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교과위원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교과위원
1-2-2) 생태운동의 짤막한 역사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을 문제로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대책도 구할 수 없다. 생태위기 문제를 인류 최대의 문제로 드러낸 것은 전적으로 생태운동의 업적이다. 노동해방운동이 여기에 기여한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사실에 어긋나는 말이 될 테지만, “별로 없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도 아니었고, 쉽게 이루어진 일도 아니었다. 수많은 생태운동가들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일찍 각성한 선진대중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태운동의 역사를 짤막하게 훑어보자.
1) 석탄금지법
1306년, 영국 에드워드 1세가 제정한 ‘석탄금지법’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환경법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것의 내력은 좀 더 오래되었다.
중세시대 가장 널리 사용된 난방연료는 주로 숲에서 베어낸 화목이었다. 인구는 많은 런던에서는 화목을 구하기 어려웠고, 그런 만큼 값이 매우 비쌌다. 귀족들은 충분한 화목을 구하여 겨울을 깨끗하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지만, 서민대중은 그러기 어려웠다. 그때 영국에서 대체연료로 유행한 것이 석탄이었다. 해변으로 밀려와 쌓이는 ‘바다석탄’(sea coal)의 값이 가장 쌌다. 그러나 석탄은 따뜻했지만 더러웠다. 특히 바다석탄은 연기가 지독했다. 서민대중은 겨우내 바다석탄이 내뿜는 독한 연기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연기는 집안에 가두어둘 수 없었다. 수많은 집에서 내뿜는 연기 때문에 런던 시는 겨우내 시커먼 구름 속에 잠겨 있어야 했다.
1257년 겨울, 헨리 3세의 왕비가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는다. 서민들의 집에서 내뿜는 석탄 연기 때문에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이었다. 1273년 영국 의회는 런던에 특별지역을 정하여 석탄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킨다. 그러나 별로 실효가 없었다. 1307년 에드워드 1세는 석탄금지법의 강제집행을 수행할 전담기구를 설치하고 나선다.
2) 생명 사상
인간이 노동착취에 맞서서 집단적으로 저항하고 투쟁한 역사기록을 추적해보면 수천 년 전 문명의 태동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컨대, 고대 수메르 시대의 토판에 새겨져 있는 신화를 꼽을 수 있다. 거기에는 ‘아눈나키’라고 불리는 큰 신들과 ‘이기기’라고 불리는 작은 신들이 등장하는데, 큰 신들의 가혹한 노동착취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작은 신들이 어느 날 집단적으로 파업을 하면서 반란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에 반하여 인간이 생태계 파괴에 맞서서 집단적으로 저항하고 투쟁한 역사에 대한 기록은 별로 흔하지 않다. 18세기 인도에서 일어났던 ‘케잘리 저항’이 어쩌면 그런 최초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북부 타르 사막 지역의 케잘리(Khejarli) 고을에는 힌두교 구루 잠베스와(Jambheswar)의 29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계명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육식을 삼가고, 채식을 하라.” “푸른 나무를 자르지 말고, 자연을 보호하라.” “모든 생명체를 자애롭게 대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1730년 9월 11일, 이 지방을 다스리던 왕이 궁전 건축에 사용할 케지리(Khejri) 나무를 베어오게 시켰고, 병사들이 케잘리 고을에 도착하였다. 잠베스와의 가르침을 따르던 ‘암리타 데비’(Amrita Devi)라는 여성이 가로막고 나섰다. “나무 한 그루를 지키는 데 한 사람의 목을 바치더라도,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녀는 세 딸과 함께 나무를 감싸 안았다. 병사들은 네 사람의 목을 벤 뒤 케지리 나무를 베어갔다.
그 소식이 인근 84개 마을로 전해졌고, 마을 대표들이 모여들어 회의를 연다. 그리고 병사들이 나무를 베러올 때마다 한 사람씩 나서서 목숨을 걸고 저항하기로 결의한다. 벌목은 계속되었고, 363명이 차례차례 케지리 나무를 감싸 안은 채 죽어갔다. 도저히 벌목을 계속할 수 없었던 병사들은 돌아가서 왕에게 보고하였고, 왕은 벌목 명령을 철회한다. 이때부터 이 고을은 ‘케지리’ 나무에서 유래한 ‘케잘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케잘리 저항은 20세기 후반에 ‘칩코’(Chipko) 운동으로 부활한다. 이어서 2001년, 인도 정부는 매년 9월 11일을 ‘숲 순교자의 날’로 정하고, 이날 ‘암리타 데비 환경보존상’을 수여한다.
3) 야생자연 보전주의
19세기 중반, 가속도를 얻은 산업혁명 열차가 요란한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유럽과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며 달렸다. 석탄을 먹고 달리는 기관차는 검은 연기를 풀풀 내뿜었지만, 아직 그것이 환경운동을 촉발하지는 않았다.
1848년, 유럽에서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동자·민중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혁명의 물결이 대륙 곳곳을 흽쓸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은 개척과 개발에 눈코 뜰 새 없었다. 그해 캘리포니아 지역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한 작은 하천에서 사금이 발견된다. 경쟁자들이 몰려드는 것을 우려한 발견자들은 비밀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갔다. 1849년 한 해에만 8만 명이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고, 골드러시는 미국 서부 개척의 뇌관을 터뜨린다.
1848년 당시 미국 서부는 여전히 인디언 원주민들의 땅이었고, 캘리포니아 지역에 거주하는 백인 이주민의 수는 겨우 1천 명 정도였다. 중심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2백 명 정도가 모여 있었는데, 골드러시가 시작된 뒤 불과 2년 만에 2만5천 명까지 늘어난다. 그리고 1855년까지 적어도 30만 명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든다.
골드러시와 더불어 서부 해안 곳곳에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났지만, 북미 대륙 동부와 서부를 통행하기란 여전히 매우 힘들었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이동하자면, 육로를 이용하든 해로를 이용하든, 봄에 출발하면 눈 내리기 직전 가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문제를 미국인들은 대륙횡단철도로 해결하고자 했다. 1862년, 남북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링컨 대통령은 대륙횡단철도 건설사업을 승인한다. 대륙을 관통하는 개발사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미국에 최초로 거대독점자본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정부는 철도 건설을 승인했을 뿐, 승인을 받아내고 철도를 건설한 쪽은 자본가들이었다. 1869년까지 2,826km 길이의 첫 번째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된다. 이어서 1900년까지 네 개의 대륙횡단철도가 추가로 건설된다.
개발은 두 가지 파괴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인디언 원주민의 생명과 공유지였다. 대다수 원주민은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원주민은 이른바 ‘보호구역’으로 쫓겨났다. 다른 하나는 야생자연이었다. 철도 건설은 산맥을 뚫고 강을 메웠으며, 주변 도시의 발달은 주변 숲을 먹어치웠다.
첫 번째 대륙횡단철도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관통하였다. 철도 공사가 한창이던 1968년, 그곳 요세미티 계곡에 존 뮤어(John Muir)가 도착한다. 뒤에 ‘국립공원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는 인물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자기 말대로, “자연이라는 대학에 뒷문으로 입학한” 뮤어는 통나무 움막에서 양을 치면서 홀로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식물, 동물, 암석, 빙하를 연구하였다. 그는 빙하가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요세미티 수직 계곡은 빙하의 이동을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야생자연에서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에세이로 써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독특한 체험과 수려한 문체는 수백만 독자를 매혹하였고, 그의 이름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광대한 하늘을 가득 채운 붉은 노을, 대기를 뒤흔드는 천둥의 굉음과 칠흑을 가르는 번개의 섬광, 요란하게 부서지는 거대한 폭포수, 깨알같이 박힌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맑은 밤하늘,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나무…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가 나열한 몇 가지 자연광경이다. 이런 압도적인 자연광경을 대할 때 인간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곧 절대권능의 창조자에 대한 경외심으로 발전할 수 있다.
칸트가 나열한 자연광경을 뮤어는 요세미티 계곡에서 매일같이 몸으로 만났다. 그의 글들은 숭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체험과 경외심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가 자연에 대하여 보전주의(preservationism)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야생자연 보전주의자들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닌 대자연이 - 달리 말해서, 절대권능의 신이 창조해낸 대자연이 - 있는 그대로 보전되기를 원한다. 인간의 개발행위가 대자연을 손상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1889년 뮤어는 요세미티 계곡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캠페인을 추동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고, 거기에는 언론인, 화가, 빙하연구자, 식물학자, 지질학자, 대학 교수, 대학 총장, 법률가, 정치가 등 상류계층 엘리트들이 참가하였다. 모두 대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의 캠페인에 힘입어 이듬해 요세미티 계곡은 미국의 세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다. 내친김에 그들은 1992년, 뮤어의 표현을 따르자면, “야생자연을 위하여 뭔가를 하고, 산들을 기쁘게 하려고” 비영리사회단체 ‘시에라 클럽’(Sierra Club)을 설립하였고, 여기서 뮤어는 1914년까지 22년 동안 회장직을 역임한다.
시에라 클럽은 세계 최초의 환경운동단체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환경운동단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클럽 홈페이지는 2024년 현재 전국 64개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 및 후원자 수가 3백8십만 명이 넘는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 단체의 역사를 따라가보면 생태운동의 발전과 변천을 짤막하게 훑어보기 수월하다.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시에라 클럽은 ‘야생자연 보전’을 가장 핵심적인 활동목적으로 꼽고 있다. 그리고 클럽의 최대 활동성과 중 하나로 1964년 통과된 ‘야생보호법’을 꼽는다. 그 뒤 여러 차례 개정된 이 법은 2022년 현재 4만 개가 넘는 지역, 123만km²가 넘는 면적의 토지를 ‘항구적으로 개발을 금지하는 야생지’로 지정하고 있다. 미국 국토의 13%가 넘는 면적이다.
시에라 클럽이 처음부터 회원들의 집단적 아웃도어 활동을 중요한 사업영역으로 삼은 것도 야생자연 보전 사업의 일환이었다. 압도적인 자연광경을 직접 체험하면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껴본 사람만이 야생자연을 보전할 필요성과 책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클럽의 아웃도어 활동에 참가하는 중상층 대중의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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