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상업혁명?
두 차례의 대전환
지금까지 인류가 노동과 삶에서 겪었던 가장 큰 전환을 꼽으라면 과연 무엇을 꼽아야 할까? 흔히 역사가들은 두 차례의 대전환을 꼽고 있다. 1만 년쯤 전에 일어난 농업혁명과, 3백 년쯤 전에 일어난 산업혁명이다.
농업혁명을 통하여 인류는 5백만 년 동안 이어오던 원시인의 삶을 마감하고 문명인의 삶을 시작하였다. 5백만 년 동안 원시인을 먹여 살려왔던 수렵채집 노동은 이제 농경목축 노동으로 바뀌게 된다.
수렵채집 노동은 자연이 완성품으로 제공해주는 것을 잡거나 줍는 활동이다. 수렵은 당장 먹을 수 있는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는 활동이었고, 채집은 당장 먹을 수 있는 과일이나 채소를 줍는 활동이었다. 당장 먹을 수 있는 것을 잡거나 줍지 못하면 원시인은 굶주려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잡거나 줍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연은 토끼나 멧돼지를 험난한 수풀 속에 숨겨두었으며, 과일이나 채소는 한 계절만 주울 수 있었다. 당장 먹을 수 있는 완성품을 잡거나 줍기 위하여 유랑하던 시기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자연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연의 리듬과 변덕에 따르지 않는 인간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농경목축 노동을 시작함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자연이 미완성품으로 주는 것을 완성품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짐승의 새끼를 길러내어 큰 짐승으로 만드는 기술을 터득함으로써 인간은 험난한 수풀을 뒤지면서 돌아다니는 고생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씨앗을 길러내어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잘 익은 과일과 채소를 만드는 기술을 습득함으로써 인간은 계절의 변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농업혁명의 인류사적 의미는 인간이 자연을 가공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농업혁명은 동물과 비슷하던 존재를 그것과 전혀 다른 존재로 바꾸는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 이제 인간은 자연이 주는 완성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자연을 가공하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만큼 인간은 자연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연을 가공하자면 힘이 들어가야 했다. 농경시대 내내 인간이 자연을 가공하는 데 들인 힘은 주로 육체의 자연력이었다. 근육의 힘이다. 약간의 손도구를 사용했지만, 주된 동력은 인간의 근력이었다. 육체의 힘으로 밭을 갈고 가축을 기르는 일은 매우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미약한 근력을 넘어서기 위하여 인간은 다른 자연력을 이용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가축의 힘, 바람의 힘, 물과 불의 힘을 이용하여 자연을 가공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력을 이용하기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소와 말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바람은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향으로 불지 않았다. 이런 자연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인간은 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킨다.
농업혁명을 일으킨 뒤 1만 년쯤 지나서 인류는 기계를 노동에 투입하면서 공업혁명을 일으켰다. 지금으로부터 3백 년쯤 전의 일이다. 공업혁명의 인류사적 의미는 인간이 자연력 대신 인공동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기계는 자연력과 전혀 다른, 새로운 힘을 제공해주었다. 우선 기계는 인간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스위치를 켜면 작동을 시작하고, 스위치를 끄면 작동을 멈추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공동력은 거의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었다. 기계는 하루 만에 깊은 땅속에서 산더미만큼 많은 석탄을 캐낼 수도 있었고, 수십 량의 화물차를 달고 쏜살처럼 달릴 수도 있었다. 새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었고, 캄캄한 밤을 환한 대낮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소나 말을 부려도 불가능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생산에 기계를 투입하면서부터 인간은 자연을 대규모로 가공하기 시작한다.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기도 했고, 평지에 산을 세우기도 했다. 기계의 힘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막강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공업혁명은 인류가 1만 년 동안 지속해온 농촌의 삶을 마감하고 도시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든다. 이제 대다수 인간은 자연 속에 파묻힌 채 농경목축 노동을 수행하는 대신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공장 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기계가 점점 더 발달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자연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또는 자연을 지배한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농업혁명이 만들어낸 전환이 더 거대했을까, 아니면 공업혁명이 만들어낸 것이 더 거대했을까? 보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여기서 또 하나의 거대한 전환을 살펴볼 것이다.
또 하나의 대전환
농업은 인류가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활동이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서 농부는 자신의 에너지를 자연에 쏟아붓고, 곡식을 추수하여 밥을 먹으면서 자연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이런 에너지 순환과정을 되풀이함으로써 인간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손수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농부를 거쳐서 자연과 물질대사를 한다.
공업도 마찬가지이다. 자동차를 만드는 일도 휘발유를 만드는 일도 인류가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활동이다. 한 편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에너지를 자연에 쏟아부어서 철광석과 석유를 캐내고, 다른 한편에서 나는 자동차와 휘발유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자연의 먼 거리를 빨리 이동한다. 나는 실은 자동차와 휘발유를 만드는 사람을 거쳐서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연과 끊임없이 물질대사를 수행함으로써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만약 자연과의 물질대사가 끊어진다면? 그러면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인류도 멸종한다.
여기서 ‘거치다’는 말을 되새겨보자. 나는 농부를 ‘거쳐서’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하고, 자동차 만드는 사람과 휘발유 만드는 사람을 ‘거쳐서’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한다. 홀로 손수 농사도 짓고, 자동차도 만들고, 휘발유도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수많은 다른 사람을 ‘거쳐서’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핵심도 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수많은 다른 인간을 ‘거쳐서’ 비로소 인간으로 살아간다.
인간이 저마다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다른 인간들을 ‘거치는’ 과정은 농업에 속하지도 않고, 공업에 속하지도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내가 너를 거치고, 네가 나를 거치는 과정은 처음에 물물교환이라는 활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곧 물물교환의 한계가 드러나게 된다. 좀 더 효율적인 교환방식이 개발되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상업’이라는 활동분야가 생겨나서 발전하게 된다.
상업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활동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 활동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업을 통하여 진행되는 인간들 사이의 물질대사를 거쳐서 비로소 저마다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오늘날 우리는 상업이 연결해주는 협동의 끈을 ‘거쳐서’ 자연과 물질대사를 수행하고 있다.
코로나19와 마찬가지로 공업혁명도 도둑처럼 불쑥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딘가에 묻혀 있던 씨앗들이 기후가 변하고 토양이 변하면서 싹이 텄을 테고, 처음에는 조금씩 퍼져나가다가, 마침내 온 세상을 뒤덮게 되었을 것이다. 어디에 묻혀 있던 씨앗들이었을까? 기후와 토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길래 공업혁명의 씨앗들이 싹을 틔울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자면 공업혁명의 선행단계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기를 맑스는 ‘자본의 원시축적 시대’라고 불렀다. 폴라니는 ‘상업혁명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와 달리 대다수 연구자들은 그 시기에 대해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꺼리고 있다. 아무튼 이 시기는 뒤에 맑스가 “최고의 관심거리”라고 강조한 것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과정에 해당된다.
“분업과 교환에 대한 고찰은 최고의 관심거리이다. 왜냐하면 분업과 교환은 인간의 활동과 본성역량이 실은 인류의 활동과 본성역량이라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산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의 교환과 [생산과정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생산물들의 교환은 인류의 활동이며 인류의 향유이다.”(맑스, <경제학-철학 수고>)
여기서 나는 폴라니처럼 ‘상업혁명’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노동과 삶에 가져온 변화는 농업혁명과 공업혁명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대전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상업혁명을 통하여 인류의 노동분업은 비로소 전세계로 확장되며, 노동관계는 비로소 자본주의 양식으로 전환된다.
상업혁명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고는 자본주의 노동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장차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맑스와 프루동 사이의 논쟁을 제대로 평가하기도 힘들 것이다. 나는 상업혁명의 인류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은 데서 찾아볼 것이다.
첫째, 상업혁명은 인간의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전환시켰다. 자연경제(=현물경제)를 상품경제(=시장경제)로 전환시킨 것이다. 상업혁명은 심지어 자연의 산과 들, 인간의 노동력까지 상품으로 전환시켰다.
둘째, 상업혁명은 ‘사용을 위한 생산’을 ‘판매를 위한 생산’으로 전환시켰다. 이때부터 농부는 자신이 먹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 농사를 짓게 된다. 이제 아무리 사용가치가 높은 것이라도 교환가치가 없는 것은 무용지물 쓰레기로 된다.
셋째, 상업혁명이 선행하지 않았더라면 공업혁명도 뒤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상업혁명이 개척한 드넓은 시장이 없었더라면 대량생산도 없었을 것이고, 기계의 발명도 없었을 것이다.
넷째, 자유주의 사상은 상업혁명 시대의 자식이다. 상업혁명의 선봉장들이 농업사회의 옛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개발한 것이며, 그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공업혁명 시대의 과제는 성공적으로 수행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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