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지난 회차의 인터뷰글을 2회차로 나누어 싣습니다. 두 편이나 정리하시느라 고생하신 혜정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주] |
전태일 열사 50주기, 다시 시작되는 시다들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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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 박태숙(전 청계피복노동조합 조합원, 현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조합원)
인터뷰어 : 기록노동자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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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푸어라는 말이 있잖아요.”
나는 어느 날의 아침에 ‘위로공단’이라는 영화 속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날의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가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일을 해요. 정말 열심히 해요. 내 인생 다 투자해서 소모하면서 일을 해요. 그런데 일을 해도 가난하다는 거죠.”
가난이라는 말을 꺼내놓고, 담담한 목소리로 눈꺼풀을 깊이 깜빡, 깜빡이던 그녀가 우르르 운다. 그녀의 속눈썹이 금세 눈물에 흠뻑 젖는다.
“아이가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는데 엄마로서 책임을 못 져준다는 거죠. 부모님이 젊었을 때부터 나이 많을 때까지 고생을 했는데, 부모님한테 다달이 용돈을 정기적으로 십 만원이면 십 만원, 정기적으로 드리고 싶은데 그게 어렵다는 거죠. 그런데 그거를 엄마, 아빠도 안다는 거예요. 내가 힘들다는 거. 그걸 서로 감내하면서 미안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거.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요.”
나는 그 날의 그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녀는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책임지려 하고 있다. 그 가난을 그녀 홀로 오롯이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이 그녀를 울게 한다. 우르르 울던 그녀는 다시 목소리가 차분해진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별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는 위로공단에서 또 한 명의 그녀를 본다. 신순애 씨는 연극 ‘ 70 여공’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예순 그녀는 열세 살, 평화시장 시다로 일하던 순애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곁에서 “울지만 마”라고 외치는 연출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녀는 그 날 결국 울고 만다. 수십 년 전 함께 일하던 그녀의 동료들은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졌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사라진 그녀들이 재단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더란다, 는 이야기를 전해 듣곤 했다고, 열세 살 여공 순애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2020년, 나는 또 한 사람의 그녀, 박태숙씨를 만났다.
위로공단 속 또 다른 그녀, 박태숙
“아들 혼자 키워서 먹여살려야 했어요. 결혼하고서는 시댁 일까지 해야 하고, 안 그러면 욕 얻어먹고.”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오죽하면 ‘생은 고’라는 말이 있으랴.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 속 여성의 삶의 ‘고’는 그 깊이가 더하다. 사실 사회적 약자의 삶들이 대개 그러하다. 박태숙 씨의 생애도 거기서 멀지 않았다. 삶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는 잠시 멈춰가는 그 행간마다 고단함이 속속들이 녹아있다. 그녀의 삶은 가부장제 내 여성들의 삶을 축약해놓은 형태다.
그녀는 평생 누군가의 삶을 ‘뒷바라지’라는 이름으로 책임져야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막내동생을 뒷바라지했다. 결혼을 하고서도 같았다. 가족을 부양하고 남편과 아들을, 시댁 식구들을 뒷바라지 했다. 그녀의 생애 속에 오롯이 그녀만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 62세가 된 지금까지 단 몇 년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삶은 온통 타인들을 향해 있었다. 그 몇 년이 바로 청계피복 노동조합 활동을 한 시간들이었다. 그 몇 년은 그녀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행동한 거의 유일한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여성노동자로 살아오면서 겪은 차별에 대해 물었더니 그녀는 그런 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재단사와 미싱사의 급여가 4배 정도 차이가 났다는 이야기, 재단사와 재단보조는 남성만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재단기계가 없었을 당시 반달칼로 재단을 해야 했는데, 그게 힘이 필요한 일이라 남성들이 재단사를 했다는 것이다. 재단기계가 들어온 이후에도 재단사는 계속 남성이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시다 일은 다 불합리했지만 우리는 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나쁜 재단사들은 컨펌을 안 해줘. 몇 번씩 돌려보내는 거야. 하다하다 안 되면 나중에는 울어버리는 거지. 방법이 없잖아.”
재단사들은 여성 미싱사, 여성 시다들의 관리자였다. 관리자들이 다 남성이었다는 것을 그녀들은 불합리하지만 받아들였다. 말 끝에 그녀는 말한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여성노동자로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인 차별이, 평생 동안 일상 곳곳에 내재해 사라지지 않던 그 차별에 대한 항거를 포기해 온 시간이 그녀의 그 말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었다.
결혼 후, 제 2교대의 삶이 시작되다
스물 일곱, 그녀는 결혼을 했다. 그 시절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한 결혼이었다고 말한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출산 후 2개월만에 일을 다시 시작했다. 출산 직후 일을 하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출산 당일까지도 일을 하다가 산통을 느끼고 아이를 낳으러 간 친구도 있었다. 출산을 하고도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어, 여성노동자들은 그 먼지투성이 공장 안 미싱 옆에 아이를 데려다 놓고 일을 했다. 그녀 역시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어서 돌봄노동자에게 당시 돈으로 100만원을 주고 주 6일 아이를 맡겼다. 나중에는 그 돈이 감당이 되지 않아 공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미싱 한 대 두고 일을 했다. 돌봄노동과 가사노동, 생계노동까지 그녀는 종일 쉴 틈이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스스로 밥을 챙겨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다시 공장에 취직해 일을 할 수 있었다.
제 2교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삶
“다시 노동자가 되다? 그런 느낌이더라구요.”
그녀는 최근 다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봉제인지회’ 조합원이 된 것이다. 내 권리를 위한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가슴 뛰는 일이지만, 한 편으로 노동조합이 다시 만들어졌다는 것은 현실이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여서 씁쓸하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다시’ 노동자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녀는 계속 노동자였다. 봉제노동자이기도 했지만, 가사노동자였고 돌봄노동자였다. 평생 일터에서 집에서 2교대 노동을 했다. 집은 그녀에게 재생산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었고, 그녀는 휴식의 시간에 또 가족 누군가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을 해야만 했다.
알리 러셀 혹실드의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에서는 가정일과 직장일을 병행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2교대 근무’라고 표현한다. 책의 원제도 같은 맥락에서 <2교대>다. 그녀들에겐 가정은 휴식과 동의어가 아니다. 연장근무일 뿐이다. 왜 이런 끝없는 노동의 굴레를 그저 어머니라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견디게 만들었는지 혹은 견디게 만들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또 그녀는, ‘70 여공’이라는 연극 속 신순애씨처럼 50년 전의 그녀를 호출해, 50년 후의 박태숙씨, 그녀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있다. 그녀는 그런 기억들을 품고 또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또 다른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킬 것이다. 50년 만에 다시 노동조합 조합원이 된 그녀가 말한다.
“잘 되겠죠. 잘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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