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편집자주] |
사회적 재난으로 번지는 전세사기·깡통전세
이원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
연이은 부고와 사회적 재난 경계령
지난 2월 28일 인천 미추홀구의 한 빌라에서 30대 남성 세입자 A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소위 2800여 채 주택을 소유한 건축왕으로 불린 전세사기꾼에게 당했다. 보증금 7천만원을 돌려받지 못한 채 경매가 진행되는 집에서 “나라는 제대로 된 대책도 없고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4월 14일, 역시 같은 지역의 세입자인 20대 남성 세입자 B도 스스로 삶을 등졌다. 20대 나이에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해 모은 돈과 대출을 조금 낀 전세보증금 9천만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스스로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전세방을 구했을 때 "경재적으로 독립해 너무 기뻤다"라던 그였다. 하지만 그에게 기쁨이 되었던 전셋집이 절망이 되었다.
4월 17일, 연이은 비보가 날아왔다. 같은 미추홀구의 30대 여성 세입자 C씨가 전세보증금 9천만원을 사기당해 삶을 마감했다. 새벽에 일을 나가 밤늦게 퇴근하던 그녀에게, 국가와 사회가 마지막으로 보낸 건 희망의 메시기가 아니었다. “수도요금이 체납입니다. 120번 확인 후 납부하세요. 미납 시 단수합니다”라는 상수도 요금 독촉장이었다.
지난 5월 8일, 네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소위 서울의 빌라왕이라 불린 전세사기꾼의 피해자인, 서울 양천구의 30대 여성 세입자였다. 그녀의 사망 원인은 부검 소견상 뇌출혈이라고 한다. 경매와 소송, 2억원이 넘는 전세보증금 대출의 만기를 앞두고 괴로워하며 밤낮으로 일을 하다 건강을 해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잇따르는 죽음은 우리 사회에 재난 경보를 울리고 있다. 더는 방치하면 안된다며, 이 선을 넘으면 재난이 참사로 번진다는 경고의 경계령이다. 그들의 소리 없는 죽음이 강렬한 사회적 재난의 경보를 울리고 있는데, 우리는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일까?
‘전세사기’로만 규정해선 안 된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로 인한 세입자들의 고통이 안타까운 죽음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 인천, 부천, 동탄, 구리, 대전, 세종, 부산, 울산, 제주 등 전국에서 대규모 피해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피해가구 규모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덩이처럼 피해자가 불어나는 가운데, 현행 제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땜질식 미봉책으로 일관하며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던 정부와 여당이, 문제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입장을 선회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가 제시하는 해결책을 특정 사기 집단이 벌인 대규모 전세사기 문제로만 국한하고 있다. 정부는 피해자 요건에서 ‘수사 개시 등 전세사기 의도가 있다고 판달 될 경우’,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 등 6가지 요건을 제시하면, 해당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세입자만 피해자로 규정하려 하고 있다. 피해자 구제법이 아닌 피해자 골라내는 선별법으로 지원대상을 최소화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세입자 보증금 미반환 문제는 전세사기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직적인 전세사기처럼 기망행위 등 사기죄가 성립되는 경우 외에도, 집값 하락에 따라 지급불능으로 경매나 압류 처분이 발생하거나, 전셋값의 하락으로 임대인이 다음 세입자의 보증금만으로 이사 시점에 보증금을 제때 돌려주지 못하는 등의 위험 상황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매매가보다 낮은 전세가로 계약했어도 매매가가 이보다 높은 비율로 하락하면 보증금 미반환 위험이 큰 깡통전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 전국 전체 주택의 전세가율은 2020년 65.1%에서 2022년 5월 87.5%로 매우 증가했고, 전국 아파트의 전세가율은 2022년 5월 이미 100%를 초과했다. 계약 종료 때 세입자가 보증금을 회수하기 어려운 ‘깡통전세’가 증가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깡통전세 문제는 일단 발생하면 해결이 어렵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정부의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데, 정부는 보증금 미반환 위험 전세(깡통전세)가 증가하는 구조적 문제를 방치한 채 ‘전세사기’로 규정하는 사법적 대응에 초점을 뒀고, 이후 이어지는 대책도 대응이 늦고 실효성이 부족했다.
제대로 된 특별법 조속히 제정해야!
뒤늦은 특별법 논의에서도, 정부는 보증금 일부라도 회수할 수 있는 선 구제 방안인 ‘전세보증금 채권 공공매입’방안 도입을 반대하고 있다. 사태 해결에 책임 있는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사기 피해를 국가가 떠안는 것은 사기 범죄를 국가가 조장”하는 것이라는 말로 왜곡하고 있다. 보증금 채권매입은 단순히 사기 피해금을 국가가 떠안으라는 것이 아니다. 사기 여부를 떠나 피해세입자들의 보증금은 반환채권 방식으로 존재한다. 세입자들이 반환채권에 대한 권리행사를 개별적으로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고통이 따르고 집단적 피해에 대한 집단적 권리행사가 어려우므로 국가가 그 역할을 대신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채권을 정당한 가격에 매입해 피해 금액의 일부를 선지원하고, 집단적 권리구제를 대행할 수 있다. 이는 혈세 낭비가 아니라 고통을 나누는 일이며, 2~3년의 기간 후 집단 환가 절차를 통해 다시 회수할 수 있다. 특히, 채권매입을 통해 피해세입자의 우선매수권을 위임받은 정부가 경매를 통해 피해 주택을 저렴하게 공공매입해 공공주택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회수가 가능한 방안이다.
공공기관인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이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매입하고 있다. 캠코는 금융기관의 부동산 PF 부실채권 매입을 위해 올해 1조를, 2027년까지 4조를 조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채권매입 전문 공공기관을 통해 피해자들의 보증금 반환채권을 매입하는 것 역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투기 조장에 가담한 은행들의 부실채권은 매입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채권매입 방안을 혈세 낭비라며 거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대출 중심의 정책이 아닌, 주거권을
하루빨리 피해세입자를 구제하는 제대로 된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근본적인 예방대책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깡통전세 문제 대응을 위해서는 우선 전세가율을 낮추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금융권 대출 시 주택 담보인정비율(LTV)은 70%로 규제하면서 세입자의 보증금을 임대인에게 빌려주는 전세에 대한 규제가 전혀 없는 현행 제도는 세입자의 주거안정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임차 가구가 보증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증금을 주택가격의 70% 이하로만 책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임차보증금이 갭투기 등에 악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금융규제도 중요하다. 임차보증금도 임대인이 상환해야 할 부채이다. 이에 임대주택 소유자에 적용하는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에 임차 가구의 보증금을 산입해 자기자본 없이 과도한 레버리지를 활용하는 갭투기를 규제하고, 전세자금대출 차주에 대해서도 DSR을 적용해야 한다.
전세제도는 임대인이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아파트 투기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무이자 사금융제도로 활용되며 확대되어왔다. 과도한 전세가율로 인한 세입자 고통이 증가하고, 전세사기와 깡통전세라는 위험이 상존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전세제도의 역설과 마주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출 중심의 주거 정책이 아니라, 권리 중심의 정책, 즉 세입자 주거권 확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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