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교과위원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교과위원
1-2-2) 생태운동의 짤막한 역사
4) 지속가능한 발전주의
시에라 클럽이 주도하던 미국의 초기 생태운동은 헤츠-헤치 계곡 식수댐 건설 논쟁을 거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때까지는 존 뮤어가 대표하는 ‘야생자연 보전주의’(preservationism)가 생태운동의 유일한 흐름이었다. 여기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한 것이다. ‘자연자원 절용주의’(節用主義, conservationism)였다. 오늘날의 말로 번역한다면 ‘지속가능한 발전주의’가 될 것이다.
골드러시와 더불어 급성장한 샌프란시스코 시는 사막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늘 물 부족에 시달리는 도시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시 당국은 270km 떨어진 헤츠-헤치 계곡에 식수 댐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곡은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 있었고, 연방정부는 댐 건설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 시에 강한 지진이 발생했고, 이어서 도시 전역이 대규모 화재에 휩쓸린다. 불을 끌 물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다시 식수댐 건설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었고, 이번에는 연방정부도 허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뮤어 회장이 이끄는 시에라 클럽은 댐 건설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선도하였다. 그에 맞서서 댐 건설에 찬성하는 쪽에 논거를 제공해준 대표적인 인물로 지포드 핀쇼(Gifford Pinchot)를 꼽을 수 있다. 뮤어가 ‘국립공원의 아버지’로 불렸다면, 핀쇼는 ‘국유림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산림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대학을 마친 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산림사업에 뛰어들었다. 1898년에 농업성 산림사업국 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05년 미국의 모든 국유림을 관리하는 산림서비스청이 설립되었을 때 초대 청장으로 취임한다. 그때 핀쇼가 농업부 장관 이름으로 산림기사들에게 쓴 편지가 – 역사가들의 평가를 따르자면 - 새로운 생태운동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지속적인 번영을 위해서는 산림보호구역 자원의 영속성이 필수 불가결합니다. 이 자원을 절용하여 결코 그것의 영구적 가치와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 모든 산림보호구역 땅은 개인이나 기업의 일시적인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영구적인 공익을 위한 것입니다. … 상호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경우, 늘 모든 문제는 ‘장기적인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핀쇼의 사상에는 그의 산림관리 경험이 고스란히 배여 있었다. 산림사업은 야생산림을 야생 그대로 보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산림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거기서 인간에게 유용한 재료를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가 편지를 통하여 산림기사들에게 주문한 ‘유지-산출 관리원칙’(sustained-yield management principles)은 뒷날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헤츠-헤치 계곡 식수댐 건설을 둘러싸고 연방의회 청문회가 열렸을 때, 핀쇼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곧바로 이런 질문에 도달합니다. 이 계곡을 자연상태 그대로 둘 때의 혜택이 더 클까요, 아니면 그것을 샌프란시스코 시를 돕기 위해 이용할 때의 혜택이 더 클까요?”
1914년, 연방의회는 헤츠-헤치 계곡 식수댐 건설을 허용하는 쪽으로 결정하였다. 시에라 클럽과 보전파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 패배가 시에라 클럽을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클럽의 활동은 중단없이 이어졌고, 1916년에는 국립공원서비스청(NPS)을 설립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국립공원을 확장 및 신설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여, 오늘날 미국에는 62개의 국립공원이 존재한다. 1960대에 그랜드캐년 수력발전소 건설을 저지한 것은 시에라 클럽의 커다란 승리로 기록되었다.
5) 환경주의
“현대 환경운동이 시작된 날은 1962년 9월 27일이다.” 미국 클린턴 정부의 부통령을 역임한 정치가이면서 200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환경운동가인 엘 고어가 한 말이다.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이 이날 출간되었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 책은 1962년 여름 동안 주간지 <뉴요커>에 연재된 글을 묶은 것인데, 출간 전에 이미 4만 부가 선계약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10월에는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가을 동안에만 60만 부가 팔릴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침묵의 봄>은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두 가지 환경문제를 파헤쳤다. 하나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화학적 합성살충제 DDT가 자연 및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 국방부가 대대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낙진이 자연 및 인체에 끼치는 영향이었다. <침묵의 봄>은 널리 대중을 각성시켰으며, 생태운동 안에서는 이른바 ‘환경주의’(environmentalism) 흐름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된다. 다른 한편, 이 책은 심층 생태주의 흐름의 발원지가 되기도 했다. ‘심층 생태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네스(Arne Naess)는 <침묵의 봄>이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회고한다.
<침묵의 봄>보다 6개월 전에 출간되어 또 하나의 생태운동 흐름을 촉발한 책이 있었다. 노동자 출신 연구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 쓴 <우리의 합성적 환경>이었다. 이 책에서 북친은 생태 문제의 기원을 사회 문제에서 찾았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것은 실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와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북친은 19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심층 생태주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사회 문제를 외면한 채 자연생태계 문제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자칫하면 비(非)인간적 또는 반(反)인간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북친의 책은 카슨의 책만큼 널리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친의 주장은 점점 더 많은 지지자를 얻어나갔고,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ism)라고 불리는 새로운 생태운동 흐름을 창출하게 된다. 일찍부터 사회생태주의를 수용하여 그것을 노동조합운동의 현실에 맞추어 발전시키고자 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토니 마조치(Tony Mazzochi)가 있다. 뒤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마조치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을 처음 주창한 인물로 꼽힌다.
생태운동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이런저런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에라 클럽은 여전히 야생자연 보전주의 노선을 고수해나갔다. <침묵의 봄>조차 너무 비관주의에 빠져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클럽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전주의 운동은 때때로 패배당하기도 했으며, 때때로 오류에 빠지기도 했다. 오류의 사례로는 특히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대한 클럽의 대응을 꼽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최대의 전력 공급자였던 ‘태평양 가스‧전력 회사’(PG&E)는 1950년대 중반부터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을 추진해오고 있었다. 그들이 처음 선택한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불과 80km 떨어진 ‘보데가 만’(Bodega Bay)이었다. 시에라 클럽의 대다수 이사들은 이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자력 에너지를 청정에너지로 여겼다. 그뿐만 아니라 원자력발전소가 수력발전소보다 훨씬 좁은 면적을 차지하기 때문에, 야생자연을 보전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에라 클럽 안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과 오염을 우려하면서 그것에 반대하는 선각자들도 있었다. 때는 카슨의 <침묵의 봄>이 출간되던 무렵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시에라 클럽이 적극적으로 원전 반대 운동을 추동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실망하여 클럽을 탈퇴, ‘북 캘리포니아 연합’(NCA)이라는 원전 반대 운동단체를 결성한다. 이런 단체들의 반대운동에 막혀서 전력회사는 보데가 만에 원전을 건설하는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자 전력회사는 1963년, 보데가 만 인근에 있는 ‘니포모’(Nipomo) 사구(沙丘)를 원전 부지로 사들였다. 이때부터 시에라 클럽의 반대운동이 시작된다. 니포모 사구는 ‘야생 그대로’ 보전할 가치가 매우 큰 아름다운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뜻밖에 전력회사는 클럽의 일부 이사들과 비공식 면담을 주선하였고, 니포모 사구를 포기하는 대신 ‘디아블로 캐년’(Diablo Canyon)에 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전력회사의 유인작전이었다. 거기에 말려든 이사들이 그 대안을 수용하였고, 디아블로 캐년에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시에라 클럽 안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원전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과 분열은 실은 늙은 세대의 ‘야생자연주의’와 젊은 세대의 ‘환경주의’가 서로 충돌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에라 클럽은 원전에 대한 판단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뒤부터 원전 반대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969년 1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바바라 해저 원유 시추 시설이 폭발하여 주변 바다가 시커먼 원유로 오염된다. 그해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회의에 참석한 생태‧평화 활동가 존 맥코넬(John McConnell)은 ‘지구와 평화를 위한 날’을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의 제안은 우탄트(U Thant) 유엔 사무총장을 포함한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한편, 1970년 1월 28월에는 몇몇 환경운동가들이 ‘환경권리 선언문’을 선포하면서 원유 유출 1주년을 널리 환기시켰다. 같은 해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 시는 ‘지구와 평화를 위한 날’ 행진을 개최한다. 이어서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게이롤드 넬슨(Gaylord Nelson)이 동참하면서 캠페인 이름을 ‘지구의 날’로 바꾸고 전국적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지구의 날’ 캠페인에는 몇몇 비환경단체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컨대 전미자동차노조(UAW) 위원장 월트 루더(Walter Reuther)의 공적을 꼽을 수 있다. 우선 그는 개인적으로 2천 달러(2022년 환산 1만5천 달러)를 후원함으로써 1번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전미자동차노조가 조직적으로 참가하고 후원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노조는 후원금을 내는 한편, 전화를 제공하고, 모든 선전물을 인쇄하여 우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행사 당일에는 수많은 조합원들이 동참하도록 인도하였다. ‘지구의 날’ 집행책임자의 뒷날 회고를 따르자면, “전미자동차노조는 ‘제1차 지구의 날’ 캠페인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노조의 참여가 없었더라면 캠페인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첫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루더 위원장이 몸소 참가하면서 역동성과 범위가 완전히 변했다. 우리는 즉각 신뢰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1970년 4월 22일에 개최된 ‘지구의 날’ 행사에는 미국 곳곳에서 무려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회와 시위에 동참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단일 행사 참여 인원을 두고 본다면,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에 속하는 행사였다. 뉴욕 5번가에서는 자동차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센트럴파크에서 열리는 환경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에 성공한 ‘지구의 날’은 매년 4월 22일에 거듭되면서 지구 전체로 퍼져나가게 된다.
6) 직접행동주의
생태위기를 예방하거나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한 인간집단의 다른 인간집단에 대한 맞선 행동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야생자연 보전주의가 주로 선택한 행동방식은 여론을 형성하여 입법과 행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대중의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과 아웃도어 활동도 필요했다.
‘대중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새로운 행동방식을 개척하여 생태운동을 거리의 정치로 발전시킨 선구자로는 단연 ‘그린피스’(Green Peace)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핵무기 반대운동에서 시작되었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2차 세계대전이 조금 일찍 끝나도록 만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인류가 스스로 자폭‧자멸할 수도 있는 수단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강력한 핵무기를 독점함으로써 전후 세계질서에서 항구적 패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1949년에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이어서 1955년에는 미국보다 먼저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이로써 독점의 꿈은 깨지고, 동-서 핵무기개발 경쟁이 인류와 자연생태계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2차대전 기간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미국이 독일의 히틀러보다 먼저 핵폭탄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권고한 적이 있다. 핵폭탄 개발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지만 그는 죄책감을 느꼈고, 전쟁이 끝나자 반핵운동을 시작한다. 1955년, 아인슈타인은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함께 ‘반핵선언문’을 발표하였고, 10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여기에 동참하였다. 1958년, 퀘이커교 ‘비폭력행동 위원회’는 두 척의 배를 띄워 당시 미국이 핵폭탄 실험장으로 사용하고 있던 남태평양 비키니 섬으로 행진했다. 4년 뒤 카슨이 <침묵의 봄>을 세상에 내놓는다.
1965년부터 미국은 북태평양 알래스카 인근의 암치트카(Amchitka) 섬에서 지하 핵실험을 진행한다. 그리고 1971년의 제3차 실험은 역사상 최대규모의 지하 핵실험으로 기록된다. 핵실험 자재가 미국에서 캐나다 쪽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수천 명의 대중이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시위를 벌였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미국 정부는 앞으로도 다섯 차례 더 실험을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생태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시에라 클럽은 이런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미국 시에라 클럽을 본떠서 태어난 캐나다 시에라 클럽도 마찬가지였다. 암치트카 섬은 보전해야 할 만한 숭고한 아름다움이 없었다.
캐나다 시에라 클럽 서부지부 회원 중에 클럽의 무반응에 실망한 사람들이 있었다. 1958년 퀘이커교 반핵 해상시위를 기억하고 있던 그들은 1971년에 시에라 클럽을 탈퇴하면서, 돛배 한 척을 구한다. 그리고 9월 15일, 암치트카 섬으로 행진한다. 돛에는 ‘녹색 평화’(Green Peace)라는 이름이 펄럭였다.
그린피스의 스펙터클한 해상행진은 언론매체의 환영을 받았고, 이때부터 비폭력 직접행동주의는 풀뿌리 생태운동을 추동하는 두 바퀴 중 하나로 발전하게 된다. 다른 하나의 바퀴는, 뒤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조사연구자 집단의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오늘날 그린피스는 세계 각 지역에서 저마다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러 그린피스 조직들을 엮은 네트워크 조직이다. 네트워크는 55개국을 포괄하는 26개 지역조직으로 형성되어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제 그린피스’(GPI) 본부는 지역 그린피스들의 조정기관 역할을 맡고 있으며, 3척의 배를 보유하고 있다.
시에라 클럽의 활동 재원은 주로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되고 있지만, 기업 후원금을 받기도 한다. 2008년 세제회사 ‘콜로록스’(Clorox)의 제품에 클럽 로고를 팔아 130만 달러를 기부받은 적도 있고, 2012년에는 천연가스 업계로부터 후원금 260만 달러를 받기도 했다.
시에라 클럽과 달리 그린피스는 절대로 정부, 기업, 정당의 자금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현재 300만 명의 개인 후원자와 비영리재단 후원금으로 활동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2022년도 결산보고서를 따르면, 한 해 예산은 1억4백만 유로이다. 3,476명의 간부가 활동하고 있으며, 그중 429명은 상근간부이다. 그와 별도로 인도의 자매단체인 ‘인도 직접대화행동’(DDII)에 108명의 상근간부가 활동하고 있다.
평균 풀타임 상근인력 | 2022년 | 2021년 |
국제그린피스, 암스테르담 | 127 | 131 |
지역그린피스 | 206 | 175 |
선원 및 승무원 | 96 | 107 |
소계 | 429 | 413 |
인도 직접대화행동 | 108 | 117 |
총계 | 537 | 630 |
7) 정의로운 전환 운동
생태위기에 당면하여 그동안 노동운동이 줄곧 제출해온 대안은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노동운동과 생태운동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빠트릴 수 없는 일이다.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을 처음 정립한 사람은 ‘미국 석유화학원자력노조’(OCAW)의 토니 마조치(Tony Mazzochi)였다.
노동조합운동의 탁월한 활동가였던 마조치는 일찍부터 노동안전보건 및 환경오염 문제에 대하여 눈을 떤 선각자였다. 그는 지역지부에서 일하던 1960년대부터 환경운동과 밀접하게 교류했는데, 당시는 석유, 화학, 원자력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독성물질과 공해물질에 노출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관심은 여전히 고용과 임금에 쏠려 있었다.
뒷날 마조치는 ‘공장의 레이첼 카슨’이라는 애칭을 얻게 되는데, 실제로 그는 1962년에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은 뒤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침묵의 봄>에서 언급된 소량의 화학 물질이 그토록 큰 해를 끼친다면, 제조업 공장에서 다량의 화학 물질을 다루고 있는 노동자들은 분명 의료적 위험에 처해 있을 것이다.”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마조치는 지역 환경운동 단체들에게는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활동을 수행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노동조합 안에서는 환경운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촉구하였다.
이렇게 해서 적록동맹의 전형적인 사례들이 만들어진다. 그는 1970년 4월 22일 뉴욕에서 열린 제1회 ‘지구의 날’ 행사의 의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가 그동안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을 동맹하기 위해서 노력해온 업적을 환경운동 측에서도 매우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뒷날 마조치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서 과학자단체와 공중보건단체를 노동조합과 연결하여 현대적 노동안전보건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꼽았다. 앞서 언급한 ‘전환 운동 4수준 분류법’에 따라 분류하자면, 그의 업적은 관리적 개혁 수준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70년 제정된 미국 노동안전보건법(OSHA)도 실은 적록동맹의 결실이었다. 1965년, 산별노조 본부 시민권입법국 국장으로 임명된 마조치는 그 직책을 적극 활용하여 노동안전보건 의제를 단체협약, 연방법률 및 자치주법률로 실현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는 1969~70년에 미국의 여러 산별노조와 함께 수많은 공개회의를 개최하고, 과학자들의 협력을 끌어내고, 조합원들을 교육하고, 환경단체들의 동참을 촉진하고, 언론매체를 동원하고, 의원들에게 로비활동을 전개하는 일을 선도한다. 마침내 1970년 12월, 미국 연방의회는 ‘노동안전보건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을 반포하면서 닉슨 대통령은 특히 마조치의 리더십과 풀뿌리 조직화 노력이 이 법을 성공적으로 통과시킨 열쇠였다고 설명한다.
마조치는 성평등 문제에 있어서도 선각자였다. 1953년, 26세의 나이에 마조치는 ‘남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공약하면서 가스‧코커스·화학노조 제149지부 지부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몇 년 안에 그 공약을 단체협약으로 실현해냈다. 1970년대는 독성 화학 물질을 다루는 여성들에게 불임을 강요하는 기업들에 대하여 전국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 1982년, <Ms.> 잡지는 마조치를 ‘지난 10년 동안의 남성 영웅 4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다.
그의 말년 활동은 정치세력화에 집중되었다. 1980년대 내내 마조치는 노동자당 준비모임을 조직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96년, 미국 노동자당(LP)이 창당된다. 당은 9개 산별노조와 수백 개 지부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지지당원 수는 1백만 명이 넘었다.
이런 업적들 외에도 마조치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 개념을 정립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 미국 정부는 오염산업 구조조정 정책의 일환으로 ‘포괄적 환경 대응, 보상 및 책임법’(CERCLA)을 제정하고, 그에 필요한 ‘슈퍼펀드’(Superfund)를 설립하였다. 유해물질로 오염된 공장들을 폐쇄하고 공장부지를 정화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더라도,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마조치와 미국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안전보건과 오염산업 전환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투쟁은, 만약 성공하여 오염산업 공장들이 문을 닫는다면, 거기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모두의 건강과 환경보호’라는 보편적 정의를 위한 투쟁이 ‘당사자들의 일자리 상실’이라는 개별적 부정의를 파생하는 역설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마조치는 ‘노동자들을 위한 슈퍼펀드’(Superfund for Workers)를 설립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펀드는 노동자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여 자리 잡을 때까지 필요한 생활비와 직업교육비 등을 지급해야 했다.
“오염산업 기업들을 위한 슈퍼펀드는 존재하고 있다. 노동자들을 위해서도 슈퍼펀드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 필요한 에너지와 재료를 공급하기 위해서 매일 독성물질을 다루면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받을 자격이 있다.”
‘노동자를 위한 슈퍼펀드’는 설립되지 않았지만, 마조치가 제안한 개념은 뒤에 환경운동 활동가들에게 수용되어 ‘정의로운 전환’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조치가 처음 제안할 때는 관리적 개혁 수준에 해당하는 전환을 뜻했다. 그 뒤 개념의 적용 범위가 ‘오염산업 전환’에서 ‘탄소경제 전환’으로 확장된다. 구조적 개혁 수준에 해당되는 전환을 뜻하게 된 것이다. 2022년 IPCC는 ‘정의로운 전환’ 개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고탄소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에서 어떤 사람, 어떤 노동자, 어떤 장소, 어떤 부문, 어떤 국가, 어떤 지역도 낙오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원칙, 과정, 실무를 뜻한다.”
오늘날 ‘정의로운 전환’ 개념은 기후위기 대응책을 마련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구성요소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유엔과 국제기구, 그리고 대다수 국가 정부도 그것을 수용하고 있다. 2015년 파리 협정도 “기후위기 대응과정이 정의로운 전환으로 되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렇듯 ‘정의로운 전환’ 개념은 널리 수용되고 있지만,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개념은 추상적인 껍데기일 뿐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고 현실에서 관철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개념의 구상화’(具像化, operationalization)라고 한다. 그리고 늘 그렇듯,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정의로운 전환을 둘러싼 싸움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제도와 금액으로 전환하는 싸움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싸움의 향배가 장차 기후위기 대응의 성공과 실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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