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회 쉬고 돌아온 <노동인문학>입니다. 이번 달 부터 박장현 원장님의 직책이 '상임교과위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상임교과위원
상품화 : 출발점
맑스는 인류의 역사를 다섯 단계로 구분하였다.
- 원시 공산제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
- 미래 공산주의
여기서 맑스가 사용하고 있는 시대구분의 잣대는 ‘생산양식’이다.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가? 이것이 맑스가 보기에 생산관계와 생산양식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며, 역사의 발전 단계를 규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맑스의 역사발전 5단계론은 적잖은 논란거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유럽의 역사를 근거로 삼고 있다. 과연 유럽 역사의 시대구분이 다른 대륙의 역사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 한국의 역사도 5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하고 있을까? 이 문제를 두고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 자주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한국의 역사는 유럽과 같은 중세 시대가 존재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맑스 자신도 유럽적 생산양식과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 5단계론의 보편적 타당성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나도 맑스의 역사발전 5단계론을 공부하면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이론을 빌려 씀으로써 중세 봉건제 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원리와 과정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 노예제 사회가 중세 봉건제 사회로 전환하는 원리와 과정도 그처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대 노예제 사회도 농경사회였고, 중세 봉건제 사회도 농경사회였다. 고대의 주요 생산수단도 토지였고, 중세의 주요 생산수단도 토지였다. 토지 소유를 근거로 삼아 지주 계급이 무산자 농민대중을 착취했던 것은 고대로부터 중세가 끝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1~3세기 로마제국 시대에도 그랬고, 10~18세기 신성로마제국 시대에도 그랬다. 둘 사이에 도대체 어떤 질적 전환이 있었지? 조선 시대의 노비는 유럽 고대 시대와 노예와 더 비슷했을까, 아니면 중세 시대의 농노와 더 닮았을까?
나는 늘 이 대목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그것은 마침내 반발로 이어졌다. 고대 노예제 사회와 중세 봉건제 사회를 역사발전의 두 단계로 구분하는 것은 서양 사람들의 관습이 아닐까? 맑스도 그 관습을 이어받고 있는 것 아닐까? 한국의 역사에 중세 시대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쪽도 실은 서양 사람들의 관습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둘 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날뛰고 있는 손오공이 아닐까?
이런 논란을 건너뛰면서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를 좀 더 보편적으로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이론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역사발전 4단계론이다.
가라타니는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을 잣대로 삼아서 역사발전 단계를 구분하고 있다. 그의 구분법을 따르자면, 인류 역사는 다음과 같이 4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해나간다. 여기서 ‘호수’(互酬)란 ‘증여를 통하여 상호 보상하는 교환’을 뜻한다.
- 호수제 단계 (=A교환양식, 원시시대)
- 약탈·재분배 단계 (=B교환양식, 고대 및 중세)
- 상품교환 단계 (=C교환양식, 근대)
- X 단계 (=D교환양식, 미래)
가라타니의 시대구분은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단계로 묶어서 ‘농경시대’로 분류하고 있다. 맑스의 5단계론과 가라타니의 4단계론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는 좀 더 깊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 나는 가라타니의 제안에 따라 고대와 중세를 하나의 단계로 보기로 한다. 그리고 상업혁명이 가져온 교환양식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때 인민대중의 노동과 삶이 상품화되어 가는 과정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상품화가 가져온 변화를 살펴보자면 먼저 상품화가 시작되기 전의 모습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농경시대 보통사람들이 노동하면서 살아가던 모습이다. 유럽 중세 시대 농민의 노동과 삶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중세 이탈리아 법학자 피에트로 데 크레센치(Pietro de’ Crescenzi)가 1306년에 쓴 <농촌의 혜택>(Ruralia commoda)에 담긴 내용을 요약하여 1470년 무렵 달력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다. 조선시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쩌면 크레센치의 달력 그림과 비슷하게 되지 않을까?
- 1월 눈 밑에서 찰흙 캐기
- 2월 밭에 거름주기
- 3월 포도나무 가지치기
- 4월 양털 깎기
- 5월 매사냥
- 6월 건초 만들기
- 7월 밀 수확
- 8월 타작
- 9월 밭 갈고 씨 뿌리기
- 10월, 포도 으깨어 포도주 담기
- 11월 돼지를 숲으로 몰고 가서 도토리 먹이기
- 12월 돼지 도살…
농경시대에도 상품교환은 존재했다. 시장과 화폐도 존재했으며, 임금노동도 존재했다. 그러나 인민대중의 노동과 삶에서 상품교환이 차지하는 몫은 매우 미미해서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농경시대 내내 대다수 인구는 가족 단위의 농업노동에 종사했으며,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자급자족하면서 살았다.
크레센치의 달력 그림에 나열된 것처럼 농업은 여러 가지 노동을 요구했으며, 매년 이런 노동이 절기에 맞추어 되풀이되었다. 농부는 자연의 운행에 민감하였고, 그때그때 절기에 맞추어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았다.
농부는 만능 노동자였다.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곡식을 기르고, 익은 곡식을 탈곡하고 빻아서 빵을 만드는 일까지, 모든 노동을 홀로 수행할 수 있었다. 가족 구성원 외에는 분업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양을 길러 털을 깎고, 실을 뽑고, 옷감을 짜고, 옷을 만드는 노동도 모두 가족 안에서 수행되었다. 남자들은 강한 근력이 요구되는 농사일을 맡았고, 여자들은 가벼운 농사일을 맡았다. 거기에 덧붙여서 여자들은 1년 내내 우유 짜기, 버터와 치즈 만들기, 맥주 만들기, 빵 굽기, 양털에서 실을 뽑아 천 짜기, 닭과 오리 키우기, 요리, 집안청소, 자녀 돌보기 등등의 일로 쉴 틈이 없었다.
농부 가족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스스로 생산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산한 것을 모두 향유할 수는 없었다. 농노는 생산물 중 일부를 지주에게 신공(身貢)으로 바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해진 시간만큼 그들의 노동력을 신역(身役)으로 바쳐야 했다. 아직 상품과 화폐가 교환의 매체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주와 농부 사이의 교환은 주로 현물 신공과 신역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농부들 사이의 교환도 주로 현물로 이루어졌다.
모든 토지는 법률적으로 왕의 소유물이었다. 왕은 직영 토지를 제외한 나머지 토지를 소수의 대귀족과 교회에 대여하였다. 그 대가로 대귀족과 교회는 왕에게 충성과 복종을 바쳤다. 한편, 대귀족과 교회는 자신이 대여받은 땅을 다시 나누어서 하급귀족과 지방교회에 대여하였다. 이렇게 땅을 대여하고 충성을 바치는 교환이 여러 번 되풀이 되어 마지막에는 ‘영주’(tenant)라고 불리는 지주가 ‘장원’(manor)을 대여받게 된다. 여기서 ‘장원제도’(manorialism)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장원의 넓이는 대략 수백~수천 에이커, 한국 단위로 환산하면, 수십만~수백만 평 정도 되었다. (1에이커는 1,224평이다.) ‘마을’ 정도의 규모였던 셈이다. 장원의 경작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한 부분은 영주의 직할지였는데, 흔히 장원 경작지의 1/3 정도를 차지했다. 나머지 2/3 정도는 농노들에게 대여하는 땅이었다. 농노 당 대략 3에이커 정도가 돌아갔다고 한다. 자신의 땅을 소유한 자유농도 존재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경작지 바깥의 숲과 목초지는 장원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저마다 그곳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가축에게 풀이나 도토리를 먹였고, 겨울에는 땔감을 구했다.
1304년 영국의 컥섬(Cuxham) 지방에 살았던 리처드 보브처치(Richard Bovechurch)는 전형적인 농노였다. 그에 대해서 작성된 세금 평가 자료는 당시 농노들이 평균적으로 점유 또는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1실링은 12펜스였다.)
항목 | 가치 |
말 1마리 | 2실링 |
암소 1마리 | 4실링 |
새끼 돼지 1마리 | 6펜스 |
암탉 3마리 | 3펜스 |
곡식을 파종한 2에이커 밭 | 4실링 |
목초를 파종한 2에이커 밭 | 2실링 |
오두막집 1채 | 18펜스 |
놋냄비 1개 | 12펜스 |
냄비 1개 | 3펜스 |
수레 1개 | 8펜스 |
기타 잡다한 도구 | 18펜스 |
합계 | 17실링 6펜스 |
출처: Singman / Forgeng, Daily Life in Medieval Europe, 1999
농노는 땅을 대여받은 대가로 1주일에 2일 또는 3일, 영주의 직할지를 경작해야 했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의 이틀 중 하루를 신역으로 바쳐야 했던 것이다. 농번기에는 더 많은 날을 직할지에서 노동해야 했다. 농노는 직할지의 경작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땅을 경작할 수 있었다. 직할지에 먼저 씨를 뿌린 다음에야 자신의 밭에 씨를 뿌릴 수 있었고, 직할지를 먼저 추수한 뒤에야 자신의 밭을 추수할 수 있었다. 가뭄이 들면 먼저 직할지에 물을 댄 다음에 비로소 자신의 밭에 물을 댈 수 있었다.
농노는 신역 외에도 여러 가지 신공을 바쳐야 했다. 자기 밭에서 생산한 농산물 중 일정한 몫을 영주에게 세금으로 바쳐야 했으며, 생산물의 1/10을 교회에 십일조로 바쳐야 했다. 방앗간을 사용하면 방앗간 사용료를 바쳐야 했고, 영주 집에 경조사가 있으면 부조를 바쳐야 했다. 농노가 죽고 그 땅을 유족이 물려받자면 상속세를 바쳐야 했다. 신공은 주로 곡식과 가축 등 현물로 바쳤다.
이런 식으로 지주는 땅을 대여하고 농노는 신역과 신공을 바치는 교환이 중세 시대 정치경제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양식이 아니라 실은 지주가 농노의 모든 재산과 노동을 약탈한 뒤 일부를 재분배해주는 교환양식이었다. 고대 시대에도 그와 비슷한 교환이 지주와 무산농민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양반과 노비 또는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교환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농노 제도는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거듭되는 전쟁과 역병은 인구를 감소시켰다. 특히 1347~52년에 절정에 달했던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했다. 급격한 인구 감소는 노동력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점점 더 많은 자유농민이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행운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도시가 함께 발달하였고, 그곳에서는 농촌에는 없던 새로운 기회가 있었다. 장원에서 도망친 농노들도 도시로 몰려들었다.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경작하지 못하고 방치되는 토지가 늘어났다. 그럴수록 지주를 상대로 한 농노들의 협상 조건이 유리해졌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겹친다. 상업과 화폐의 발달이 농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다. 농노는 돈을 저축하여 그것을 영주에게 바침으로써 신역과 신공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침내 돈으로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그것은 농경시대 사회질서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던 현물경제 교환양식을 뿌리부터 뒤흔들게 된다.
농노들은 개인적으로 해방을 모색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집단적으로 해방의 길을 찾기도 했다. 그들은 장원 안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영주를 상대로 한 정치적 힘을 키웠다. 농노들의 집단적 행동은 이곳저곳에서 때때로 민란으로 발전했다. 1381년 영국에서 발생한 와트 타일러(Wat Tyler) 난은 농노 제도의 종식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유럽 전역에서 농노 제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14세기 말경에 이르면 농업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 중 무급 농노보다 임금 노동자가 더 많아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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