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 대응하는 활동을 하는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활동가의 글을 싣습니다. 필자께서 활동가 한 명의 이름보다는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전체 이름으로 게재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주시어 필자의 이름은 따로 기재하지 않습니다. [편집자주] |
우리는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텔레그램 성착취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시점은 올해 초다.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텔레그램 성착취에 대한 내용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텔레그램 성착취라는 공식적인 느낌의 명칭은 몰라도, 최소한 n번방이라는 악명만큼은 접해본 적 있지 않을까?
텔레그램 성착취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은 n번방. 2019년 2월 개설된 이 방은 갓갓이라 불리는 문형욱(26세)가 개설했다. 1,2,3…으로 이어지는 여러 개의 방과 운영진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꽤 본격적으로 성착취 플랫폼을 구성했다.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 동영상을 찍게 한 후, 이를 다시 텔레그램으로 유포 및 판매하면서 이익을 얻는 방식이었다. 이후 와치맨이라 알려진 38세 회사원 전모씨가 2기 운영자로 n번방을 물려받는다.
가해자들은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취약계층 여성들을 타겟으로 삼았다. 돈이 필요해서 급하게 일거리를 찾는 여성, ‘일탈계’를 운영하는 등 이미 성적인 모습이 드러나 주변에 사실이 알려질 경우 비난받을 게 분명해 보이는 여성들에게 접근해 신상정보를 알아낸 후 ‘시키는대로 하라’고 협박하는 식이었다. 페미위키에 이들의 수법이 자세하게 개제되어있다.
처음에는 간단한 것을 요구하나 점점 무리한 요구를 한다. 가학적인 성관계, 변태적 행위, 고문 등을 요구하고 이를 영상으로 받아 챙긴다. 이러한 영상을 가족과 지인에게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며 지속적으로 영상을 받아 챙기고, 계속해서 요구한다. 이때 요구에 응하지 못하면 영상을 유포한다.
n번방에서 확립된 협박-착취-판매라는 수익모델은 제2, 제3의 n번방 개설로 이어졌다. 켈리(신모, 36세), 로리대장태범(배모, 20세)과 같은 가해자들은 ‘어차피 잡히지 않는다’, ‘잡혀도 빠져나갈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대담하게 다른 성착취 방들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특히 로리대장태범은 중학생 성착취 영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4개월 동안 76편의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을 제작했다.
사건 내용이 처음 공개됐을 때, 대중은 그 잔혹함에 경악했다. 가해자들이 제작한 영상은 스너프 필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해당 영상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였다. 심지어 대부분의 피해자는 10대 여성이었다. 텔레그램 성착취방 60여개 이용자를 중복합산하니 26만명이 집계된다는 보도 또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문당하는 인간이 컨텐츠가 되었다는 것, 우리 주변에 평범한 얼굴로 돌아다녔을 수많은 타인들이 돈을 내고 그 상황을 구경했다는 사실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고통스러운 분노로 다가왔다.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은 말그대로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분노가 분노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모였다. 코로나19로 인해 대규모 시위를 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해보기로 했다. 법원, 국회, 투표소 등 주요 거점에서 항의를 표하는 직접행동이 그 시작이었다. 각 거점마다 주최자가 없이 자발적, 우발적으로 개최되는 1인 피켓 시위가 지속되었다.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접한 후 너무나 화가 났지만 뛰쳐나올 시위장이 없어서 답답해하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피켓을 들러 나왔다.
우리의 요구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 가능했다. 첫번째,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고 피해자가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자. 둘째, 이런 성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자.
초반 활동은 입법에 집중되었다. 3월 23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실에서 오후 2시에 개최된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처벌 강화 긴급 간담회 날,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은 국회 앞에서 입법자들의 망언이 적힌 피켓을 들고 부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간담회가 열리기 전 성적 합성 및 유포 처벌법 등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자기만족 때문에 혼자 즐기는 것도 처벌할 것이냐”, “나혼자 그림을 그린다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 없다”는 문제적인 발언이 있었고, 법무부 차관이라는 자가 “(청소년들이) 유명인들 갖다 놓고 혼자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작업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처벌하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과한 것 아니냐.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 그런 짓 자주한다.”라고 발언하며 남성 입법자들의 후진적 성인식을 여실히 드러낸 바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염원이 모여 3월 24일, 성적합성 및 유포를 처벌하는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2, 허위영상물 등의 반포 등의 조항이 신설되었다. 뒤이어 4월 30일, 피해촬영물 소지죄가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제 불법 성적 촬영물을 소지·구입·저장 또는 시청한 사람을 3년 이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게 되었다. 미성년자 피해지원에서 중요했던 아청법상 대상청소년 조항도 삭제되었다.
다음 주력 거점은 법원이 되었다. 양형위원회가 열렸던 4월 20일,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은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의 원인은 입법부 뿐만 아니라 사법부를 비롯한 사회 곳곳의 법리를 다루는 책임자들에게 있다”며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로리대장 태범의 재판이 진행되기 전인 5월 1일에는 서울중앙지법과 대법원 사이에서 정의로운 법집행을 요구하는 행진과 기자회견이 있었다. 국회 앞 행동도 새로운 익명의 시민들이 모이며 계속 이어졌다. 6월 5일 21대 국회 개원일,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이번 국회의 과제는 n번방 문제 해결임을 알리는 공동 행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은 n번방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보다 집중하며 성착취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사법부 규탄 집회를 연속 기획하고 있다. 7월 8일, n번방 전에 있었던 세계최악의 아동성착취 사건의 가해자 손정우가 풀려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있었고, 150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7월 12일 빗속에서 1000명의 시민이 모여 형사사법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사법부를 재차 규탄했다. 다가오는 8월 16일에는 시민의 힘으로 정의로운 법을 집행하는 시민법정이 열린다. 사법부는 ‘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는 시민들의 일관된 외침에 책임감있게 응답해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며, n번방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또다른 책임자,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들은 사건이 알려진 후 지속적으로 2차 피해에 노출되었다. 그러게 왜 일탈계를 했느냐, 왜 돈을 쉽게 벌려고 했느냐는 소리가 도처에서 나왔다. 일탈계를 했든 성매매를 했든, 착취와 폭력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이 간단한 진리가 합의되지 않아서, 여전히 성적인 모습이 드러난 여성을 비난하는 사회적 압박이 강력했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힘을 얻었다. ‘우리’는 피해자를 비난함으로써 가해자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자발적인지, 어디까지가 비자발적인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구조의 피해자든 노동의 주체든, 우리는 구분할 수 없다. 어떤 여성이 일탈계를 하는 것, 인터넷에서 모르는 남자의 요구에 응해서라도 급하게 돈을 벌고자 했던 것, 그 이면에 있는 한 인간의 삶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성폭력의 원인은 가해자의 존재다. 어떤 이유도 ‘그러니까 n번방 같은 일을 당할만 하다’는 말 앞에 올 수 없다. 단 한명의 피해자도 n번방 안에 두고 갈 수 없다. 가해자가 제일 나쁜 놈이지만 피해자도 조금 잘못 하긴 했다는 시선을 거둬야 한다. 바로 그 시선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할 수 있게 만드는 기반이 되는 시선이다. 피해경험자 분들이 스스로를 긍정하고 세상의 수많은 n번방에서 탈출하기 어렵게 만드는 시선이다.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피해 경험자의 회복을 돕고 피해경험자가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이 ‘사람들’ 중 한명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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