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교과위원
4) 신자유주의
동방 진영이 몰락하면서 체제경쟁이 끝나자 서방 자본주의 세력은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더 이상 덮어쓰고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 사민주의 탈을 벗어 던져도 가로막고 나설 세력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지배집단은 반세기 넘게 감춰둬야 했던 자신의 옛 얼굴을 다시 불러냈다. ‘자유주의’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 살아난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계의 정치경제 질서를 확고하게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불과 20년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이 뽐낸 온갖 화려함은 실은 저물어가는 자본주의가 토해낸 찬란한 저녁노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경제 지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미래를 예측하고 기획하는 사람은 필경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경제 지형을 선명하게 확인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 시대의 그것과 비교해보자. 먼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지형을 조형했던 여러 구성요소 중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1) 국제정치 요소 : 동-서 체제대결이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그에 따라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이라는 매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내부변화를 견인하는 외부구심력’이라는 기능도 상실하였다.
2) 국내정치 요소 : 경제가 세계화될수록 사민주의 황금기에 정립된 정부의 경제개입 강도가 줄어들게 된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시장규제를 철폐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켰다.
3) 생산기술 요소 :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이 새로운 신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았으며, 산업구조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4) 자연생태계 요소 : 생태계 파괴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에 맞서는 생태운동이 시작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 미미하였다.
이런 지형 위에서 신자유주의 경제는 사민주의 황금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운동해나갔다. 세계화, 금융화, 정보화, 사영화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지구의 동-서를 가로막고 있던 이른바 ‘철의 장막’도 무너지고, 세계 단일시장이 펼쳐졌다. 그때까지 자본의 침투가 막혀 있던 지역들이 속속 시장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는 세계 단일시장에 맞춘 교역질서를 확립하였고, 교역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사민주의 황금기에는 산업자본이 경제를 지배했었다.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은 늘 더 큰 자유를 원해왔지만, 체제경쟁이 곳곳에 장벽을 세워두고 있던 시절에는 마음껏 욕심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하여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금융자본이 경제를 지배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그동안 금융자본의 운동을 제한하고 있던 모든 지리적, 제도적 국경선을 지워나갔다.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금융자본은 빛의 속도로 운동할 수 있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터져나올 때까지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은 세계시장을 마음껏 날아다닌다.
한편, 세계 각국의 국내에서는 이른바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사영화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국공립 기업들이 속속 대자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동-서 체제경쟁과 사민주의 황금시대 동안 시장의 영토에서 정부의 영토로 넘어간 것들이었다. 사민주의 가면을 벗어던진 자본이 잃어버린 옛 영토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두 영토 사이의 경계선이 새로 그어지게 된다. 그것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노동조합 약화, 사회보장제도 축소 등등의 고통을 동반하는 과정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금융화를 부채질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꼽아야 할 것이다. 경제의 세계화가 그토록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디지털 정보기술 덕택이었다. 만약 이 기술이 없었더라면 세계시장이 명실상부한 단일시장으로 발전하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던 20년 동안 세계경제는 날로 번창하였고, 신자유주의는 그것이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내세웠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도 계속 절대진리로 추앙받을 수 있었다.
5) 정체불명 자본주의
그러나 역사에 종말은 없었다. 2008년 월스트리트에서 점화된 세계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세계경제 질서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이어서 2019년에는 중국 우한에서 퍼지기 시작했다는 코로나 팬데믹이 삽시간에 전세계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무덤에 누워 있어야 마땅할 역사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연달아 터져나오는 위기에 대응하면서 선진 신자유주의 정부들은 물불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하여 우선 위기를 촉발한 금융자본에 재갈을 물렸고, 중앙은행을 시켜서 돈을 무더기로 찍어서 뿌렸다. 문제를 일으킨 민간기업들을 국유화하기도 했으며, 군대를 동원하여 국토의 여러 곳을 봉쇄하기도 했다. 미국을 선두로 하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국경선에 다시 철조망을 높이 세웠다. ‘아메리칸 퍼스트’를 내세우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영국은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였다. 이동을 제한당한 금융자본은 부동산 자본과 결탁하여 지대를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정부와 자본의 이런 조처들은 신자유주의가 스스로 자신의 이름 위에 붉은 금을 긋는 행위였으며, 자유주의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행위였다.
2024년 오늘날, 더 이상 ‘역사의 종말’을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건너오기는 했지만, 지금 서 있는 곳의 좌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섣불리 이름을 붙이고 나섰다가는 후쿠야마처럼 손가락질을 자초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위험이 없는 이름을 찾다 보니 여러 가지 ‘이름 아닌 이름’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포스트 자본주의’, ‘포스트 성장 시대’, ‘포스트 휴먼 시대’ 등등, 온갖 ‘포스트’가 유행하고 있다.
‘포스트’라는 부정접두사를 사용하지 않고 오늘날의 역사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떤 이름이 가장 어울릴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날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정치경제 지형을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해서, 과거와 미래의 연속선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곳의 좌표를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1) 국제정치 요소 : 체제대결이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지만, 그것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미-소 냉전 대신 등장한 미-중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으며, 무역전쟁의 수준을 넘어서서 장차 군사적 냉전 또는 열전으로 발전해나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2) 국내정치 요소 : 신자유주의 기간 동안 진행된 각종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완전고용’ 공식은 깨져버렸고, 그에 따라 노동자‧대중의 실질소득도 줄어들면서 ‘대량소비-대량생산’ 공식도 깨져버렸다. 거기에 덧붙여서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대중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세계금융위기와 코로나 펜데믹 위기를 땜질했다. 각국 정부가 무더기로 찍어낸 돈은 물가상승으로 이어져서 노동자‧대중의 호주머니를 쪼그라들게 했고, 물가상승에 이어진 금리인상은 노동자‧대중의 호주머니를 다시 한번 털어갔다.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에 비례하여 노동자‧민중의 불만은 가열되고 있지만,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은 별로 없다. 신자유주의 황금기 내내 공격당하여 허약해진 사민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은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허둥대고 있을 뿐, 노동자·민중에게 대안과 전망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혼란과 공백 속에서 이른바 ‘포퓰리즘’ 세력이 등장하여 노동자‧대중의 불만과 저항을 퍼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한국에서는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3) 생산기술 요인 : 디지털 기술을 선점하고 독점한 플랫폼 자본이 출현하여 산업구조와 경제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노동과정과 노동관계도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공장은 사라지고 플랫폼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에 상응하여 일자리가 일거리로 쪼개지면서 사라지고 있다. 이제 ‘플랫폼 노동’, ‘긱 노동’, ‘크라우드 노동’이 유행어 수준을 넘어서서 상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디지털 기술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어면서 ‘인공지능’(AI)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더니,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챗지티피’(ChatGTP)가 등장했고, 다시 앞으로 10년 안에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인공범용지능’(AGI) 또는 ‘인공초지능’(ASI)이 출현할 것이라고 한다.
4) 자연생태계 요인 : 생태위기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악화되어 티핑 포인트에 근접하고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는 10~20년 안에 1.5℃ 경계를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에 맞서는 생태운동이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대세를 뒤집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노동운동은 생태운동을 여전히 의심스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오늘날의 정치경제 지형을 30년 전의 그것, 베를린 장벽 붕괴 (또는 87년 노동자대투쟁) 때의 정치경제 지형과 비교해보면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구별해보자.
두 차례의 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꽤 흔들렸지만, 그러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자본의 세계화, 금융화 대세는 한풀 꺾였지만, 완전히 중단되거나 역진하지는 않고 있다. 위기 봉합을 위하여 정부가 일부 사영기업을 잠시 국유화하기도 했지만, 새 발의 피 정도였다. 그러므로 “30년 전과 비교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잠시 흔들린 것을 두고 마치 요절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복원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실수가 될 것이다. 아마 위기가 봉합되고 나면 세계화, 금융화, 사영화는 다시 활개를 치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가려고 할 것이다. 생산기술의 발전이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한편, 30년 이상 이어진 신자유주의 공세를 통하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포드주의 대량생산-완전고용-대량소비 체제가 눈에 띌 정도로 붕괴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민주의 황금기에 확립된 정부의 경제개입 및 사회보장제도의 뼈대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국영기업의 사영화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여기서도 30년 전과 비교해볼 때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에 반하여, 30년 전과 비교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다. 생산기술이다. 아날로그 기술에 디지털 기술이 추가되면서, 몸뚱어리만 있던 기계에 머리가 얹힌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산업기술과 금융기술을 젖히고 지배적인 생산기술로 발전하였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근본적인 변화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30년 전과 비교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자연생태계이다. 30년 전까지 생태위기는 인간의 노동과 삶의 주요 변수로 등장한 적이 없었다. 생태위기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잉태되었고,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조금씩 커져왔지만, 지금까지 사람들의 노동과 삶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적은 없었다. 그에 따라 사민주의 황금기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생태위기는 ‘부차적인 문제’ 또는 ‘환경오염 문제’ 정도로 취급당했다.
그러나 지구생태계는 20세기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자원의 고갈’과 ‘성장의 한계’를 걱정하는 선각자들이 나타날 정도로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생태위기는 ‘환경오염 문제’를 넘어서서 ‘인류의 존망을 우려할 정도의 생태계 문제’로 드러나게 되고, 그에 상응하여 생태운동이 새로운 세력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그에 따라 정치경제 지형에 새로운 전선(戰線)이 형성되었다. 자본주의와 생태주의 사이에 거대한 전장(戰場)이 생겨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이것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는 근본적인 변화이다.
이처럼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해봄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정체불명 시대의 정체를 한 꺼풀 벗겨낸 셈이다. 이제 그 정체를 좀 더 분명하게 확인하기 위하여 전에 없던 두 가지 새로운 것을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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