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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이준석 현상’과 공정이라는 허구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최근 국민의힘 당대표가 된 이준석에 대한 청년운동의 시각에 대해 싣습니다. [편집자주]


‘이준석 현상’과 공정이라는 허구

 

김로자

노동·정치·사람 청년사업팀장

 

  지난 6월 11일, 이준석은 국민의 힘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자리에 올랐다. 이 무렵 언론 지면을 뒤덮은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30대 당대표” 따위의 수사는, 만 36세라는 이준석의 생물학적 나이에 집중하며 이준석을 ‘청년 정치의 대변인’, 혹은 ‘대한민국 정치권의 세대 교체를 이뤄낼 마중물’과 같은 존재로 호명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준석의 나이 이외에 이준석과 청년 정치에서 이야기되는 담론들을 연결하는 매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준석의 ‘청년 정치’는 여태껏 한 번도 20대 청년 보편의 편에 선 적이 없었고, 오히려 그는 청년 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학력, 성별 격차에 따른 갈등과 적대에 집중하며 이러한 구조 속 기득권의 위치에 선 ‘20대 남성 대학생’을 결집하는 정치를 수행해 왔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회자되는 ‘이준석의 청년 정치’는 대국민 사기극에 불과한 셈이다.

 

이준석 신임 국민의당 대표 (사진=경향신문) [편집자주]

 

 

우리는 ‘공정’에 속고 있다

  이준석 정치의 주요한 내용은 ‘공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본래 이준석이 새롭게 내놓은 기획이 아닌, 민주당 정치의 산물이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보수 여당이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와 같은 슬로건을 통해 공정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자기 정치의 기조로 선전해 왔지만 조국 사태와 같은 계기로 자멸하자, 이를 공격하는 안티테제로서 ‘이준석 정치’가 등장하고 민주당의 구호를 탈취해 온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민주당의 ‘공정’과 이준석의 ‘공정’ 모두 청년 세대가 진정으로 직면하는 사회 문제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평등에의 요구는 사회 계급이라는 것이 등장한 이후부터 시대와 세대를 아울러 보편적으로 존재해 왔다. 한편 공정성이라는 화두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적 부가 얼마나 정의롭고 평등하게 분배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는 기존 진보좌파 정치의 내용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20대 청년들은 박근혜 정부 시절 특혜로 대학에 입학한 정유라에게 분노해 거리에 나섰고, 이때 ‘공정’과 ‘평등’이라는 구호는 공통적으로 청년들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후로 청년 집단 속에서 주로 회자되는 담론은 ‘공정’의 이름으로만 등장하기 시작했고, ‘공정성 요구’ 속에서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의 특혜로 노력 없이 정규직 전환을 이룬 비정규직 노동자’와 ‘역차별 정책의 이익을 보는 여성’들에게 분노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청년 대중의 공정성 요구는 한 편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이다.

  공정성 담론에서 가정하는 ‘불공정성’은 공정하다고 가장된 경쟁의 사회적 장 속에, 그 장의 규칙을 무시하는 특혜가 존재하는 것이다. 조국 사태와 정유라 이슈에서 청년들은 이러한 불공정에 분노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공정을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 경로로 이야기되는 것은 ‘형식적 공정’과 ‘실질적 공정’이다. 그리고 불공정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는 청년들의 공정성 요구는 대부분 전자에 수렴한다.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2018)에서는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분배에 있어 산술적 평등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였다. 이는 공정성이 곧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이다.

  형식적 공정을 가장한 능력주의는 다른 사회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여러 정치경제적 조건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형식적 공정의 틀 속에서 사회적 부는 여전히 ‘경쟁’이라는 규칙 속에서 분배된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전제 속에서 개개인이 여기에 투입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자원의 양은 다르다. 불안정한 수입의 비정규직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초과노동으로 인해 일터에 나간 모부에게서 최소한의 돌봄노동조차 제공받을 수조차 없는 아동과, 강남에 거주하며 교육열이 높은 또래집단 속에서 생활하고 매 월 100만원이 넘는 비용을 사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아동은 입시 제도 속에서 전혀 다른 출발선에 선다. 성적은 평등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요컨대 개인의 자질로 여겨지는 능력은 사회경제적 투자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는 사회적 부의 불평등한 분배, 그리고 가난과 부의 대물림으로 이어진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가짜 공정을 옹호하는 이들은, 입시와 취업으로 이어지는 경쟁 사회의 틀 속에서 조건적 우위에 설 수 있는 수도권 남성 대학생들이다. 공정 담론의 중심에 선 이준석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버드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다. 한 편 박성민 청와대 청년비서관 임용에 분노하며 ‘박탈감닷컴’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든 사람들은 고려대학교 출신들이다. 나는 여성, (불안정 저임금)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의 위치에서 공정한 경쟁에서 주장하는 ‘청년 연사’를 본 적이 없다. 이쯤 되면, 공정성 담론 속 청년을 특정한 사회계층이 과대대표하고 있지 않은지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준석은 생각하지 마!”

  요즘은 좌우를 아울러 ‘청년 정치’를 이야기하는 모든 곳에서 이준석이라는 화두를 다루는 데에 열중인 것 같다. 좌파 진영의 청년 단위들 역시 보수 정치에서 회자되는 공정성 담론에 일일이 대응하고 뛰어들고 있다. 문제는 이준석과 공정에 천착할수록 이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휘말려 간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공정’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전제를 형식적 공정성의 선취와 능력주의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상식으로 여긴다. 이런 국면에서 “공정은 나빠!”라는 반박을 반복할 때 사람들의 귀에 남는 것은 “공정” 뿐이다. 우리가 이준석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마련이다. 결국 이 시기에 필요한 것은 이준석과 공정에 목 매다는 것이 아닌, 이준석과 공정성의 정치보다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우리의 정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