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개정 교육과정에서 노동이 삭제된 것과 관련하여 노동교육을 진행하는 교사분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주] |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의 전망
- 2022개정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장윤호
안양공업고등학교 교사
지난 10월 6일 故홍정운 1주기에서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 최서현 위원장은 “작년 10월 여수 현장실습생 故홍정운님의 산재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어떻게 실습 시작한지 10일 만에 산재로 죽을 수 있는지, 어떻게 잠수자격증도 없고 물을 무서워하는 현장실습생에게 바다에 들어가 잠수작업을 지시할 수 있는지, 떡하니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안전교육도 실시하지 않고 현장 지도교사도 없이 진행되는 현장실습을 어떻게 학교도 교육청도, 교육부도 전혀 몰랐던 것인지...”라며 ‘분노스러웠다.’라고 발언하였다.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사망한 사고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자주 발생하고 있음에도 그 해결이 잘 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노동현장에서의 사망사고가 비단 현장실습생에게만 일어나는 것일까? 고용노동부 발표에 의하면 2021년도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는 2,080명(‘2021년 산업재해 현황’, 고용노동부, 2022.03.16_필자주)이라고 하니, 우리는 아직도 하루에 5~6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있는 사회에서 살고있다.
현장실습생과 노동자가 실습이나 일을 하다가 죽거나 다치는 것을 줄이거나 방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책이 있어야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교육이 아닐까 싶다.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안전장비를 잘 갖추고, 법률과 제도를 잘 정비하고,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자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지려면 노동에 대한 감수성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노동자가 일을 하다 다치거나 죽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퍼하고 그런 사고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감수성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어려서부터... 조기교육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노동교육에서 만큼은 조기교육이 필요하다. 삶의 태도나 가치에 대한 것은 초기값이 중요하다. 인생의 초기에 노동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정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 감수성은 산업재해 영역에서만 중요한 것일까? 몇 년전 항공사 직원들이 집회를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광화문에서 모여 집회를 할 때 한결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들은 왜 가면을 썼을까? 아니 왜 써야만 했을까? 당시 집회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노동교육을 한 적 있다. 이들은 왜 가면을 써야만 했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더니 학생들은 “찍히잖아요.” 라도 대답을 하였다. 그렇다. 찍히기 때문이다. 찍힌다는 것은 곧 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에게는 그것이 곧 사망선고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노동과 사회 복지가 미약한 곳에서는 해고가 곧 사망이다. 그러니 얼굴을 가리고 집회를 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시민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는 일상생활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을 맘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민주주의는 회사 문앞에서 멈춘다』, 우석훈, 2018_필자주) 노동 현장에서의 민주주의!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노동 현장이다.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하고, 더 많은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곳이 일터인데, 이런 일터가 민주적이지 않다면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얼마 전에 끝난 화물연대의 파업, 아니 대우조선해양 등 수 많은 파업을 다루는 기사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파업을 다루는 기사에서는 늘 누군가를 볼모로 한다고 말한다. 소비자를 볼모로 파업을 한다는둥, 시민을 볼모 한다는 둥...
그런데 원래 파업은 그런거다.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약자이기에 누군가의 불편함을 볼모로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에서는 쟁의행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쟁의행위라 함은 파업·태업·직장폐쇄 기타 노동관계 당사자가 그 주장을 관철할 목적으로 행하는 행위와 이에 대항하는 행위로서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노동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노동3권에 대해서, 단체행동권에 대해서 배운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파업으로 인한 불편함에 대한 책임은 노동자나 노동조합만 지는 것이 아니다.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다. 백번 양보해도 그 책임은 최소한 노사가 같이 지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항상 노동조합에게만 비난이 쏟아진다. 노동3권에 대해 배워 본적이 없으니, 단결권은 무엇인지, 단체교섭이 무엇인지, 단체행동이 무엇인지, 자본주의 체제의 대부분의 나라가 왜 노동3권을 인정하는지를 배운 적이 없다. 그러니 파업은 늘 불법이고, 노조는 늘 귀족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는 수 많은 사걸들이 생겨나고,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이 발생한다. 기후위기, 생태위기는 물론이고, 수명 연장으로 인한 노인 일자리, 저출생 문제, 교육 문제, 지역간의 불평등, 그로 인한 지역의 소멸,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불평등한 이익 배분, 고용형태의 다변화, 고용형태에 따른 불평등, 미래 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도전 등등. 이 문제들은 서로가 얽혀섥혀 있고, 한 가지 해법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고용을 비롯한 노동이다.
노동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학생들의 숫자가 줄어드는데도 불구하고 입시의 과열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아무리 좋은 교육정책을 들고 나와도 대학입시라는 커다란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미 대학은 서열화되어 있고, 서열화의 꼭대기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하면 더 좋은 노동환경이 펼쳐질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에 취업할 가능성이 높고, 더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까.
하지만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이 없고, 지방의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하는데 걱정이 없고, 아니 고등학교만 졸업하고서도 일자리를 얻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면 입시가 과열이 될까?
이처럼 노동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고 있다, 그래서 학교는 어려서부터 노동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가져야 하고, 노동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그래서 노동교육은 현장실습을 나가는 특성화고 학생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문계라고 불리우는 일반고 학생들은 물론이고 중학교와 초등학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노동교육은 아직도 미약하다. 현장실습을 나가거나 아르바이트 경험이 상대적으로 높은 특성화고를 중심으로 일부 선생님들과 청소년 노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교육을 실시하여 왔다. 전국에서 이런 노력들이 이어졌고, 학교에서 노동교육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여 왔다. 심지어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당시 교육부에 노동교육을 시킬 것을 권고하였다.(‘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노동인권교육을 필수과정으로 포함시키고 내실 있는 교육내용 구성을 위한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권고한다.’, 국가인권위원회, 2010.2.4._필자주)
2021년 1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에서는 노동교육 관련 요소를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반영할 것을 결의하였고, 11월에 교육부에서 발표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 사항에는 생태전환교육, 민주시민교육 및 일과 노동에 포함된 의미와 가치 등을 교육목표에 반영하겠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렇게 노동교육은 학교의 교육과정에 정식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올해 교육부가 발표한 총론 시안에는 노동이 빠졌다. 올해 여름 발표된 각 교과의 각론 시안을 분석해보았더니 현재 사용하고 있는 2015 교육과정과 별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심지어 교육부는 일부 교과에 들어있는 ‘노동자’라는 단어는 ‘근로자’로 바꾸겠다고 한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렇게 정반대로 돌아설까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특성화고학생들이 들을 수 있는 전문공통과목에 ‘노동인권과 산업안전보건’이라는 과목이 새로 생겼다는 것이다. 전문공통과목이란 마이스터고를 비롯한 특성화고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하고 공통으로 들을 수 있는데, 문제는 전문공통과목이 필수가 아니며, 전문공통 과목에 기존에 있던 과목과 신설된 과목까지 총 3개의 과목이 있어서 선택을 하더라고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교육부에서는 특성화고 선생님들의 설문 결과를 보면 노동인권교육을 시켜야한다고 대답을 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고 하니 ‘노동인권과 산업안전보건’ 과목을 많이 선택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사회의 분위기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총론에 넣겠다고 발표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차버리는 교육부를 보면서 과연 어느 학교에서 맘놓고 선택을 하겠는가? 또한 각 시도의 교육감들이 의지를 가지면 그나마 가능하겠지만, 현재의 교육감들 중에서 노동교육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교육감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교사의 수업능력이다. 노동교육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과연 전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전문공통과목은 특성화고에서 전문교과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담당하는 과목이다. 사회선생님이 담당하는 과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교과 교사들의 노동교육에 대한 역량강화가 매우 중요한데, 이는 단순히 원격으로 하루이틀의 연수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복수전공에 준하는 연수가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연수가 개설이 될 수 있을까? 개설이 된다고 해도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연수를 손수 자청하는 교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새로운 교육과정의 개정 과정을 지켜보면 아쉬움이 크기만 하다. 시민단체는 ‘학교부터노동교육’이란 운동본부까지 만들어서 대응을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전문공통과목에 ‘노동인권과 산업안전보건’이란 과목을 신설한 것이 성과라고 하겠는데, 이 과목이 정상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기만하다.
물론 노동교육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동안 묵묵히 해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아니 유치원에서부터 인간의 존엄함은 물론이고 노동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배우고, 노동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교육을 실시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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