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교육원 원장님의 「4차 산업혁명과 고용의 미래」 4회차 중 3번째입니다. 많은 내용을 적은 회차에 나누어 연재하게 되어 글이 상당히 깁니다. 여유로운 시간에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4차 산업혁명과 고용의 미래
- 프레이 대 서스킨드 논쟁 -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4. 경제학적 근거
4-1. 낙관론의 공학적 근거 : 자동화 한계선
4-1-1. 47퍼센트 대 53퍼센트
앞서 언급했듯이, 프레이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47퍼센트”였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현재의 직업들 중 47퍼센트가 앞으로 10~20년 안에 자동화될 위험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프레이는 21세기 오늘날에도 자본주의 경제와 노동자대중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일차적인 추동력은 기술에 있다고 본다. 이번에는 인공지능 기술이다. 그는 고용문제에 있어서 컴퓨터 기술과 인공지능 기술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컴퓨터 기술은 ‘틀에 박힌 업무’를 자동화시킴으로써 고용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심화된 고용 양극화와 사회 양극화의 뿌리도 틀에 박힌 업무의 자동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인공지능 기술은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까지 자동화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 자동화시켜나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고용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변화들의 뿌리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이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은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인간의 노동을 자동화시킬 수 있을까? 자동화의 한계는 어디일까?
이 질문은 고용의 미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레이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자동화의 차세대 물결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시대에 컴퓨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히 고찰해야 한다.” 바로 이런 면모가 프레이를 돋보이게 만든다. 그는 ‘사이비 진보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기술 발전 자체를 외면해버리는 수많은 기술결정론 비판자들과 달리 인공지능 기술의 위력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프레이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에 한계선을 긋고 싶어 한다. 인공지능 기술이 고용에 미치는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뜻이다.
인공지능을 통한 경제의 생산성 향상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20세기 초에 우리가 자동차와 전기를 통하여 경험했던 것보다 더 클지 아닐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의 생산성이, 일종의 과대광고처럼, 조금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달리 20세기 초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읽어보면, 가정의 완전한 전환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전기와 수도가 가정과 사무실과 공장을 전환시켰습니다. 자동차가 나와서 처음으로 우리는 주변을 널리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운 곳으로 가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항공 산업이 발전하여 우리는 전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통수단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만큼 큰 전환이 될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환은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강연 43~44쪽)
인공지능 기술의 한계선에 대한 프레이의 견해를 듣고 난 뒤에 <고용의 미래>를 다시 읽어볼 때 비로소 우리는 ‘47퍼센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2013년에 <고용의 미래 : 직업의 자동화 가능성>이 발표된 뒤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47%에 대해서만 많은 관심을 쏟아왔지만, 나머지 53%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47%가 자동화될 수 있다는 것은 실은 나머지 53%는 자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몫을 다시 나눈다면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커다는 뜻입니다.
<고용의 미래>에서 프레이가 강조하고 싶어 했던 것은 “직업들 중 47퍼센트가 자동화될 위험성이 높다”는 점이 아니라 실은 “나머지 53퍼센트는 자동화되기 어렵다”는 점이었던 셈이다. 고용의 미래에 대한 그의 낙관적 예측은, 근거를 파고들어가 보면, 자동화 한계선에 대한 그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13년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고용의 미래>는 실은 단 하나의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 개념이다. ‘병목 업무’, ‘자동화의 한계’, ‘인간의 비교 우위’ 등등은 이 개념의 동의어들이다.
인공지능 연구자 마이클 오스본(Michael A. Osborn)과 함께 작업한 <고용의 미래>에서 프레이는 먼저 여러 가지 직업의 자동화 난이도를 측정하기 위한 잣대를 만든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동화 한계선’이 필요했다.
인공지능 시대에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이 어떤 영역에서 여전히 비교 우위를 가지는지 밝혀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현재의 일자리가 최근 인공지능의 발전에 의하여 위협받는 것을 측정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자동화를 가로막는 단기적인 공학적 장애물을 알아내기로 했다. 최근까지 컴퓨터는 틀에 박힌 업무에서 비교 우위가 있었던 반면에, 인간은 그 밖의 모든 업무에서 더 우세했다.(409~413)
프레이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는 다음 세 가지이다.
1) 창의성과 직관 능력
2) 사회적, 대면적 소통 능력
3) 불규칙적 과제를 유연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정교한 육체작업 능력
프레이는 인공지능이 이런 공학적 장애를 넘어서기 어렵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서, 이런 능력이 요구되는 업무들이 인공지능에게는 ‘병목 업무’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서, 이런 세 가지 능력 중 하나라도 요구되는 업무에 있어서는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비교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업무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일자리에서 밀어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고용의 미래>가 내놓은 ‘47퍼센트’ 또는 ‘53퍼센트’라는 수치도 바로 이 잣대를 사용하여 계산되었다.
프레이가 제시한 ‘세 가지 공학적 장애’라는 잣대는 인공지능 연구개발의 초기 역사에서 등장한 몇 가지 미해결 문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온 것이다. 인공지능의 첫 번째 공학적 장애를 입증하기 위하여 프레이는 ‘폴라니의 역설’을 논거로 제시한다. “인간은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역설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을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한다. 직관, 창의성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프로그래밍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은 인간과 달리 암묵지를 가질 수 없다.
폴라니의 통찰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이 직관적으로 수행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서술할 규칙을 명확히 밝히기는 힘들어서 자동화하기 어려운 업무가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사고, 문제 해결 능력, 판단력, 상식을 요구하는 활동에 대해 우리는 암묵적으로만 그런 기능을 이해할 뿐이다.(308)
인공지능의 두 번째 공학적 장애를 입증하기 위하여 프레이는 ‘튜링 테스트’를 논거로 삼는다. 인공지능이 사회적 의사소통 능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테스트이다.
마이클과 나는 컴퓨터의 실적이 아직 저조한 업무와 최근 기술적 도약이 제한적이었던 분야를 살펴보는 데서 출발하였다. 가령 기계사회지능(machine social intelligence)의 현황을 일별하기 위해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의사소통 능력을 포착하는 튜링(Turing) 테스트를 생각해보자. 어느 시점에 가면 알고리즘이 기본적인 문자 언어로 인간의 사회적 지능을 효과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업무는 실은 인간관계와 복잡한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업무는 하나같이 컴퓨터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다.
프레이가 인공지능의 세 번째 공학적 장애를 입증하는 논거는 ‘모라벡의 역설’이다.
‘모라벡의 역설’이란 컴퓨터는 인간한테는 쉬운 일을 하기가 어려운데 반해, 인간이 극도로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은 쉽게 할 수 있다는 역설이다. 어려서부터 인간은 걷고, 사물을 식별하고 조작하며,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네 살짜리면 누구나 습득하는 이런 기본 능력을 컴퓨터에게 부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공학적 문제 중 하나로 밝혀졌다.(310~311)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갈 점이 있다. 프레이가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를 입증하는 데 사용한 세 가지 논거에는 특정 관점이 담겨 있다. “인공지능이란 인간을 빼닮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인공지능에게 창의성과 직관능력, 사회적 소통능력, 정교한 육체적 작업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의 산물이다.
아무튼, 2013년 발표된 <고용의 미래>는 고용문제 연구의 새로운 한 시대를 열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거기서 프레이가 제시한 ‘인공지능의 세 가지 공학적 장애’및 ‘인간의 비교우위’라는 잣대는 그때부터 고용의 미래를 예측고자 하는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일종의 공준(公準)처럼 작동하게 된다.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수많은 고용 예측 보고서들이 제출되었고, 그 중에는 프레이의 견해를 부분적으로 반박하는 것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공학적 장애’와 ‘비교우위’라는 공준을 의심하는 것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때부터 미래의 직업에 관한 자기계발서들도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들 중에서도 ‘공학적 장애’와 ‘비교우위’에 대한 얘기를 담지 않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내기 어려웠다.
4-1-2. 낙관론자의 공학적 근거에 대한 의문
프레이가 제시한 잣대는 고용의 미래를 예측하기에 적절한 잣대일까?
<테크놀로지의 덫>에서 프레이는 고든이 인공지능 기술을 오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고든이 인간중심주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고든 같은 인공지능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지적한다. “자동차가 내 집 앞에 온다고 해도, 어떻게 그 짐을 아마존 차량에서 내 현관 앞까지 가져다줄 것인가? 내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누가 그것을 운반해주겠는가?” 인공지능 회의론자들이 흔히 범하고 있는 오해는 업무를 자동화하려면 기계가 대체하고자 하는 노동자의 노동 절차를 정확하게 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무를 베어 넘기고, 물과 나무와 석탄을 집 밖에서 난로까지 운반하고, 손세탁에 수반되는 동작을 수행할 수 있는 다목적 로봇을 발명함으로써 세탁부의 일을 자동화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로등 기둥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로봇을 발명함으로써 가스등 점등원의 일을 자동화했던 것이 아니다. 엔지니어들은 참신한 업무 재설계를 통해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원칙을 깨고 있다. 현재 아마존은 배송용 드론을 활용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어떻게 그 짐을 아마존 차량에서 내 현관 앞까지 나를 것인가?”라는 고든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면,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짐이 차량으로 도착하지 않을 듯하다. 이미 아마존은 2018년 3월, 인간의 몸짓에 반응하는 택배용 드론의 특허를 받았다.(402-403)
프레이는 남을 비판할 때는 즐겨 사용하는 비판의 무기를 자기 자신에게 겨누는 일은 깜빡깜빡 잊어버린다. 자기 성찰에 게으르다는 뜻이다. 그가 고든을 비판할 때 사용한 논거를 보자.
인공지능 회의론자들이 흔히 범하고 있는 오해는 업무를 자동화하려면 기계가 대체하고자 하는 노동자의 노동 절차를 정확하게 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바로 이 비판을 프레이는 <고용의 미래>에서 측정의 잣대를 만들 때에도 적용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랬더라면 아마 이렇게 판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인공지능의 세 가지 공학적 장애’라는 잣대가 범하고 있는 오해는 업무를 자동화하려면 기계가 대체하고자 하는 노동자의 노동 절차를 정확하게 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용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실증 연구를 수행할 때 프레이는 하나의 직업을 여러 개의 업무로 나눈 뒤에 각각의 업무가 신기술을 통하여 자동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측정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달리 말해서, 프레이는 업무를 측정 단위로 삼았다. 여기까지만 두고 보자면, 프레이와 서스킨드 사이에는 견해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보면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업무 자동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프레이는 여전히 인간중심주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빼닮아야 한다.” 그에 맞서서 서스킨드는 바로 그 인간중심주의 관점을 벗어나야 기술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업무자동화 문제를 다룰 때 프레이가 인간중심주의 관점을 채택하는 과정을 삼단논법 식으로 풀어써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 각종 업무의 자동화 가능성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한데,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를 그 잣대로 삼을 수 있다.
- 인공지능은 극복하기 어려운 세 가지 공학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 그러므로 세 가지 공학적 장애를 더 많이 포함하고 있는 업무일수록 자동화 가능성이 더 낮다고 판정할 수 있다.
아무튼, 프레이는 인공지능이 이런 장애를 - 적어도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기간 안에는 - 넘어서기 어렵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서, 이런 세 가지 능력 중 하나라도 요구되는 업무에 있어서는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비교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비교우위’ 개념을 토대로 삼아 프레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이런 세 가지 능력 중 하나라도 필요한 업무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일자리에서 밀어내기가 어렵다.”
프레이가 제시한 ‘공학적 장애’와 ‘비교우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렸고, 그것에 시비를 걸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공지능에 대하여 인간중심주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공학적 장애’와 ‘비교우위’는 노동의 미래에 대하여 얘기할 때마다 공준(公準)처럼 작동하게 된다.
고용문제 전문가들 중에서 이런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사람으로는 - 내가 알기로는 - 서스킨드가 처음이다. 그는 고용의 미래에 대한 연구가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중심주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학적 장애’와 ‘비교우위’라는 사이비 공준도 폐기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프레이는 인공지능 개발의 역사에서 일어난 이른바 ‘실용주의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는 기계학습 기술을 인공지능 출현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런 이유로 그는 딥블루를 인공지능으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 의미도 흘려버린다.
알파고가 이겼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겼냐는 것이다. 딥블루는 규칙 기반 컴퓨팅 시대의 산물이었고, 다양한 착점 위치에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하라”는 명확한 규칙을 작성하는 프로그래머의 능력에 그 성공이 달려 있었다. 반면 알파고의 평가 엔진은 명확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았다. 사전에 지정된 프로그래머의 규칙을 따르는 대신 이 기계는 암묵적인 인간의 지식을 모방할 수 있었고, 폴라니의 역설을 피해갔다. 딥블루의 기반은 상의하달식 프로그래밍이었다. 알파고는 정반대로 상향식 기계 학습의 산물이었다.(391)
프레이와 달리 서스킨드는 딥블루의 혁명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프레이가 지적했듯이, 딥블루가 기계학습이라는 구성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대신 더 중요한 다른 점이 있었다. 딥블루는 ‘게임에서 승리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체스 기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채택하였다.
인간 체스 기사들은 직관능력을 동원하여 몇 수 앞을 읽는다. 승패는 몇 수 앞까지 읽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와 달리 딥블루는 착점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완력으로 몽땅 계산해버렸다. 이런 프로그래밍 기법을 ‘완력법’(brute force technic)이라고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서스킨드는 혁명적인 전환을 읽어낸다. ‘인간 체스 기사를 이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인간 체스 기사를 모방한다’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을 모방하는 길 대신 다른 길을 통하여 인간을 이겼다는 점이다. 서스킨드는 그 차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인간이 수행하는 과제를 기계로 완수하려는 시도와, 인간이 그 과제를 완수하고자 실제로 이용하고 있는 절차를 그대로 모방하려는 시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69-78)
<고용의 미래>에서 프레이는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를 잣대로 사용하였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을 빼닮아야 한다면, 그가 제시한 잣대는 옳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빼닮을 필요가 없다면, 그 잣대는 ‘근거 없는’ 잣대로 될 것이다. 서스킨드는 바로 이 점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인공지능은 구태여 인간을 빼닮을 필요가 없다. 목표만 성공적으로 달성하면 된다. 인간과 달리 인공지능은 엄청나게 빠른 계산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구태여 직관능력을 사용하는 대신 계산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나는 방법 아닐까? 프레이가 인공능에게 ‘업무 숙련’이라는 방법을 요구했다면, 서스킨드는 인공지능에게 ‘업무 재설계’라는 방법을 권장하고 있는 셈이다.
프레이는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 앞에 ‘단기적인’이라는 한정어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 장애를 ‘원리적인’ 장애로 여기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인간중심주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적 특성이 단기적으로 변할 수 없는 것인 한,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도 단기적으로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4-2. 새로운 공학적 근거 : 자동화 한계선 잠식
4-2-1. 한계선의 가변성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서부터 경제학자들은 자동화의 한계선을 찾아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장차 인공지능이 인간을 모두 일자리에서 밀어낼 것인가?”이 질문을 ‘자동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다시 써보면 이렇게 된다. “인간의 노동을 어디까지 자동화시킬 수 있을까?”
지금까지 여러 경제학자들이 찾아낸 이런저런 대답들 중에서 가장 많은 경제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대답은 ALM 가설이다. “틀에 박힌 업무는 자동화시킬 수 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는 자동화시킬 수 없다.” 달리 말해서, ‘틀에 박힌 업무’와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를 가르는 경계선이 곧 자동화의 한계선이 된다.
프레이와 서스킨드도 ALM 가설에 동의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인공지능 기술이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까지 자동화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다. 차이는 한계선의 고정성 여부에 있다. 인공지능을 통한 자동화의 한계선은 고정불변일까, 아니면 가변적일까?
프레이는 그 한계선을 고정불변이라고 보는 편이다. 인공지능에게는 원리상 넘어서기 어려운 ‘공학적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래에 인공지능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선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충분한 일자리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스킨드는 자동화의 한계선을 가변적이라고 본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자동화 한계선이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역사를 통하여 증명된 사실이다. 특정 시기의 사람들이 볼 때는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에 속한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다음 시기의 사람들이 볼 때는 ‘틀에 박힌 업무’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서스킨드는 ALM 가설의 주창자들조차도 자동화 한계선의 가변성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지적한다.
인공지능에 일어난 실용주의 혁명은 경제학자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지난 몇 년 사이에 ALM 가설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2003년에 처음 ALM 가설을 세웠을 때 데이비드 오터와 동료들은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의 목록을 함께 제시했다. 저자들은 이 업무들을 자동화하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업무들은 대부분 자동화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트럭 운전 업무’였는데, 이듬해인 2004년에 세바스찬 스런이 첫 무인 자동차를 개발했다. 또 다른 업무는 ‘문서 작성 업무’였는데, 이제는 주요 업무 대부분에서 문서 자동화 시스템을 흔하게 쓴다. ‘의료 진단 업무’도 자동화로부터 안전하리라고 생각해지만, 오늘날에는 기계가 여러 의료 분야에 쓰이고 있으며, 특히 안질환과 암을 찾아내고 있다.(97)
서스킨드는 바로 이런 변화 추세를 읽어서 그 속에서 미래의 싹을 찾아내고자 한다. 자동화 한계선이 과거에도 이동해왔다면, 미래에도 이동해갈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서스킨드는 프레이가 <고용의 미래>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47퍼센트’를 단칼에 베어버린다.
일이 줄어든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정확히 말하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사실이라고는 기계의 성능이 오늘보다 내일 더 좋아져서 한때 인간이 수행했던 업무를 더 많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지금부터 X년 뒤에는 실직률이 Y퍼센트일 것이다” 같은 명확한 표현이 불안을 덜어 줄지는 몰라도, 이런 거침없는 예측은, 그 아래 깔린 근거가 제아무리 정교하다고 하더라도, 노동의 미래를 잘못 판단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180)
서스킨드는 오늘날 ‘공학적 장애물’로 꼽히고 있는 것들도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곧 극복될 것이며, 그에 따라 자동화 한계선도 점점 더 뒤로 밀려나서 마침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 결과 인간의 일자리가 점점 더 줄어드는 구조적 기술실업이 미래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이번에는 다르다.” 고용의 미래에 대한 프레이와 서스킨드의 견해 차이는, 그 뿌리를 찾아서 내려가 보면,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점의 차이가 현실에 대한 판단과 실천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2-2. 인공지능 기술의 실용주의 혁명
프레이는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와 ‘인간의 비교우위’를 공학적 논거로 제시하였다. 그것을 대체하기 위하여 서스킨드가 제시하고 있는 공학적 논거는 ‘인공지능 기술의 실용주의 혁명’과 ‘업무 잠식 추세의 법칙성’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서스킨드가 말하는 ‘실용주의’란 인공지능을 보는 새로운 관점, 새로운 철학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중심주의 관점과 철학을 고집하는 ‘순수주의’와 상반되는 것이다. 서스킨드는 실용주의 혁명이 1997년 ‘딥블루’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인공지능 연구 초창기에 대다수 연구자들은 어떤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를 만들려면 인간이 그 업무를 어떻게 수행하는지 관찰해서 그대로 본떠야 한다고 믿었다. 기계가 우리 인간과 같은 능력을 얻기를 바란다면, 뇌의 작동 방식에 최대한 가까워지도록 연구를 밀고 나가야 진정한 지능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이것이 그 당시 많은 연구자들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인간을 본떠 기계를 구축하는 접근법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연구자들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을 깨달았다. 1980년대 후반의 이 침체기를 ‘인공지능의 겨울’이라고 부른다. 인공지능의 첫 물결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인공지능 연구 상황이 다시금 밝아진 때는 1997년이다. IBM이 개발한 ‘딥블루’라는 시스템이 당시 세계 체스 챔피언이던 가리 카스파로프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결과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시스템이 작동한 방식이었다. 딥블루는 가리 카스파로프의 창의성, 직관, 천재성을 그대로 베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사고 과정을 모방하지도 않았고, 그의 추론을 흉내 내지도 않았다. 그 대신 엄청난 처리 능력과 저장 능력을 이용해서 1초에 무려 3억3천 수를 계산했다.
딥블루가 거둔 성과는 실용성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신념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전까지 인공지능 연구자 대다수는 순수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인간이 지능을 사용하는 행동을 관찰해서 인간을 닮은 기계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딥블루는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딥블루 개발자들은 인간의 지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과제를 골라서, 그것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완수할 기계를 만들었다. 바로 이 방식이 인공지능의 겨울을 끝냈다. 그래서 나는 이 전환을 실용주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세대의 기계들은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느냐가 아니라 과제를 얼마나 잘 완수하느냐로 판단되었다.
실용주의 혁명은 인공지능을 판단하는 잣대를 ‘얼마나 인간을 빼닮았느냐’에서 ‘얼마나 목표를 잘 달성하느냐’로 전환시켰다. 실용주의 혁명의 혁명성은 이처럼 잣대를 바꾼 데 있었다. 이 전환의 의미를 서스킨드는 다윈의 진화론이 가져온 거대한 전환과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중세 신학자들과 초기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모두 창조물이 창조자를 닮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구약성서 속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인간을 빚었듯이, 초기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기계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중세 신학자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도 인간의 능력도 어떤 초월적 지능을 지닌 존재가 애써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빚어내는 식으로, 하향식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라는 사실을 1859년 찰스 다윈이 증명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한 힘은 상향식으로 작용한 무의식적인 설계 과정이었다. 다윈은 이를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라고 불렀다. 세 가지 사실만 받아들인다면, ‘자연선택’이라는 표현은 진화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첫째, 생명체는 조금씩 변이를 일으킨다. 둘째, 변이들 가운데는 더러 생존에 유리한 것이 있다. 셋째, 이런 변이가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손수 인간 창조 사건을 계획할 뛰어난 지능의 설계자는 필요 없었다. 이 세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자연계에 출현한 모든 설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조그마한 변이일지라도, 그런 변이로 얻는 장점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어떤 순간에는 하찮아 보이는 변화일지라도, 세상이 알아서 굴러가도록 오랫동안 내버려 두면, 그래서 그런 변화가 수십억 년 동안 쌓이면, 입이 떡 벌어지도록 복잡한 특성을 만들어낸다.(83-84)
인공지능이 출현하자면 세 가지 구성요소가 필수적이다. 강력한 컴퓨터, 인터넷 빅데이터, 기계학습 알고리즘이 그것이다. 세 구성요소가 갖추어지면, 주어진 목표(업무)를 달성할 방법을 찾아내는 학습과정을 거치면서 인공지능이 출현할 수 있다. 목표(업무)를 달성하는 방법은 인간 설계자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이 찾아낸 방법은 인간 설계자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중심주의자 고든이 업무 재설계를 통하여 택배를 배달하는 해법을 상상하지 못했듯이, 인간은 인공지능이 업무(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해법을 찾아낼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동화의 한계선을 고정시켜둘 수 없다.
이세돌-알파고 바둑 대결이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두 번째 대국 37수에 알파고는 5선에 어깨 짚는 수를 두었다. 대국을 관전하는 모든 바둑 전문가들이 그 수를 악수로 보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빼닮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수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불가능한, 두어서는 안 되는 수였다. 수천 년 바둑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용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얼마든지 가능한, 두어도 되는 수였다. ‘대국에서 이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바둑의 역사에서 등장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알파고에게는 사이비 잣대였을 뿐이다. 알파고는 그 잣대를 내버렸고, 바둑에서 이겼다.
참고로, 알파고가 완전히 실용주의 원리만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주의자들의 연구 성과들 중에서 계승할 만한 것은 계승하고 있다. 특히 인공신경망 구조와 딥러닝 알고리즘이 그렇다.
아무튼, 인공지능은 광활한 빅데이터의 자연 속에서 스스로 학습한다. 스스로 학습을 한다는 점을 두고 보자면, 인공지능의 출현 및 발전은 생명체의 진화와 닮은 점이 있다. 물론 엄청난 차이점도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학습에 필요한 시간을 꼽을 수 있다. 생명체의 진화는 자연 속에서 무한히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에 반하여 인공지능의 출현 및 발전은 불과 며칠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런 차이점에 주목한다면, 인공지능이 조만간 인류의 지능을 능가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이른바 ‘특이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서스킨드도, 그가 인공지능 전문가로서 얘기하는 맥락에서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생명체의 진화가 시간을 이용했다면, 우리는 컴퓨터의 계산 능력을 이용한다. 그러니 미래에 우리가 기계를 만드는 완전히 다른 설계,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 기계들이 살아 있는 가장 유능한 인간의 능력마저 훌쩍 뛰어넘는 정점에 도달할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106)
그러나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에서 서스킨드는 단 한 순간도 고용문제 연구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여러 차례 ‘특이점’ 또는 ‘범용인공지능’이라는 논거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는 프레이와 달리 서스킨드는 그런 논거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서스킨드는 자신의 연구방법을 일관성 있게 유지한다. 현실의 추세를 관찰하고 그 속에서 미래를 가리키는 징후를 읽어낸다는 방법이다.
“인공지능 기술로 인하여 구조적 기술실업이 닥칠 것으로 예상된다”는 주장을 입증할 때도 서스킨드는 자신의 연구방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이미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는 ‘특용인공지능’을 논거로 사용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현실을 보면, 점점 더 다양한 분야에서 저마다 그 분야에 한정된 특용인공지능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추세이다. 그리고 이 추세 속에는 고용의 미래를 가리키는 다음과 같은 징후가 담겨 있다.
인간을 빼닮아 한순간에 노동자를 밀어낼 수 있는 단일 기계를 만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기계에 의하여 위협받을 수 있다. 인간과 달리 협소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지닌 다양한 기계를 차근차근 늘리기만 해도, 인간이 수행하고 있는 개별 업무를 기계가 야금야금 차지하기에 충분하다.(96)
4-2-3. 업무 잠식 추세의 법칙성
기계가 직업 또는 일자리 수준이 아니라 업무 수준에서 인간을 대체하고 있는 현상을 서스킨드는 ‘업무 잠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술 발전에 따른 업무 잠식 추세의 법칙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벤저민 프랭클린의 격언을 빌려와서 확장한다.
오랜 격언을 빌리자면,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 그리고 업무 잠식뿐이다.
어떤 직업을 수행하는 인간노동자는 그 직업이 요구하는 여러 가지 업무를 모두 수행해야 하며, 또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택배 직업은 배달해야 할 화물 명단을 확인하는 업무, 화물을 차에 싣는 업무, 도착지에 이르는 최적 운전 경로를 찾아내는 업무, 자동차를 운전하는 업무, 자동차에서 화물을 내리는 업무,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서 화물을 수취인에게 전달하는 업무 등등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 택배기사는 그 모든 업무를 수행해야 하며, 또 수행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오늘날 인공지능은 하나의 직업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업무들 중 기껏해야 일부만 수행할 수 있을 뿐, 나머지 업무는 수행할 수 없다. 아마 이런 사정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예컨대, 택배 직업을 구성하고 있는 업무들 중 인공지능이 아직 수행할 수 없는 업무들이 많다. 지금으로서는 화물 명단을 확인하는 업무, 최적 운전 경로를 찾아내는 업무 정도를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조만간 로봇팔을 이용하여 화물을 차에 싣고 내리는 업무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율주행 기술을 이용하여 자동차를 운전하는 업무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진 물건을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서 수취인에게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등장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프레이의 용어를 빌려와서 표현하자면, 바로 이런 업무가 인공지능이 수행하기 어려운 ‘병목 업무’에 해당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직업 또는 일자리에 초점을 맞춘 채 인공지능의 노동능력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늘 인공지능의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인간을 빼닮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택배기사 일자리는 오랫동안 기계에 의하여 대체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빼닮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결론이다. 이런 식의 논리전개를 매우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고든의 발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프레이는 고든을 ‘인공지능 회의론자’라고 비판했다. 이때 그가 내세운 비판의 논거는 ‘인간중심주의 관점’이었다. 고든이 인간중심주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보았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업무 잠식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프레이는 남을 비판할 때는 실용주의자로 된다. 실용주의 관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주장을 할 때는 다시 인간중심주의자로 된다. 그가 <고용의 미래>에서 견지하고 있는 관점은 인간중심주의 관점이다. 그가 측정의 잣대로 삼은 것은 ‘인공지능의 세 가지 공학적 장애’였다. 그것은 모두 인간중심주의 관점에서 나온 기준이었다. 그가 연구 결과로 내놓은 “47퍼센트 대 53퍼센트”라는 예측의 밑바탕에도 인간중심주의 관점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그의 낙관적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중심주의 철학이 흐르고 있다.
그와 달리 만약 우리가 실용주의 관점을 채택하고 업무에 초점을 맞춘 채 인공지능의 능력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택배기사가 수행하는 노동의 목표는 화물을 수취인의 손에 전달하는 것이다. 실용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과정은 어찌되든 상관없다. 인간을 빼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전달하든, 인간과 전혀 닮지 않은 드론이 공중으로 날아가서 전달하든, 화물을 수취인의 손에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고든이 지적한 병목 업무는 장차 어떤 식으로 해결될까? 오늘날 이미 시도되고 있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우선 순수주의 해법의 사례를 찾아본다면, 포드 자동차와 어질리스 로보틱스가 합작하여 진행하고 있는 시도를 꼽을 수 있다. 자율주행차와 휴머노이드를 사용하여 화물을 수취인의 손에 전달하겠다는 시도이다. 여기서 최적 경로를 찾아내는 업무, 자동차를 운전하는 업무는 자율주행차가 맡는다. 차에서 화물을 내리는 업무, 그 화물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업무, 초인종을 눌러 수취인에게 화물을 전달하는 업무는 휴머노이드가 맡는다.
실중주의 해법의 사례로는 단연 아마존의 시도를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완전한 업무 재설계를 통한 목표 달성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택배 기사도, 택배 차량도 전혀 닮지 않은 드론을 사용하여 화물의 수취인의 손에 전달하려는 시도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업무도,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업무도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이 목표를 완수할 수 있을 때까지 과도기 동안 유행하게 될 시도들을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와사비 택배’ 사례를 보자. 택배 기사들은 화물을 아파트 단지 앞까지 배송하는 업무만 맡는다. 이어서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고 있는 플랫폼 노동자들이 동호수를 찾는 업무,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업무, 초인종을 눌러서 수취인에게 화물을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오늘날 와사비 플랫폼을 이용하고 있는 택배 기사들은, 단지 내 배달 업무가 절약되기 때문에,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화물을 배달할 수 있다. 그에 비례하여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곧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자리에서 밀려나게 될 위험성도 더 커져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화물을 아파트 단지 앞까지 배달하는 업무가 곧 기계에 의하여 ‘잠식’당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 이미 우체국이 자율주행 택배 차량의 시험운행에 들어갔다.
이런 일이 택배 직업에서만 일어나고 있을까? 이미 수많은 직업들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외면할 수 없는 거대한 추세가 아닐까? 프레이 자신도 <테크놀로지의 덫>에서 여러 가지 직업 사례를 나열하고 있다.
2018년 구글은 콜센터 노동자를 대체할 인공지능 기술을 제작 중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콜 센터 회사들이 해외로 직장을 이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략 220만 명의 미국인이 전국 6800개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으며, 수십만 명이 소규모 현장에서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다.(396~397)
2015년 5월 다이믈러벤츠는 최초의 자율주행 대형 트럭을 도로에 내보냈다. 현재 대형 트럭과 트레일러 트럭 운전자로 일하는 미국인은 190만 명이다.(401)
아마존은 무인계산대 인공지능 ‘아마존고’를 내놓았다. 현재 무려 350만 명의 미국인이 전국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마존은 현재 시애틀에 세 곳,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한 곳의 매장을 운영 중이며, 2021년까지 3000개 매장을 열 계획이다.(404)
이런 추세에도 불구하고 프레이는 고용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그는 오늘날의 자동화 논쟁이 예전의 논쟁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예전의 논쟁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새로운 논거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대규모 기술적 실업이 임박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거의 없다. 역사적 기록이 충분히 보여주듯이,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경보는 언제나 거짓 경보였음이 드러났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만일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번에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출하고 있는 여러 논거들 중에서 예전의 자동화 논쟁에서는 등장한 적이 없는 새로운 논거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461)
서스킨드는 두 가지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실용주의 혁명’은 공학적 논거에 해당된다. ‘업무잠식 추세의 법칙성’은 역사적 논거에 해당된다. 내가 볼 때, 서스킨드가 제시하고 있는 두 논거는 예전의 논쟁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새로운 논거이다. 두 가지 논거를 사용하여 ‘자동화의 한계’라는 문제를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직업 수행이 아니라 업무 수행에 실용주의 인공지능을 투입함으로써 오늘날 이미 여러 가지 병목 업무의 자동화가 가능해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병목 업무들이 자동화될 것이다.
실용주의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의 업무를 점점 더 잠식해가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의 추세이다. 이 추세를 인정하면서 고용의 미래를 예측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외면할 것인가? 서스킨드는 자신이 현실의 추세 속에서 찾아낸 미래의 징후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노동의 세계는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줄어들 뿐이다. 여기서 유념할 것이 있다. 어떤 영역에서 인간의 노동을 찾는 수요가 적어질지라도 처음에는 노동의 양이 아니라 노동의 성격, 이를테면 임금, 일자리의 질, 지위가 먼저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마침내 일자리의 수가 영향을 받게 된다. 지금은 인간의 노동을 찾는 수요가 곧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맞닥뜨릴 난관은 마찰적 기술 실업을 피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노동 수요가 충분하지 않게 되는 구조적 기술 실업이 가져올 위협이다. 그런데 내가 기술과 관련해서 말하는 장기란 수백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다.(17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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