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본디 악하다든가, 미덕을 모르므로 악에 빠지기 쉽다든가, 동포에 대한 봉사를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언제나 거부한다든가, 또는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 마땅히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여 어리석게도 자기를 온 우주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상상하고 있다든가 하는 따위의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하자. ...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에 대해 추론해 나아갈 때, 자연상태란 우리의 자기보존을 위한 배려가 타인의 보존에 있어서도 가장 해가 적은 상태이므로, 이 상태는 평화에 알맞은 인류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연민은 자연의 감정이며, 그것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의적인 폭력을 조절하여 종 전체의 보존에 공헌한다.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아무런 성찰도 없이 도와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연민 때문이다. 또 자연상태에 있어 법률, 풍속, 미덕을 대신하는 것도 이것이며,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아무도 거역하지 못한다는 장점이 있다. 튼튼한 모든 미개인들이, 만일 그들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자기 생필품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나약한 아이나 병약한 노인이 고생하여 손에 넣은 생필품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이 연민 때문이다. ...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은 사악하기보다 야성적이었으며, 타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마음보다 자기들이 입을지도 모르는 해로부터 몸을 지키는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위험한 분쟁에 말려들어갈 우려는 없었다.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88쪽,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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