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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만 바꾸는 변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연루된 이해관계’라는 관점
김상철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위원회 위원장
12월 3일 윤석열에 의한 내란시도는 극심한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 저강도 내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를테면, 대통령의 직무정지에 의한 대행체제는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에게 기능적으로 부여된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만 적극적인 정무적 판단으로 특정 헌법재판관 후보를 선택함으로써 편향성을 드러낸다. 공수처의 체포시도에 대해 대통령실 경호처의 행위는 법원의 체포영장에 반하는 경호를 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자의 사병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었다. 윤석열이 관저 앞에 모인 극우 세력에게 ‘추운 날 고생한다’며 ‘유튜브를 통해서 지켜보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순간, 그들의 정치 권력이 고작 한 줌의 지지자들을 위한 것임에 분명히 드러났다. 이렇게 확실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기다려야 하고, 공수처를 비롯한 국가 수사기관의 내란 감당자에 대한 수사를 기다려야 하며 또한 그들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재판을 열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광장의 시민들에겐 확신범이 소위 법치주의의 제도 상으로는 모호한 것이 되어버리는 기묘한 상황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양성의 등장, 하지만
이번 광장 정국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말은 응원봉과 2030 여성들의 등장으로 확산된 ‘다양성’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과거의 온통 진지했던 광장이 다양한 춤과 음악으로 채워졌다. 시민발언대는 세상에서 시작해서 세상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시작해 세상으로 끝나는 이야기로 채워졌다. 남태령의 농민들이,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이 광장의 품으로 함께 하고 새로운 마주침의 놀라움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광화문의 시민들이 윤석열의 관저가 있는 한남동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어쩔 수 없이) 목소리들은 다시 납작해지고 있으며 어쩌면 윤석열과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득권 세력이 바라는 방식으로 바뀐다. 사실 기득권 세력이 기득권인 이유는 늘 우세해서가 아니라 ‘규칙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역사적으로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수파로 전락하더라도 규칙을 정립하여 다수파의 전횡을 막을 수 있다면 기득권 체계는 공공하다고 할 수 있다. 탄핵 국면은 역설적으로 현 체제의 기득권 구조를 투명하게 재현한다. 그런 점에서 다양성의 국면으로 이야기되는 현재의 상태가 다시 어떤 상황인가를 제대로 들여다 보는 것은 단지 지금의 한계를 짚어보자는 수준의 한가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끝내 기득권 구조에 다다들 수 있는 저항의 전략을 생각해보는 출발점이다.
정례적인 광장 외에도 다양한 광장들이 사전 행사라는 형식으로 결합된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학살이나 다양한 페미니즘 이유들 그리고 기후정의에 관한 이야기들이 광장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본 행사에도 시민발언대라는 형식으로 대학생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보이지 않도록 관리되었던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탄핵 국면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단지 대통령 1인에 대한 탄핵에서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되바뀌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대통령이 탄핵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법치주의의 제도적 형식으로 되돌아 온다. 12월을 지나 1월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즉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소한의 요구가 점차 광장의 최대주의적 요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연루된 이해관계의 문제
이런 현상이 광장의 힘이 부족해서, 혹은 우리의 이야기가 단순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누군가 강력한 기득권이 한걸음 더 나가는 이야기를 막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광장이 체제의 전환이라는 문제에서 불거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수용하는 수준에서 ‘시차’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후운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원전’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 정책 중 하나다. 특히 여전히 상용화에 의문인 소규모원자력발전에 대한 재정투자는 엄청난 예산낭비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윤석열에 대한 탄핵 사유 어디에서도 원전 문제가 다뤄지지 않는다. 이는 원전 문제가 윤석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고 또한 기존의 에너지 전환에 있어서 가장 퇴행적인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문제시’하는 것에 이르지 못한 탓이겠다. 신공항 문제나 국립공원 케이블카 문제와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도 마찬가지다. 광장의 무대에서 이야기는 되지만 그것이 윤석열 정부의 탄핵과 함께 문제시된다고 보긴 힘들다. 여기에 광장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차별금지법의 문제는 더더욱 광장의 색깔을 드러내지만 실질에는 속하지 못하는 가장 구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연루된 이해관계라는 것이 한가지 열쇳말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사람의 이해관계는 하나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지지도 않고 또한 복수의 이해관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동일한 우선순위의 기준에 의해 서열화되는 것도 아니다. 이에 따르면 윤석열의 퇴진이 ‘아저씨’에게도 ‘2030 여성’들에게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아저씨들의 가부장제와 2030 여성들의 평등보다 앞선다고 보긴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현재의 광장은 당장의 최우선순위가 일치하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선순위의 일부가 일치하기 때문에 같이할 뿐 원래 함께 하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둘 다 ‘윤석열의 퇴진’이 각자의 최우선순위 가치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목적의 공통성이 아니라 수단의 공통성이 있을 뿐이라는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전 세력임에도 광장에 있을 수 있고, 신공항 찬성자들도 광장에 있을 수 있으며 설사 광장에서 반원전 이야기를 듣고 신공항 반대 이야기를 듣더라도 ‘윤석열 퇴진’이라는 스스로의 최대 이익을 위한 수단만 확보될 수 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갈등적 이해관계 드러내기
그렇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건 각각이 생각하는 윤석열 퇴진 이후의 가장 중요한 성취에 대한 상을 두고 갈등하는 것이다. 더 직접적으로는 광장의 정치적 결과에 대한 구체적인 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개헌이어도 좋고 몇가지 법률 패키지에 대한 논의여도 좋고 탄핵 이후의 다양한 사회개혁 과제에 논쟁이어도 좋다. 4월에 앞둔 보궐선거에 대한 정치 기획이어도 조기 대선에 대한 정치적 연대의 기본 조건이라는 얄팍한 정치적 거래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광장에서 드러나는 ‘순진해 보이는 척하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각자 탄핵이라는 수단으로 기대하는 가치의 우선순위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체제라는 것이 단순히 소수의 기득권이 강제를 통해서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해버리면 안된다. 소위 99 대 1이라는 담론의 가장 큰 한계는 마치 99가 순수하고 선량한 상태에 놓인 피해자라는 인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사회에서의 99는 오히려 매우 복합적인 상태에 놓인 집합이다. 경제적으로는 약자이지만 사회적이거나 사적인 공간에서는 가해자일 수 있고, 경제적으론 진보적이지만 환경적으로는 보수적일 수 있다. 하나의 가설로 현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로 ‘다수가 현재의 체제를 원하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해보자. 결국 윤석열의 존재가 다수의 시민들이 가진 가치의 우선순위를 달성하는데 방해가 되니 거리에 나섰을 뿐, 그 존재가 사라지면 다시 제 자리에서 기존의 우선순위를 유지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는 상황을 그려보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기존 체계에 연루된 이해관계를 재조정하는 것은 광장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광장 이후에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적용되는 가치체계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한다. 즉 광장이 아니라 집과 회사 그리고 학교에서 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탄핵 국면이 하나의 극처럼 기승전결을 가진 최종장으로 가는 연속적인 사태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탄핵 국면이 그 자체로 ‘기’에서 멈춰버리는 밋밋한 드라마로 귀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탄핵이라는 ‘기’를 승으로 이끌고 전과 결로 이끄는 힘이다. 과연 그와 같은 힘을 고민하고 담보해야 하는 세력은 누구여야 할까. 적어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노동조합을 비롯한 운동 세력의 구체적인 기획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광장의 다양성이 기획의 무용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귀결은 광장을 둘러싼 사회적 힘의 재생으로 끝날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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