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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정치의 시선

[기후정치의 시선] 글로벌 기후운동은 지역 정치운동과 어떻게 연결되나?

김상철 위원장님의 기후정치의 시선 입니다. [편집자주]

 

글로벌 기후운동은 지역 정치운동과 어떻게 연결되나?

 

김상철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위원회 위원장

 

기후위기는 행성적 현상이다. 기후라는 공동자원의 경계는 국경이 아니라 대기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후위기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위협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래서 현재의 기후위기를 인류세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한 기후위기의 원인이 모든 인류의 책임이 아니라 계급 간의 다른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본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행정적 관점에서든 지질대의 관점에서든 기후위기의 문제가 기존의 어떤 위기보다 더욱 규모나 범위의 측면에서 전면적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전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면적 공동행동이 가능한가의 문제다. 인류세냐 자본세냐를 둘러싼 갈등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논점 중 하나는 원인분석의 정확성이 곧 문제해결의 타당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책임과 해결의 구조적 불일치에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동네 우물이 오염된 상황을 떠올려 보면 된다. 조사를 통해서 우물을 오염시킨 사람을 찾아내어 책임을 묻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책임을 부여한다고 바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물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빠르게 우물이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누구라도 우물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문제가 해결된다. 결국 책임을 져야 하는 자는 구조적으로 무임승차를 하는 것이 유리한 위치에 놓인다. 더구나 얌체처럼 이미 우물물을 길어다가 저장하고 있다면 더더욱 문제는 복잡해진다. 

 

 

선진국에 책임 묻기 VS 모든 국가에게 책임 묻기

 

기후위기를 둘러싼 국제협력 과정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올해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리는 COP29(한국어론 콥29라고 부른다)는 기후위기에 대한 국제협력이 29년째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COP은 당사국 회의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당사국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에 참여한 국가들을 의미한다. 즉 COP은 기본적으로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회의로, 1992년에 맺어진 역사적인 브라질 리우에서의 합의 이후 1995년부터 COP 1차 회의를 시작으로 매년 시행하고 있다. 그리고 세번째 당사국회의에서 선진국들의 배출량 목표의 감축을 시행하기로 하고 국가별로 배출 책임에 비례한 감축 한도를 할당한다. 이미 1992년에 OECD를 비롯하여 유럽경제공동체 등 배출 책임이 큰 국가들에게 200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 규모를 1990년 기준으로 안정화하는 것을 권고했지만 구체적인 이행 약속으로 확정된 것은 교토의정서가 채택된 COP3에서 였다. 이 때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6가지 온실가스 종류를 특정하고 1992년에 온실가스 감축 책임이 있다고 권고한 국가들이 2008년에서 2012년 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수준 대비 평균 5.2% 감축하는의무를 부과했다. 권고에서 의무로 변경된 순간이다. 그런데 애당초 탄소악당국가인 미국이 교통의정서에 참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당초 힘이 빠진 상태로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이 다가오자 그 다음의 체제를 잘 만들어보자며 논의를 진행한다. 2007년 발리에서 모인 당사국들은 2009냔까지 교통의정서를 대체할 수 있는 협약을 만들자고 했지만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갈등 그리고 이 둘의 갈등을 이용한 미국 등의 태도에 의해 불발된다. 겨우 기존 교토의정서의 약속을 2020년까지 연장하자는 정도로 합의했다. 이 상황에서 2015년 익숙한 파리협정이 맺어진다. COP21로 부르는 회의니 최초의 기후변화협정 이후 21년이 지나서야 협약이 갱신된 것이다.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55% 이상에 해당하는 주요 선진국 55개 국가가 비준을 하면서 2016년에 공식 발효되었다. 기존 체제와 가장 큰 차이는, 교통의정서의 경우 선진국의 책임을 우선하면서 이들 국가에 대한 의무를 우선적으로 부과했다면 파리협정의 경우에는 모든 국가가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을 1.5도씨 이하로 제한하는데 모든 국가가 스스로 계획을 제출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즉 기존 교통의정서 체제에선 하향식으로 구체적인 감축량을 할당했지만 파리협정에 와서는 각 국가가 1.5도씨 목표에 맞춰서 각자의 감축계획을 제출하도록 했다.

 

그런데 스스로 계획을 잘 세우겠나? 결국 각 국가가 제출하는 국가감축목표를 평가해서 부족한 계획에 대해 보완하도록 하는 절차로 보완된다. 이게 우리에게 익숙한 현재의 기후위기 국제협력의 상황이다. 하지만 현재 국가별로 제출된 감축계획은 감축목표로도, 그리고 제출된 정책이나 사업의 수준에서도 모두 미달이다. 실제로 각 국가의 제출자료를 바탕으로 파리협정 상의 감축목표 달성여부를 진단한 자료에 따르면 거의 없다. 그나마 목표 달성에 근접한 국가들만 몇 개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국가는 제출한 계획대로 하면 1.5도씨 목표 달성은 실패한다. 

 

독립적인 국제기구인 기후행동트랙커가 각 국의 감축목표와 국내 계획 등을 검토하여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시점에서 각 국가에 할당된 1.5도씨의 목표를 달성할 나라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기후체제를 일상화하다

 

2018년 제24차 당사국총회는 기후위기를 대응하기 위한 국제체제에서 매우 중요한 해로 꼽힌다. 스웨덴 의회 앞에서 등교 거부를 하면서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한 크레타 툰베리가 참석했던 때다. 그이는 “당신들은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음으로써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각 국가 간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고도의 공학적 사고 넘어 아주 구체적이고 평범한 시민들이 기후위기의 당사자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곧 가라앉을 섬나라의 이야기이거나 기후재난이 닥친 특정한 기후현상에 주목해왔다. 이런 재난-중심의 관심은 높은 기후위기가 가지는 위험성을 확산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기후위기에서 발생하는 재난이 특수한 이상현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일상적이고 평범한 현상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 이를 테면 산업재해의 문제를 구체적인 인명사고 중심으로 다루는 경향을 생각해보자. 사람이 떨어져서 죽고 갇혀서 죽고 다쳐서 죽는 일은 ‘얼마나 산업 재해가 끔찍한 재난인지’를 보여주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모은다. 당연히 이 문제는 해결해야 돼, 라는 변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하나일 뿐, 나에게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앞선 것이 되기 힘들다. 도덕적일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재난을 중심으로 하는 접근은 ‘그래도 우리는 저 정도 상황은 아니니까’라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래야 마음이 안심되고 내가 다른 선택을 우선하는 것에 스스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소위 자기합리화라는 심리적 기제다.

 

어디서는 사람이 떨어지고, 다쳐서 죽고 있는 상황을 ‘산업 재해’의 대표적 표상으로 여기면, 매일 매일 안전수칙을 조금씩 어기고 ‘실내에선 안전모 안써도 된다’는 경험칙이나 ‘그래도 다른 곳보단 덜 덥지 않냐’며 작업을 종용하는 일들은 애써 산업재해로 문제삼기 어려워진다. 일단 ‘별 것도 아닌 일’이 되거나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거나 나아가 ‘ 밖에서 저렇게 큰 문제가 생겼는데 고작 자기 사업장 개선하겠다고 그 문제를 가져다 이야기하는 거냐?’와 같은 질문이 나온다. 이런 방식은 사실 문제 현상에서 극단적인 사례에 주목함으로써 실행가능하고 더 시급하게 해야 하는 문제를 사소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작 방법이다. 알버트 허쉬만이라는 학자가 보수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기득권을 유지하는가를 분석한 내용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18년 이전까지 기후위기 문제는 특정한 곳이나 부문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 학생의 등교거부로 인해 일상화되었다. 이렇게 일상화된 기후위기 대응은 곧 기존의 국가간 책임을 묻는 국제기후정치를 필요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달성되기는 커녕 국가 간의 뒷거래가 횡행하는 현재 기후위기협력 체제를 바꾸기 위한  트리거가 된다. 실제로 국제 정치의 특수성으로서, 누가 강제하고 지키지 않을 경우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라는, 민주적 권위 체제의 부재라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기후위기의 일상화에 있다. 

 

 

국가의 책임 묻기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은 결국 각 국가마다 구성된 정부의 의지로 표명된다. 그리고 최소한 민주주의적 절차를 따르는 국가라면 정부는 임기를 가진 선출된 자로 구성된다. 이들에 대한 책임은 정치적 책임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국제정치가 국내정치와 연결된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한 시기의 정부 구성형태가 해당 시기 국가 공동체 내의 시민들이 가진 공동체적 상상력의 평균치다. 즉 선거는 가장 뛰어난 자들이 더 뛰어난 자를 뽑는 과정이 아니다. 우리들 중 가장 비슷하거나 닮고 싶은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고 즉, 자신에 대한 외부화된 상이 바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밖에서 보면 성범죄자에다가 국회 빌런에 불과한 권성동 같은 이들이 강릉에서 5선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하게 바라봐야 현실정치의 정치적 책임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겐 빌런이지만 지역 차원에선 존재감있는 강릉지역 출신 정치인이고 보수여당의 중진으로서 중앙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라는, 그야말로 전국화하고자 하는 지역 주민들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대구의 홍준표가 자랑스럽겠나? 하지만 ‘우리가 언제 대선급 지역 정치인이 있었나’하는 순간 현재를 위한 사회적 악세사리로서 의미를 가진다.

 

한국의 기후위기 대응 목표가 과소한 것은 그것을 후순휘로 여기는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는 리더쉽에 의해 미랠르 선취하는 낭만적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히려 지금과 같은 반동적 시기에는 급진적 유권자가 그저그런 정치인을 견인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오는 11월에 열리는 29번째 당사국총회와 비슷한 시기에 브라질에서 열리는 G20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난 10월 29일 기후위기비상행동을 비롯해서 87개 단체와 436명의 개인들이 “COP29 대응 아시아시민사회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주요 선진국에 대해 글로벌 남반부에 대한 부채탕감을 요구했다. 또한 국제 무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 문제에 국제과세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마지막으로 선주민과 지역 사회를 직접 지원하는 비시장적 접근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각각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단 한번도 우리의 정치적 식탁에 오른 적이 없다. 지방의원은 고사하고 국회의원을 뽑는 과정에서 남북 문제가 아닌 국제 문제가 주요한 의제가 된 바가 있었던가? 아주 손쉽게 전세계의 상황에 접근할 수 있는 세상에서 오히려 우리는 국가로, 한 지역으로 좁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가 수준의 약속을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국제적 규범이 아니라 결국 국내정치적 책임이다. 기후위기의 일상화는 국제적 문제에 대한 로컬의 국제적 연대라는 다소 낯선 개념이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의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건은 우리가 국제적, 나아가 행성적 사고를 일상 정치 과정에서 담을 수 있는가 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