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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문학

[노동인문학] 노동해방, 오래된 꿈_(10) 루소의 새로운 사회계약론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 연재 글을 쓰고 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인생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어쩌면 이 연재 글은 미완성으로 끝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라는 메시지를 글 머리에 써서 보내주셨습니다. [편집자주]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루소의 새로운 사회계약론 : 두 가지 자유

 

 

 

자연으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자들이 이 구호를 루소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붙여왔다. 마치 루소가 발명한 구호인 양, 또는 루소의 사상을 요약하는 구호인 양. 그러나 그것은 연구자들이 발명한 구호였을 뿐, 루소의 것이 아니었다. 루소는 역사의 진보를 굳게 믿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서 원시상태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했을까? 문명상태를 해체하고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고 했을까?

 

루소가 볼 때, 원시상태는 인간들이 서로 연결되어 협동노동을 시작하기 전의 상태였다. 개인들이 협동노동의 끈에 묶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유를 누릴 수 있던 상태였다. 이런 상태를 루소는 사슴사냥 이야기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20세기 연구자들이 사슴사냥 게임이라는 이론으로 되살려낸 이야기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동족의 도움에 의존해야 할 경우와 경쟁을 위해서 동족을 경계해야 할 경우를 경험을 통해서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앞의 경우, 인간은 마치 가축의 무리처럼 동족과 결합하든가, 최소한 일종의 자유로운 협동에 따라 결합했다. 그 협동은 아무도 구속하지 않았으며, 그 협동을 만들어낸 일시적인 욕구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만 지속되었다. 뒤의 경우, 각자는 만일 자기가 힘이 세다고 생각되면 폭력에 호소하고, 자기 쪽이 약하다고 느끼면 수단과 지략을 써서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고 했다.

이렇게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약속과 그것을 실행하는 일의 이익에 대해 개략적인 관념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해득실이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앞날을 내다보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기는커녕 당장 내일 일어날 일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슴을 잡으려고 할 경우, 각자는 자기가 맡은 자리를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마리의 토끼가 그들 중 누군가의 손에 닿는 곳을 우연히 지나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그는 아무 주저 없이 그 토끼를 쫓아가서 잡았고, 그 때문에 자기 동료가 사슴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루소, 사회계약론, 103~104쪽)

 

이런 자연상태와 달리 문명상태는 모든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협동하고 있는 상태이다. 협동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서로 보완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앞서 로크가 <통치론>에서 지적했듯이, 사회상태란 모든 개인들이 서로 협동노동의 끈으로 엮여 있는 상태이다. 그 대목을 기억해보자. 빵 한 개를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동의 끈으로 엮여 있었던가! 이제 와서 문명상태를 해체하고 자연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협동노동의 끈을 모두 끊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더 이상 아무도 빵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루소가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은 자연상태에 머무르기 위하여 쓸 수 있는 힘보다 인간의 생존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의 저항력이 더 커진 시점에 이르렀다. 이제 원시상태로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으며, 인류는 생존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루소, 사회계약론, 175쪽)

 

이처럼 원시상태로 되돌아가는 길이 막혀버렸다면, 이제 남은 길은 개인들이 저마다 협동노동의 끈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길뿐이다. 루소가 볼 때, 열쇠는 협동을 조직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협동의 강도와 방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다만 이미 있는 힘들을 결합하여 작동방향을 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미 있는 힘들을 하나로 모아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단결된 힘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추동력에 따라 함께 움직이게 해야 한다. (루소, 사회계약론, 175쪽)

 

정리해보자.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자유로운 협동을 원했다. “자연적 본성이 허락하는 대로 자유롭고 건강하고 선량하게 살면서, 계속 상호 독립 상태에서 교류의 즐거움을 누리기를원했다. 그러나 사슴사냥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협동은 개인들에게 자유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원시상태의 개인들은 아직 입자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협동을 포기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의 자유는 실은 협동을 하지 않는 자유’, ‘협동으로부터 도피하는 자유였다. 뒤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철학자들은 이런 자유를 현존재로부터 도피하는 자유’(freedom from existence)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약 협동을 포기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협동노동을 통한 상호의존과 상호보완의 끈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자유로운 협동이 가능할까? 협동에 참가하는 개인들이 저마다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미 인간은 자연상태를 넘어서서 문명상태로 들어선지 오래되었다. 이제 와서 협동노동을 통한 상호의존과 상호보완의 끈을 해체하고 원시상태의 자유로운 개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 따라 자유의 문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협동을 포기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할 것인가, 아니면 협동을 수행함으로써 자유를 포기할 것인가?

 

이제 자유의 문제는 더 이상 이런 이율배반적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협동노동을 통한 상호의존과 상호보완의 끈은 더 이상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명상태의 개인들은 저마다 입자인 동시에 파동으로 존재하고 있다.

 

협동노동의 끈으로 엮여 있는 개인들이 과연 어떻게 저마다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문명상태의 인간들이 풀어야 할 자유의 문제이다. 철학자들이 흔히 현존재 속에서 구현하는 자유’(freedom in existence)라고 부르는 자유이다. 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을 풀고자 했던 문제도 바로 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