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대전환
이제 프루동과 맑스 사이의 충돌을 살펴볼 차례이다. 루소의 두 상속자가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고 진흙탕 속에서 뒹군 이야기다. 아마 노동해방운동의 역사에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논쟁을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충돌하게 된 이유 중 절반은 그들이 살았던 개인적 인생과 시대적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프루동은 프랑스 노동자 출신이었고, 맑스는 독일 지식인 출신이었다. 그들은 루소가 물려준 동일한 별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항로는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무정부주의를 주창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국가공산주의를 주창하였다.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그들의 시대를 넘어서서 모든 시대 모든 곳의 노동해방운동이 보편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무정부주의와 국가공산주의를 한 솥에 넣어서 푹 고아내는 일이다. 과연 무엇이 나올까? 내가 볼 때, 19세기부터 지금까지 노동해방운동이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한 문제는 실은 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프루동과 맑스의 충돌을 살펴보려는 이유도 실은 나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의 싸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작정이다. 하나는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대전환’의 시원에서 대답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코로나 대환란’의 이유를 지구온난화에서 찾고 있는 자연과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과 닮았다. 병의 뿌리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대로 치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다른 하나의 방법을 동시에 적용할 것이다. 조직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이 상상해낸 화성 방문객이 가지고 온 ‘사회구조 망원경’을 빌려 쓰는 것이다.
코로나 대환란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6장 15절)
그러나 그것은 도둑 같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었다. 1712년, 뉴커먼은 영국 중부지역의 한 석탄 광산에 기계 한 대를 설치하였다.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증기엔진 펌프였다. 그것이 산업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뉴커먼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하물며 그 기계가 뿜어내는 연기가 3백 년쯤 지난 뒤에 수십억 지구인들을 한꺼번에 대환란에 빠뜨리게 될 줄 어느 누가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아무도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뉴커먼의 뒤를 이어서 기계를 생산에 투입하는 사람 수가 한 몇 두 명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계가 점점 더 늘어날수록 그것들을 가동하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석탄을 태워야 했다. 나중에는 석유와 가스도 태웠다. 기계가 뿜어내는 연기는 대기 속으로 흩어졌고, 곧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연기 속에 담긴 이산화탄소는 대기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갔고,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 영국의 비영리 기후연구단체 ‘카본브리프’가 발표한 자료를 따르자면, 인류가 뉴커먼 이래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850년부터 지금까지 170년 동안) 대기 속으로 배출한 탄소는 2조5천억 톤쯤 된다고 한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짙어지면서 대기의 온도도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지금은 널리 알려진 ‘온실가스 효과’ 때문이었다. 기후가 변하면서 식생도 변했다. 1백 년 전 중국 남부 윈난성 일대의 기후는 열대 관목림이 자라기 좋은 기후였다. 그러나 1백 년이 지나는 동안 지구는 조금씩 조금씩 계속 더워졌고, 윈난성 지역의 기후는 열대 낙엽수림이 자라기 좋은 기후로 바뀌었다. 박쥐들이 서식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으로 된 것이다.
본래 박쥐는 사람의 발길이 매우 드문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서 주로 서식했는데, 기후변화에 맞추어 중심 서식지를 중국 남부 일대로 옮겼다. 지난 1백 년 동안 새로 40여 종의 박쥐가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박쥐가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인구 밀집 지역이다. 박쥐와 인간 사이의 접촉이 빈번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박쥐는 코로나 박테리아의 대표적인 숙주이다. 박쥐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수많은 종류의 코로나 박테리아 중 대다수는 사람에게 전염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12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첫 번째 인간이 윈난성에서 발견되었고, 대환란이 시작되었다.
화성에서 온 방문객
시장과 계약의 중심적인 역할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화성에서 온 방문객을 상상해보자. 신제도주의 경제학은 이 방문객을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만들 것이다. 방문객은 사회구조를 드러내 보여주는 망원경을 들고 우주에서 지구로 접근하고 있다. 기업들은 짙은 녹색 면의 원으로 나타난다. 원의 내부에는 부서들을 분리하는 옅은 윤곽이 보인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는 기업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붉은 선으로 나타나며, 기업들 사이의 공간에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그 방문객은 기업들 안에 (그리고 아마 기업들 사이에도) 희미한 푸른 선들이 있다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다양한 직급의 노동자들을 상급자들과 연결하고 있는 권위의 선이다. 우리의 방문객이 미국 쪽으로 접근하든 소련 쪽으로 접근하든, 아니면 중국의 도시지역 쪽으로 접근하든 유럽연합 쪽으로 접근하든, 눈 아래 펼쳐진 광경의 대부분은 녹색 면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다수 주민들이 임금노동자들이어서, 기업의 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풍경을 구성하고 있는 지배적인 형상은 조직들일 것이다. 그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는 아마 이런 보고 메시지를 고향으로 보낼 것이다. “넓은 녹색 면들이 붉은 선들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런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붉은 선들의 그물망이 녹색 점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물론 만약 우주선이 중앙아프리카, 또는 중국이나 인도의 농촌지역 상공을 맴돌고 있다면 녹색 면들의 크기는 훨씬 더 작을 것이며, 그곳의 넓은 공간은 작은 검은 점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 점들은 저마다 가족과 마을을 나타낸다. 그러나 지난번과 달리 그곳의 붉은 선들은 더 희미하고 성길 것이다. 왜냐하면 검은 점들은 자급자족하면서 폐쇄되어 있어서, 시장에 나가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허버트 사이먼, <조직과 시장>, 1991)
화성 방문객 이야기는 사이먼이 신제도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기 위하여 고안해낸 공상과학 우화이다. 신제도주의 경제학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충분히 비판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먼의 비판은 실은 아담 스미스 이래로 경제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학을 일차적인 과녁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가 검은 점들과 붉은 선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들이 상정하는 검은 점은 가족도 마을도 아닌 개인이다.
사이먼이 상상한 화성 방문객이 지구를 방문한 때는 1991년이었다. 그가 만약 대전환의 시대에 지구를 방문했더라면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남겨두지 않은 채 방문객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사회구조 망원경은 남겨두고 떠났다. 그것을 들고 대전환 시대로 탐사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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