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 4회차에 걸쳐 박장현 교육원 원장님의 「4차 산업혁명과 고용의 미래」를 연재합니다. 많은 내용을 적은 회차에 나누어 연재하게 되어 글이 상당히 깁니다. 여유로운 시간에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4차 산업혁명과 고용의 미래
- 프레이 대 서스킨드 논쟁 -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1. 들어가기 : 논쟁의 구도
두 개의 주장이 서로 맞부딪치고 있다. 한쪽에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이번에는 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어느 쪽이 옳을까?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
오늘날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논쟁의 중심에는 ‘일자리의 미래’가 놓여 있다. 한쪽에는 “인공지능 기술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일자리에서 밀어낼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쪽에는 “미래에도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주장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함께 어울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 기술 = 일자리 소멸”, 이 공식을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논쟁은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을 긍정하자면, 일자리의 미래를 부정해야 한다. 거꾸로, 일자리의 미래를 긍정하자면, 인공기능 기술을 부정해야 한다.
이런 판에 매우 돋보이는 토론자가 있다. 칼 베네딕트 프레이(Carl Benedikt Frey)다. 그가 돋보이는 이유는 기술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일자리의 앞날을 낙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공지능 기술 = 충분한 일자리”라는 새로운 공식을 제안하고 나섰다. 야심만만한 공식이다. 만약 그의 새로운 공식이 옳은 것으로 밝혀진다면, 일자리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든 걱정도 끝날 것이고, 요란했던 모든 논쟁도 끝날 것이다.
프레이는 자기 자신을 ‘정치경제학자’라고 소개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기술변화의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프레이는 고용문제 전문가이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이 고용의 미래에 미칠 영향을 연구한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동시에 논쟁의 중심에 섰다.
프레이는 우리를 두 번 놀라게 만들었다. 첫 번째는 2013년 간행된 <고용의 미래>라는 보고서의 충격이었다. 미국 노동시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 보고서에서 프레이는 현재의 직업들 중 47퍼센트가 10~20년 안에 자동화될 위험성이 크다고 예측하였다. 예컨대, 현재 고용규모가 가장 큰 직업은 소매판매원이며, 4백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10~20년이 지나면 4십만 명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47퍼센트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만간 인공지능에 의하여 일자리에서 밀려날 것이라니! <고용의 미래>는 인공지능 기술과 고용의 미래에 대한 전세계적인 논쟁에 불을 붙였다.
프레이가 우리를 두 번째 놀라게 만든 것은 2019년에 출판된 <테크놀로지의 덫>이 가져온 반전이었다. 이 책에서 프레이는 “미래에도 충분한 일자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기계가 인간을 일자리에서 밀어낼 것이라는 공포가 여러 차례 유행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기우로 드러났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얼핏 보면 <고용의 미래>에서 자신이 주장했던 내용을 스스로 뒤집는 것처럼 들렸다.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앞뒤 주장은 서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용의 미래>는 “47%의 직업이 자동화될 위험성이 크다”는 점이 아니라 실은 “나머지 53%의 직업은 자동화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보고서였던 셈이다. 처음부터 프레이는 낙관론자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프레이는 두 가지 논거를 사용하고 있다. 공학적 논거와 역사적 논거이다. <고용의 미래>가 주로 공학적 논거를 담고 있다면, <테크놀로지의 덫>은 주로 역사적 논거를 담고 있다.
또 한 사람의 돋보이는 토론자가 있다. 대니얼 서스킨드(Danial Susskind)다. 그가 돋보이는 이유는 프레이가 사용한 바로 그 두 가지 논거를 사용하여 프레이를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학적 논거와 역사적 논거이다. 프레이가 논거를 길어온 똑같은 샘에서 반박논거를 길어내어 그를 되받아치고 있는 것이다.
프레이가 <테크놀로지의 덫>(2019)을 내놓은 몇 달 뒤에 내놓은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2010)에서 서스킨드는 프레이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부터 맞받아친다. ‘47퍼센트’라는 수치는 근거 없는 엉터리 수치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X년 뒤에는 실직률이 Y퍼센트일 것이다” 같은 명쾌한 표현이 불안을 덜어 줄지는 몰라도, 이런 거침없는 예측은, 그 아래 깔린 근거가 제아무리 정교하다고 하더라도, 노동의 미래를 잘못 판단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
서스킨드를 따르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추세뿐이다. 그리고 그 추세를 근거로 삼아 미래를 예측할 때, 우리는 조만간 대규모 기술적 실업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다. 이런 뜻으로 서스킨드는 “이번에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서스킨드도 고용문제 전문가이다. 프레이를 ‘고용문제 전문가인 동시에 경제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서스킨드는 ‘고용문제 전문가인 동시에 인공지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법률가들의 업무를 자동화시키는 일에 종사하고 있던 아버지 덕택에 어린 시절부터 인공지능에 대하여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2015년에 <전문직의 미래>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나는 프레이의 주장과 논법이 낙관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고용문제 연구자들이 프레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으며, 프레이와 비슷한 논법으로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적 고용문제 연구자들 중에서도 프레이의 주장과 논법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른 한편, 나는 서스킨드의 주장도 매우 ‘전형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다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유행처럼 들릴 정도이다. 그러나 고용문제 전문가들 중에서 이렇게 당돌하게(?)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서스킨드는 프레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부터 두 사람의 견해를 비교해보기로 하자. 두 사람의 주장과 반론을 들으면서 그 속에서 우리의 앞길을 열어갈 연장을 찾아가보자. 먼저 두 사람의 역사적 논거를 비교해보고, 이어서 두 사람의 공학적 논거를 비교해보는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길을 나서기 전에 미리 불필요한 오해의 여지를 줄여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데서 생겨날 수 있는 오해이다. 프레이는 ‘3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있다. 그 대신 ‘1차 자동화물결’(또는 ‘컴퓨터혁명’)과 ‘차세대 자동화물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산업화의 역사를 몇 단계로 구분하느냐는 것이다. 프레이처럼 나도 산업화의 역사를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다만 시대 구분을 좀 더 선명하게 표시하기 위하여, 그리고 오늘날의 변화에 담겨 있는 의미를 좀 더 강조하기 위하여 ‘1~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2. 역사적 근거
2-1. 낙관론의 역사적 근거 : 기술의 두 가지 유형
2-1-1.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미래에도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프레이가 제시하고 있는 역사적 논거는 18~20세기 영국·미국 경제사 서술이다. 여기서 그는 ‘기술의 두 가지 유형’을 구분하면서 기술 변화와 고용 변화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다. ‘고용대체형 기술’과 ‘고용창출형 기술’이다. <테크놀로지의 덫>에서 프레이가 1차 산업혁명과 2차 산업혁명의 역사에 대하여 서술한 내용을 짤막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세기 후반기에 시작되어 19세기 전반기 동안 이어진 1차 산업혁명은 증기 동력으로 가동하는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섬유공장의 등장이 고용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 섬유제품들은 주로 수공업 숙련노동자들에 의해서 생산되고 있었다. 그들은 반농반공(半農半工),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베를 짜는 사람들이었다. 1차 산업혁명은 고용대체형 기술에 의하여 추동되었다. 대표적인 기술로는 증기동력 기술과 섬유기계 기술을 꼽을 수 있다. 섬유기계는 아동들도 작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구조로 제작되었다. 이런 기계가 투입되면서 남성 숙련 노동자들은 일자리에서 밀려났으며, 아동 및 여성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 결과 생산성은 향상되었지만, 임금은 오히려 하락하였다. 생산성 향상의 과실은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갔고, 노동자대중은 실업과 빈곤에 시달렸다.
그에 반하여 19세기 후반기에 시작되어 20세기 전반기 동안 이어진 2차 산업혁명은 주로 고용창출형 기술에 의하여 추동되었다. 대표적인 기술로는 전기 기술과 자동차 기술을 꼽을 수 있다. 전기 동력이 공장에 도입되면서부터 복잡한 기계들을 가동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기계들을 다루자면 남성 숙련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금도 상승되었다. 생산성 향상의 과실은 노동자대중에게도 널리 분배되었고, 그 결과 블루컬러 노동자들이 사회의 중산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프레이의 역사 서술을 따르자면, 1차 산업혁명 시기의 고용대체 현상을 2차 산업혁명 시기의 고용창출 현상으로 전환시킨 핵심적인 요인은 기술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19세기 말엽에 전기동력 기술이 등장하여 증기동력 기술을 밀어내면서 이런 전환이 가능해진 것이다.
1차 산업혁명 시대의 공장에는 중앙에 동력을 생산하는 증기기관이 있었다. 동력은 회전축, 피대바퀴, 피대를 통하여 여러 작업장의 기계들에게 전달되었다. 모든 공장은 이런 기술적 조건에 맞추어 설계되어야 했으며, 모든 기계는 중앙 동력기계의 리듬에 맞추어 돌아가야 했다. 그에 따라 증기기관 시대에는 복잡한 기계들이 개발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복잡한 기계를 다룰 숙련 노동자들도 필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규모가 크고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증기기관은 공장에나 설치될 수 있었지, 가정에는 도입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가사노동은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었으며, 여성들은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다.
그에 반하여 2차 산업혁명을 추동한 전기 기술은 개별 기계에게 직접 동력을 전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달리 말해서, 모든 기계가 저마다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생산성이 높은 다양하고 복잡한 기계들이 개발되어 공장에 투입되었다. 그런 기계들을 작동시킬 수 있는 숙련 기능공들의 일자리도 함께 늘어났다. 회전축, 피대바퀴, 피대를 걷어낸 자리에는 이동식 조립라인이 설치될 수 있었다. 전기 기술과 이동식 조립라인은 이른바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기 기술은 가정도 기계화시켰다. 다양한 가전기계가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켰고,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 노동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3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어떤 기술 변화가 고용 변화를 불러일으켰을? 기술의 영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로는 컴퓨터 기술이 등장과 발전을 꼽을 수 있다. 프레이는 이 변화를 ‘컴퓨터 혁명’이라고 부른다. 컴퓨터 기술은 ‘틀에 박힌 업무’를 자동화시킬 수 있었고, 그 결과 블루컬러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게 된다. 이것을 프레이는 ‘1차 자동화물결’이라고 부르고 있다.
20세기 중반기에 등장한 컴퓨터 기술은 고용대체형 기술에 속한다. 1980년대부터 컴퓨터 기술이 본격적으로 생산에 투입되면서 고숙련·고임금 일자리는 늘어났다. 그러나 컴퓨터 기술이 ‘틀에 박힌 업무’를 자동화시켜나갔고, 그에 따라 중간숙련 노동자들이 일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계를 작동시키면서 단순반복 작업을 수행해오던 남성 블루컬러 노동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그들은 저숙련·저임금 일자리로 밀려나거나, 실업자가 되었다. 이처럼 중산층이 몰락하는 동시에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이 팽창하면서 사회양극화가 심화되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기술의 영역 안에서 다시 한 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개발되어 생산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레이는 컴퓨터 기술에 이어서 인공지능 기술도 고용대체형 기술로 분류하고 있다. 컴퓨터가 ‘틀에 박힌 업무’를 자동화시킬 수 있었다면, 인공지능 기술은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까지 자동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는 인공지능 기술이 ‘차세대 자동화물결’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프레이는 인공지능 기술이 조만간 고용대체 현상을 고용창출 현상으로 전환시켜줄 것이라고 예상한다.
도대체 어떻게 고용대체형 기술이 고용창출 현상을 가져올 수 있을까? 프레이의 역사 서술을 따르자면, 1~3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고용대체형 기술이 고용대체 현상을, 고용창출형 기술이 고용창출 현상을 가져왔다. 그런데 왜 4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고용대체형 기술이 고용창출 현상을 가져온다는 것일까?
4차 산업혁명 시기에 대하여 프레이가 대답하는 방식은 1~3차 산업혁명 시기의 그것과 다르다. 1~3차 산업혁명 시기에 대해서는 ‘기술 변화 → 고용 변화 → 경제변화’라는 식의 대답을 내놓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기에 대해서는 ‘기술 변화 → 역사 반복 → 고용 변화’ 또는 ‘기술 변화 → 경제 변화 → 고용 변화’라는 식의 대답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우선 앞쪽의 대답을 요약해보자. 이것이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주장에 대한 역사적 논거이다.
21세기에 등장한 인공지능 기술도, 기술 측면을 두고 보자면, 고용대체형 기술에 속한다. 컴퓨터가 ‘첫 번째 자동화 물결’을 불러왔듯이, 인공지능은 ‘차세대 자동화 물결’을 불러오고 있다. 그에 따라 중간숙련 노동자층의 몰락과 사회양극화의 심화도 멈추지 않고 있다. 20세기 후반기에 컴퓨터 기술이 고용대체형 기술로 작동했듯이, 인공지능 기술도 지금까지는 고용대체형 기술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기술 발전 수준을 토대로 삼아 미국 노동시장의 변화를 예측해본다면, 현재 미국 노동시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직업의 47퍼센트가 2030년까지 자동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전에도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다. 기술이 고용대체 유형일 경우, 임금 인상이 생산성 향상보다 떨어질 수 있고, 일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것이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상황이며, 1차 산업혁명기에 벌어졌던 상황이기도 하다. 지금의 상황은 1차 산업혁명 시기의 상황과 매우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곧 역전될 것이다. 고용대체형 기술이 고용창출형 기술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 기술을 중심으로 한 신기술도 조만간 고용창출형 기술로 전환될 것이다.
2-1-2. 낙관론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의문
여기서 프레이를 향하여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 질문은 역사의 반복성에 대한 질문이다. 프레이 자신의 역사 서술을 읽어보더라도, 역사에서 고용대체형 기술이 고용창출형 기술로 전환된 사건은 단 한 차례 발생했을 뿐이다. 1차 산업혁명 시기를 추동한 증기동력 기술과 섬유기계 기술이 2차 산업혁명 시기를 추동한 전기 기술과 자동차 기술로 전환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아직 한 번도 되풀이된 적이 없다. 단 한 차례 발생했을 뿐인 사건을 근거로 삼아 “번번이 그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질문은 기술의 유형에 대한 질문이다. 프레이는 컴퓨터 기술을 고용대체형 기술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컴퓨터가 고용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실은 고용을 양극화시켰다는 사실이다. 프레이 자신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컴퓨터 기술을 ‘고용대체형’ 기술로 부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용양극화형’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미래의 고용을 예측할 때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2-2. 새로운 역사적 근거 : 자동화/양극화 추세
2-2-1. 새로운 역사적 현상 : 고용의 양극화
1980년대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고용 양극화 현상은 중간숙련 노동자층이 줄어드는 동시에 고숙련 노동자층과 저숙련 노동자층이 늘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양극화 현상은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고용 규모만 양극화된 것이 아니라 임금 수준도 양극화되었다. 남성 고숙련 노동자층의 실질임금은 빠르게 상승한 반면에 남성 중간숙련 및 저숙련 노동자층의 실질임금은 정체하거나 오히려 하락하였다. 그에 비하여 여성 중간숙련 및 저숙련 노동자층의 실질임금은 더디지만 꾸준히 상승되었다.
고용 양극화 현상은 21세기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현상들 중 하나이지만,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오늘날 고용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치고 이 현상을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프레이도 이 현상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양극화 현상을 가볍게 훑어본 뒤에 그것을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이라는 이론 틀에 우겨넣어버린다. “컴퓨터 기술은 1차 자동화물결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고용에 미친 영향을 두고 보자면, 1차 산업혁명 시기와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에 반하여 서스킨드는 고용 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고용 양극화 추세 속에서 고용의 미래를 가리키는 징후를 읽어내고 있다. ‘이번에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라는 것이다. 서스킨드는 추세론자이다. 그는 우리가 연구를 통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추세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미래에 대하여 예측하는 일은 추세 속에 담겨 있는 징후를 읽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용의 미래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재의 추세는 무엇일까? 그가 고용 양극화 현상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인 셈이다.
프레이와 마찬가지로 서스킨드도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이라는 분류법을 수용하고 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 분류법에 기대어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이 분류법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다.
왜 지난날, 그토록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떨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 진보가 대량 실업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답은 이렇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실제로 일어난 일을 되돌아볼 때, 어떤 업무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밀어냈다. 하지만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동화되지 않은 다른 업무에서는 인간을 보완했으므로, 그런 업무를 맡을 인력의 수요를 늘렸다. 기술과 노동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언제나 상반되는 두 힘이 작용해왔다. 노동자를 대체하는 해로운 힘과, 정반대로 노동자를 보완하는 유익한 힘이다.(35)
여기까지는 서스킨드와 프레이의 의견이 일치한다. 두 사람의 의견이 갈라서는 지점은 기술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분류법의 유효기간에 대한 판단이다. 서스킨드도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이라는 분류법이 과거 1~2차 산업혁명 시대의 역사적 변화를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컴퓨터 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프레이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그와 달리 서스킨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본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는 것이다. 그리고 틀린 분류법을 미래에 대해서도 계속 적용하려고 한다면 미래에 대한 예측도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번에는 다르다”면서, 최신 기술 때문에 대량해고가 정말로 코앞에 닥쳤다며 걱정하기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때마다, 거의 똑같이, 대량해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바로 이런 이유로, 앞으로 무슨 일어 일어날지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미래를 낙관한다. 지난날 노동의 미래를 걱정했던 것이 기우였다면, 오늘날 동일한 걱정을 하는 것도 분명 기우이지 않겠냐는 논리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단순한 쟁점이 아니다. “이번에는 다르다”는 걱정이 전에는 빗나갔더라도, 오늘날에는 맞을 수도 있다.(30)
고용 양극화 현상을 가져온 원인에 대해서도 프레이와 서스킨드 사이에는 의견 차이가 없다. 두 사람 모두 컴퓨터를 통한 자동화의 영향 때문에 고용 양극화 현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고용 양극화 현상의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는 지점에 이르면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된다. 프레이는 역사의 반복성을 주장한다. “1차 산업혁명 시기에 일어났던 일과 비슷한 일이 오늘날 컴퓨터 시대에 다시 한 번 되풀이되고 있다.” 그에 반하여 서스킨드는 고용양극화 현상을 새로운 수수께끼로 본다. 반복되는 역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최근에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1980년대부터 신기술이 저숙련 노동자와 고숙련 노동자에게는 모두 도움이 되었지만, 중간숙련 노동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현상이다. 여러 국가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양극단에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률은 늘었지만, 중간에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률은 줄어든 현상이 자주 눈에 띈다. 이 현상을 ‘양극화’ 또는 ‘공동화’라 부른다.(52-53)
프레이가 <테크놀로지의 덫>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이라는 분류법은 20세기 전반기까지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기까지 1차 산업혁명을 추동했던 증기기관 기술은 남성 숙련노동자들을 일자리에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아동과 여성으로 채움으로써 탈숙련화를 부채질했다. 그에 반하여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2차 산업혁명을 추동했던 전기 기술과 자동차 기술은 다시 남성 숙련노동자들에게 대규모로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숙련화를 부채질하였다.
그런데 20세기 후반기의 3차 산업혁명을 추동한 컴퓨터 기술의 영향은 1~2차 산업혁명 때처럼 단순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고숙련·고임금 일자리가 늘어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저숙련·저임금 일자리가 늘어났다. 그와 동시에 중간숙련·중간임금 일자리의 공동화가 진행되었다. 그 중심에는 이른다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있었다. 고용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블루컬러 중산층이 점차 몰락하였으며,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되었다. 20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이런 복잡한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이라는 분류법은 너무 두루뭉술하였다.
노동시장의 공동화는 새로운 수수께끼다. 20세기 후반기에 경제학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표준 모델은 이 수수께끼를 풀 능력이 없었다. 저숙련 노동자와 고숙련 노동자라는 두 집단에게만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에 왜 중간숙련 노동자가 저숙련 또는 고숙련 노동자와 전혀 다른 운명을 맞게 되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설명이 필요했다.(54)
그러나 프레이는 새로운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도 고숙련 노동자층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슬쩍 외면해버리고 이렇게 주장한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기는 1차 산업혁명 시기와 매우 비슷하다.” 여기서 프레이는 자신의 ‘역사 반복’ 공식을 고수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의 반쪽을 외면하고 있다. 1차 산업혁명 시기는, 프레이 자신이 사용한 용어를 다시 쓰자면, ‘전반적인 탈숙련화’ 시기였다. 그에 반하여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고용 양극화 시기는 ‘숙련 양극화’ 시기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는 1차 산업혁명 시기와 닮은 반쪽만 강조하고 있다.
고용 양극화 현상은 중간숙련 노동자층이 줄어들면서 고숙련 노동자층과 저숙련 노동자층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여기서 저숙련 노동자층이 늘어나고 있는 부분은 1차 산업혁명 시기와 닮은 점이 있다. 그러나 고숙련 노동자층이 늘어나고 있는 부분은 1차 산업혁명 시기와 전혀 닮은 점이 없다. 그러므로 양극화 현상은 오히려 프레이의 ‘역사 반복’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자료인 셈이다.
2-2-2. 새로운 설명 : 틀에 박힌 업무
왜 고용이 양극화 되고 있을까? 왜 고숙련 및 저숙련 일자리는 늘어나고 있는데, 중간숙련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을까?
프레이는 역사의 변화를 추적할 때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이라는 분류법을 사용하였다. 컴퓨터 혁명의 시대에 대해서도 프레이는 이 분류법을 적용하였다. 그의 질문을 이랬다. “컴퓨터 기술은 고용대체형 기술일까, 아니면 고용창출형 기술일까?” 프레이는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현실에 이론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 현실을 맞추려고 한다.
그에 반하여 서스킨드는 현실의 추세를 읽고 그 속에서 미래를 가리키는 징후를 찾아내려고 한다. 컴퓨터 시대에 대한 그의 질문은 이랬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추세는 무엇일까? 그 추세 속에서 고용의 미래에 대하여 어떤 징후를 읽어낼 수 있을까?”
서스킨드가 볼 때, ‘고용 양극화’라는 역사적 현실은 프레이가 채택한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이라는 분류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며 추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고용의 미래를 가리키는 중요한 징후가 담겨 있다.
새로운 현상에 대한 새로운 설명들 중에서 서스킨드는 ‘ALM 가설’을 선택한다. 2003년에 오터(Autor), 레비(Levy), 머네인(Murnane)이 함께 제출한 ALM 가설은 컴퓨터 시대의 기술-고용 관계를 새롭게 해명하기 위한 시도였다. ‘ALM’은 세 사람 이름의 머릿글자를 합친 이름이다. ALM 가설은 새롭게 대두된 자동화 기술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경제학자들을 지배해온 통념과 도구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LM 가설은 두 가지 깨달음을 토대로 세워졌다. 그 중 한 가지는 단순했다. ‘직업’(job)이라는 관점에서 노동시장을 보면 현실을 왜곡하게 된다는 점이다. 노동의 미래를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언론인과 의사, 교사와 간호사, 농부와 회계사 등등의 직업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기계에 의하여 밀려나는 일이 오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일자리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사자들이 노동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과 고용의 관계를 명확하게 따지려면 두루뭉술하게 직업 단위로 구분하여 살펴보지 말고, 직업을 구성하고 있는 업무들을 세밀하게 구분하여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봐야 한다.
다른 한 가지는 깨달음은 도달하기가 더 어려웠다. 인간이 어떤 업무를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교육 수준, 즉 ‘숙련’ 수준은 그 업무의 기계화 가능성을 알려주는 정확한 지표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점이 더 명확해졌다. 알고 보니 교육 수준보다 더 중요한 지표는 그 업무가 ‘틀에 박힌’(routine) 업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ALM 가설은 이 두 가지 생각을 하나로 묶어서 이렇게 주장한다. 숙련 수준과 상관없이 기계는 ‘틀에 박힌’ 업무는 손쉽게 수행할 수 있지만,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는 수행하기 어렵다.
이 독창적인 주장을 적용해보면 ‘노동 숙련도별 고용률 변화 (1995~2015년)’에 나타나 있는 이상한 흐름을 설명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이 각종 일자리를 업무 단위로 쪼개보았더니, 중간임금 노동자가 수행하는 직무에는 ‘틀에 박힌’ 업무가 많았다. 저임금 노동자와 고임금 노동자의 직무는 그렇지 않았다.(55-56)
ALM 가설은 ‘고용대체형 기술 대 고용창출형 기술’이라는 이분법이 너무 두루뭉술해서 고용양극화 현상을 해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실제로 컴퓨터 기술은 고용을 대체하는 동시에 창출하였다. 중간숙련 일자리를 대체하는 동시에 고숙련 및 저숙련 일자리를 창출했던 것이다. 중간숙련 일자리가 대체된 이유는 틀에 박힌 업무가 주로 중간숙련 일자리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동화 기술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추적하자면 기술이 직업(또는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업무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와 한다. 그러자면 우선 지금까지 고용의 변화를 직업(일자리) 단위로 살펴봐온 통념을 수정해야 한다. 우선 직업과 업무를 선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동화 기술이 업무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개발해야 한다.
기술 진보는 일자리를 통째로 없애지 않는다. 그 이유는 ALM 가설이 ‘일자리’와 ‘업무’를 구분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미래에 통째로 자동화될 수 있는 단일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자리는 하나도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자리는 저마다 여러 개의 업무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어떤 업무가 다른 업무보다 좀 더 자동화되기 쉬울 뿐이다. 중요한 변화는 직업 수준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업무 수준에서 더 깊이 일어난다.(59-60)
요약해보자. 프레이와 서스킨드의 역사적 논거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은 고용 양극화 현상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해석하는 지점이다. 두 사람 모두 자동화 기술이 오늘날의 고용 양극화 현상을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자동화 기술이 미래의 고용에 대하여 미치게 될 영향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프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고용 양극화 현상은 1차 산업혁명 시기의 고용대체 현상과 매우 비슷하다. 우리는 당시의 고용대체 현상이 2차 산업혁명 시기의 고용창출 현상으로 전환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에 맞서서 서스킨드는 이렇게 말한다. “고용양극화 현상은 1~2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현상이다. 이 새로운 추세 속에서 고용의 미래를 가리키는 징후를 찾아보니 ‘이번에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를 판정하자면 두 사람의 공학적 논거를 마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전에 먼저 두 사람의 경제학적 논거를 비교해보자. [다음 호에 계속-편집자주]
'이전 > 읽을꺼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을꺼리] 좌충우돌 수영이 아빠 되기_ (9) 젠장! (0) | 2020.09.21 |
---|---|
[읽을꺼리] 늦깍이 노조 상근자로 살아가기_ (7) 우여곡절 (0) | 2020.09.21 |
[읽을꺼리] 좌충우돌 수영이 아빠 되기_ (8) 뜨거운 동지애 (0) | 2020.08.10 |
[읽을꺼리] 늦깍이 노조 상근자로 살아가기_ (6) 또다시 앞으로! (0) | 2020.08.10 |
[읽을꺼리] 좌충우돌 수영이 아빠 되기_ (7) 이사를 했다 (0) | 2020.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