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던 기후소송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번 호 <기후정치의 시선> 주제는 해당 소송 내용과 관련된 글입니다. [편집자주] |
지극히 한국적인 기후소송, 헌법재판소에 속지 않으려면
김상철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위원회 위원장
지난 8월 29일 헌법재판소는 수년간 끌어왔던 기후소송을 마무리했다. 현재 탄소중립법 시행령은 2030년까지 40%의 감축목표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헌법재판소는 2030년부터 2050년까지의 감축목표를 설정하지 않은 것이 헌법불합치라 판단했다. 현 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감축노력에 비해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감축량이 더 클 수 있으며 이는 곧 세대 간의 불평등을 낳는다고 보았다. 이 정도만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헌법불합치의 원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정부의 계획 자체가 갖고 있는 목표의 한계나 수단의 부적절함에 대해 유보적인 판단을 내렸다. “어떤 특정한 추정 방식과 평가 요소들을 채택하여 그 결과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 지구적 온실가스 감축 노력에 기여해야 할 우리나라의 몫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여 판단하기 어렵다”거나 “목표가 달성되지 못한 부분에 대한 감축계획이 해당 부문의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관에 의해 작성되고 정책에 반영된다”고 말한 부분은 지나치게 정부가 하고자 하는 의지를 앞세운다. 이를테면 현재의 작업장의 안전규정이 허술하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이를 방치했다고 보기힘들고 노동부가 이를 제대로 규율하지 못하더라도 복지부가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으면 정부의 노력이 없지 않다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제출한 수단들은, 2021년 기존 제출안을 상향한 안 조차도 전 세계의 국가들이 이에 따를 경우 지구온도가 4도씨에 육박할 만큼 쓸모가 없는 계획이다. 이 때문에 그린피스와 같은 단체에서는 한국을 ‘기후악당’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미 기후위기비상행동과 같은 단체들은 단순히 40%의 감축량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성이 낮은 수소나 탄소흡수기술과 같은 것에 지나치게 감축목표를 할당한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해왔다. 즉 목표의 수준과 동시에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정책 역시 현실성이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를 이런 부분을 폭넓게 인정한 반면 오로지 2030년에서 2050년까지의 감축목표가 제시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만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역시 한국의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는 현행 탄소중립법이 현 세대와 미래 세대 간의 책임을 공평하게 나누지 못해서 ‘과소보호금지원칙’을 위반했고 법률로서 명확하게 정해야 하는 것을 시행령으로 미루어 정하도록 해서 ‘법률유보원칙’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정확하게 정부가 아니라 국회의 책임이라고 본 것이다. 알다시피 한국의 법치주의는 시행령체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상 정부가 마음대로 만드는 시행령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 왔다. 국회는 법률 개정의 어려움을 핑계로 시행령에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해왔고 정부는 이를 활용해서 수많은 잘못된 행정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었다. 한국과 같이 직업적 정치인인 국회의원이 있는 나라에서 필요할 때마다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 왜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헌법재판소가 정부에겐 광범위한 재량을 국회에겐 입법상의 하자를 지적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해외의 경우에는 대부분 정부가 소송의 당사자였다. 최초의 기후소송인 네델란드의 소송은 2013년에 정부가 2020년까지의 감축목표를 1990년 대비 30%에서 20%로 완화하자 제기되었다. 법원은 이런 변화가 유럽인권협약에서 정한 생명권을 침해한 것이라 보고 2020년말까지 25% 까진 감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2019년에 진행된 프랑스의 기후소송은 구체적으로 국가가 기후변화에 맞서 싸우는 약속을 준수하지 못했다면서 국가의무를 강조했다. 이 두개의 사례는 명확하게 국가의 의무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다.
반면 독일의 2021년 기후소송에서는 정부의 불충분한 탄소배출 감축계획이 미래 세대에 부담을 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입법자들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점은 한국과 비슷하다. 다른 점은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2026년 2월까지 현행 탄소중립법을 개정하라고 한 것에 비해 독일은 바로 법 개정에 들어가 판결 이후 5개월 만에 2030년 감축목표를 상향하는 것은 물론 별도로 2040년 감축목표로 신설하고 기존 2050년 감축목표를 2045년까지 앞당기는 계획을 제출했다. 해외 기후소송의 사례를 보면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정부를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당사자로서 고려하지 않는 듯 하고 국회에 대해서는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정부와 국회는 중립적이지 않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가보면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정부나 국회에 별다른 의무를 부여한 것이 아니다. 당장 정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의무를 덜었다. 국회는 2026년까지 무려 1년 6개월이나 시간을 벌었다. 2030년까지만 계획이 있어 헌법불합치를 내려놓고도 앞으로 2년 간 허송세월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한 것이라곤 국제적으로 크게 흠이 나지 않게 생색만 낸 것이다. 정부는 기존 2021년 감축목표를 다시 조정하면서 2023년 탄소중립기본계획에서는 산업 부문의 감축목표를 줄이는 대신 국제감축이나 탄소흡수와 같은 검증되지 않은 수단의 비중을 늘렸다. 확실하고 분명한 수단 대신 모호한 수단을 선택한 것은 정부가 산업계의 온실가스감축 의무를 줄여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고려하는 산업부문의 배려라는 것이 노동자와는 상관없는 기업의 전환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은 현 상태에서의 기업활동을 최대한 연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부는 불편부당한 중립자도 아니고 사회의 편익을 극대화시켜서 공리적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조정자도 아니다. 오히려 정부는 현재의 기후위기를 초래한 기득권 구조를 함께 만든 공동의 주체에 가깝다. 당연히 변화를 한다면 정부 스스로도 변화의 당사자여야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후소송단이 제기했던 목표와 수단의 불합리함이 단순히 실수가 아니라 정부의 의도라는 것을 애써 눈감았다.
헌법재판소는 기존 탄소중립법이 제정되는데 걸린 시간이 1년 3개월이 걸렸다는 것을 근거로 새로운 법률 개정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제정된 법률에 구체적인 감축목표를 설정하여 개정하는 것을 새로운 법률 제정기간을 보장해준 것도 웃기지만, 1년 3개월이라는 기존 제정 과정이 실질적인 이해당사자 의견수렴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 자체도 넌센스다. 현재 법률에 병합하여 제정된 최초의 법률안은 2020년 8월에 심상정 의원이 낸 것이지만, 이것이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된 것은 2021년 2월이고 처리된 것은 같은 해 8월이다. 사실상 1년 가량은 허송세월이었던 셈이다. 그래놓고 법의 시행은 2022년 3월로 해놓았다. 이 과정에서 의견수렴 절차는 2021년 7월에 진행한 1차례 공청회 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5명의 진술인 중 3명이 대학교수이고 1명은 정부산하 연구기관의 연구자였고 단 1명만 기후위기비상행동 단체로 참여할 수 있었다. 고작 이걸 하는 데 들인 시간을 헌법재판소는 국회가 법 개정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고 안배했다. 그런데 어쩌나, 2026년 이면 지방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하고 다음 해에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는 해다. 그 때 되겠나? 혹시 헌법재판소가 사실은 고도의 사기를 치고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책임을 제대로 묶어두어야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거짓말의 증거들을 모아두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물을 가치도 없다’는 생각에 제대로된 질문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기후소송의 결과가 그나마 의미가 있으려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정부와 국회에 물어야 한다. 그것도 공식적으로 흔적이 남도록 남겨야 하고 정확하게 정부의 누구, 국회의 누구와 같은 구체적인 답변자들을 기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후에 기후위기를 초래한 당사자로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들의 목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못했다는 무책임한 핑계에 한숨을 짓지 않으려면 실제로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기후소송의 다음 단계는 끊임없이 묻는 것이다. 각자가 속해 있는 조직이나 단체가 있다면 그 명의로 정부나 국회에 ‘공식적으로’ 민원을 제기한다. 이상하게도 한국의 정부기관들은 공식적으로 민원으로 접수하지 않은 의견에 대해서 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민원24나 국민권익위원회에 가서 전자민원으로 접수하는 것이 가장 좋다. 별다른 의미가 없더라도 계속 모아두면 헌법재판소가 만든 하나의 촌극을 불태우는 불쏘시개 정도는 될 수 있지 않겠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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