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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주식투자의 시대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최근 주식열풍과 노동자적 관점에서 주식투자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김민하 평론가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주]

 

주식투자의 시대

 

김민하

시사평론가

 

  주식투자의 시대이다. 자산운용사 대표가 시대의 멘토 대접을 받는다. 대학생들까지 빚내서 투자에 뛰어드는 동안 코스피 지수는 3000을 찍고 내려왔다. 어릴 때부터 주식 투자 교육을 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세태에 무관심한 사람은 좀 아둔한 사람처럼 비춰진다. 급기야 ‘벼락거지’란 말까지 나왔다. 남들이 자산투자로 벼락부자가 될 동안 미련하게 일만 하다 기회를 놓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삶에 주식 투자가 영향을 미친 것은 꽤 오래됐다. 주식투자는 이미 1980년대 대중화됐는데, 비교적 안정적 수입의 중산층을 따라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산투자 열풍에 올라타는 것은 일반적 광경이었다. 외국인 투자가 허용되고 코스닥이 출범한 1990년대를 지나면서 주식투자에 손을 잘못 대 전세금을 날렸다는 식의 한탄은 흔한 얘기가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식투자 열풍의 근본 동력은 ’안정적 노후는 사회가 책임져주지 않으므로 알아서 각자도생 해야한다’는 식의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인한 범사회적 불안과 확장재정의 부동산 쏠림을 제어 하려는 정치 권력의 의도가 맞물리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해 주식 양도세 대주주 요건을 3억원으로 낮추기로 한 애초의 계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사의 표명 사실을 공개한 것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대주주 요건을 10억원으로 유지하는 것은 당정청 합의를 통해 결론이 난 사안인데 경제부총리가 이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그럴 수도 있다’는 분위기 속에서 사태를 봉합했다. 왜 인가? 관료가 무서워서라기 보다는 합의에 명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주주 요건 10억 유지는 코로나19로 경기 위축이 우려되고 재보선까지 앞둔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 폭등을 추가로 야기하거나 기업과 투자자의 부담을 늘려 민심을 떠나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정치적 결정이라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코로나19로 인한 불황이라는 조건에는 당연히 고용불안이 포함된다. 2020년대 주식투자 열풍의 한 축은 임노동에 대한 냉소이다. 직장을 열심히 다녀도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퇴직하는 게 낫다는 자조는 이미 젊은이들 사이에 만연해있다. 가령 임금수준이 좀 낮더라도 무언가 자아실현이 가능하다거나, 직장 경험을 자기계발의 재료로 쓸 수 있다거나, 하다못해 이직을 할 때 경력을 인정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불만족스런 직장 생활에도 뭔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보는 직장 생활은 그런 게 아니다. 고용은 처음부터 불안정한 상태이며, 이 직업을 원했던 적도 없고, 회사가 시키는 일은 자기계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다른 회사에 경력을 활용해 지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히려 세대나 성별의 차이에 의한 갈등 등 직장 환경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일방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직업이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한동안 퇴직 열풍은 창업에 관한 이런 저런 담론 시장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엔 이것도 어렵다. 코로나19로 인한 주가 하락은 이 빈 자리를 메꾸는 좋은 핑계가 되고 있다. 인터넷 말장난에 익숙한 세대의 작명일법한 ‘동학개미운동’은 삼성전자 등 대기업 주가가 하락한 지금이 오히려 매입 기회라는 ‘손익계산’이 ‘팔자’는 외국인과 기관에 맞서 국내 주식시장을 지키자는 대의명분을 외피로 두른 결과물이다. 이것은 주식시장 과열이라는 현상에 경제정책을 넘는 정치사회적 개입의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 도마에 오르는 공매도를 둘러싼 논란은 일견 복잡한 금융정책적 함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역시 앞서와 유사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매도에 대한 주류경제학과 기성 관료들의 해석은 이러하다. 주식시장의 기업과 투자자는 항상 주가가 오르기를 바라는데 이러한 의향은 시장에 낙관적 편향을 줘 장기적으로 거품 형성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비관적 편향을 더하기 위해선 공매도와 같은 장치가 용인돼야 한다. 반면 ‘동학개미’들의 의견은 이렇다. 공매도는 조직화 된 투기세력이 이익을 거두기 유리한 장치이며 이들이 이익 실현에 나서면 소액 투자자들은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또한 한국의 공매도 시스템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개미’들에게 불공정한 방식으로 이뤄져 있어 제도 개선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공매도는 전면 금지되어야 한다.

 

  금융당국은 코로나19 사태의 특수성을 감안해 공매도를 한시적으로 금지시켜놨다. ‘한시적’이란 것은 영원히 금지할 순 없다는 뜻이다. IMF도 공매도 재개를 권유했다. 문제는 앞서 봤듯 여론인데, ‘동학개미’들의 반발도 있고 하여 여당은 금지 연장이 필요하다는 분위기다. 언론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기 전까지 재개는 어렵다는 평가가 다수다. 그러나 운동장의 평형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맞춰지는 것일까? 근본이 ‘머니게임’인 자본시장에서 모든 참여 주체가 동의할 수 있는 균형점이 어디인지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한 발 물러서서 이 논쟁이 어떤 사회적 균열을 드러내는지를 볼 때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자본은 손해보지 않는다. 당장의 이익 또는 손해의 대상이 초국적 금융자본이냐 국내 산업자본이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학개미’들은 힘없는 다수의 의견 대변을 자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듯 행동하지만 결국 국내 대기업의 이윤 창출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공매도 논란과 경제적 민주주의가 겹치는 착시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미국에 있다. 1984년 설립된 ‘게임스탑’이란 이름의 게임소프트 유통 체인은 온라인으로의 구매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이사가 영입돼 온라인 판매 사업 확장을 공언하고 이 업체에 ‘향수’를 가진 젊은층이 이에 호응하면서 주가가 치솟자 이를 거품으로 판단한 헤지펀드가 공매도를 거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개미’들의 대응은 ‘동학개미’를 연상케 했는데, 특정 사이트에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 통일을 이뤄 ‘게임스탑’의 주가를 밀어 올린 것이었다. ‘공매도 세력’은 천문학적 손해를 보았고 헤지펀드 운영자는 ‘신상털이’를 당해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야 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월스트리트 기득권에 대항하는 개미들의 싸움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했듯 본질적으로 이것은 자본의 이해관계를 민주주의의 포장지로 감춘 것에 불과하다. ‘동학개미’라는 ‘약자의 서사’가 아니라, 주식투자의 대중화가 가져온 계급성의 탈각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모두가 기업의 주주인 세상에서 노동조합의 파업은 같은 노동계급으로서의 권리 쟁취가 아니라 내 주식의 가격을 낮추는 악재로 생각될 것이다.

 

공동체로서 사회의 이익이 아닌 ‘나’의 이익을 기준으로 세상만사를 판단하고 나만의 이익을 확장해달라는 요구를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정치를 요즘은 ‘극우포퓰리즘’이라고 한다. ‘동학개미’들이 극우주의자라는 게 아니다. 그것과 이것은 같은 정치적 정동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 진보는 여기에 속수무책이다. 이 사태의 최대 비극은 다른 게 아니라 이 대목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