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위원장의 <기후정치의 시선>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피드백을 매우 기다리고 있습니다! 편집팀 nodonged@gmail.com 또는 사무국으로 피드백을 보내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편집자주] |
저항으로서 대안을 생각하다
-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양미, 동녂, 2024)를 권함
김상철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위원회 위원장
9월 7일 진행한 올해 기후정의행진은 생각보다 참여자가 적을 것이라는 우려를 가뿐히 뒤집고 5만 명이 넘는 규모를 보였다. 특히 대전이나 부산과 같이 지역별로 별도 기후정의행진을 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기후위기에 대한 시민적인 분노는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증거라고도 할 것이다. 하지만 2038년까지 우리가 필요한 전기를 어떻게 생산하고 공급할 것인가를 다루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핵발전 중심의 전력생산 계획을 내놓았다. 반면 전 세계 전력 생산의 30%에 달하는 재생에너지 발전비율이 고작 8%에 머물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확대 계획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원전주의자들이 당장 재생에너지 확충이 어려우니 일단은 원전을 하고 나중에 재생에너지로 전환하자는 말이 거짓말임이 분명해졌다(사실 과학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원전은 한번 에너지를 생산하면 소진될 때까지 멈출 수 있는 에너지원이 아니다) 서울시는 기존 서울혁신파크 부지의 70%에 달하는 땅을 민간기업에 매각하기 위해 기업설명회를 열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으로 도시의 구조 변화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하는데, 당장 현재와 같은 고밀개발 방식은 야간 에너지 사용의 증가 등 에너지의 소비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도로의 증가로 인하여 자가용 이용을 촉진하고 무엇보다 더 많은 소비를 전제로 하는 상업 구역이 확대된다. 그것도 기업이 주도하는 도시개발이란 것은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장기적인 비경제적 이익을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 서울시가 왜 이와 같은 공유지를 기업들에 매각을 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번 매각이 진행되면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끄러지는 저항들
역대 최대 참여의 기후정의행진과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그리고 서울시의 공유지 매각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불만은 커졌지만 그 불만을 촉발한 원인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욱 뻔뻔하고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두 개의 공청회/설명회 장소는 활동가와 지역주민들의 직접적인 항의로 점거되었다. 전력수급기본계획 공청회는 더 많은 논의와 토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관련한 절차를 이행했다는 선언으로 마무리되었다. 반면 서울시의 공유지 매각 설명회는 서울시가 기업을 위해 준비한 꾸러미도 제대로 풀어보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서울시의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다. 이런 일들을 돌아보면 마치 분노하고 항의하는 것이 하나의 의례나 의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의례나 의식화된 항의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다. 기후위기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점차 확대되고 더 많은 항의를 모으고 있지만 그에 비례해 실제 세상이 바뀌는 속도는 더디다. 특히 대통령과 그 가족을 둘러싼 당대의 정치적 논의는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논의보다는 지배계급 내의 궁정전투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거리의 시민들을 운동장의 관중석으로 물러서게 만든다. 항의의 피상성이라는 상황이 의도한 것이라기 보다는 주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돌파해야할 당위가 존재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인가.
대안이 곧 저항이다
한국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상징이 된 이랜드홈에버 투쟁에 참여하고 함께한 이들과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를 만들었던 활동가가 책을 썼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운동권은 어딜 가나 운동권 태가 난다. 당연하게 있어왔던 것에 대해 ‘왜 그러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파고든다.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동녘, 2024)라는 책을 쓴 양미는 진안군으로 이주해서 비정규 활동가, 노동자에 그리고 지역 매체 기자로 일을 하고 있다. 이 책에는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저자는 단호하게 “사람들은 개발주의와 도시화에 대한 반대가 소위 자연인이 되는 것이라 믿는 것 같다.”(57쪽)라고 말하면서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도 농촌에 사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이런 욕심이 있으니 온갖 문제들이 눈에 띈다. 이 책에는 민간회사가 말도 안되게 운용하는 버스를 공영화하면 어떻냐는 질문에 그렇게 되면 “민주노총이 다 잡는다”며, 공영제에 대한 반댁 관리와 통제의 부담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교통행정 공무원이 나온다. 함께 농사일을 하다가도 다른 남성들이 점심을 먹으러 이동할 때 “시부모 밥을 차려주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여성농민”이 등장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기관이 만들어졌는데 알고 봤더니 이주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내용은 없이 사실상 인력수급을 하는 곳일 뿐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지역 농민회에서 수탁 운영하는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마치 경영자단체가 노동자지원조직을 운영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여기에 ‘농촌을 찾는 사람들은 쉬러 오지 일하러 오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군 공무원, 보조금이 나오지 않아서 정규 활동가로 채용할 수 없다는 지역 단체, 정책이 아니라 청년이 문제라고 말하는 군수, 이장단 회의에 참관하는 태도 무례하다고 지적하는 부면장이 등장한다. 사실 이런 날 것의 농촌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고발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을 고민한다는데 있다. 왜 이장은 남성들만 참석하는 대동회에서 선출하는가, 차라리 주민자치회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나. 어렵게 지역청년들이 나서서 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하면 빈집을 군에서 직접 매입해서 청년들과 매칭하면 되지 않냐고 말한다. 여성과 청소년들이 어쩔 수 없이 운전면허를 가진 남성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대중교통이 더 확산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지역 협동조합 방식의 운영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단언한다. 대안이라는 저항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이가 주장하는 민주주의 촘촘한 민주주의이며 과거에 했던 결정들을 새롭게 반성하게 하는 민주주의며 무엇보다 가능성의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는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새로운 권력이 아니라 다른 권력을 지향한다.
“나는 여전히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 또한 저항이라고 믿는다. 위치는 괴물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선량한 권력은 없다고 믿는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가지면 피지배계급을 위한 나라가 될 것이란 실험은 실패했다. 위치를 바꾼 괴물이 새롭게 탄생할 뿐.”(43쪽)
각자의 민주주의들을 위해
2000년 이후 미국의 저항운동과 정당정치의 상관성에 대해 연구한 대니얼 슬로츠만은 저항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운동이 기존 정당정치를 재편성함으로써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시민들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즉 사회운동을 통해서 그동안 받아들였던 우선순위를 뒤집는 이들이 ‘가시적으로 많아지고 또 구체적으로 등장할 수록’ 영향력이 커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제도정치의 프론트 맨을 만드는 방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운동은 기본적으로 ‘어떤 국가를 원하는 가’와 같은 근본적인 공공철학의 갱신을 목표로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가장 빈번한 공격이 ‘현실성’에 대한 것이라면 이런 공격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반격은 가능성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불가능성에 맞서는 방식은 불가능성을 넘어선 필요를 주장하는 것과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라는 책은 농촌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정치판플렛 같이 읽히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대해 한탄고 비난에 머물지 않고 그 상태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더 나아질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제안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엔 저자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이 담당하게 쓰여져 있다.
“마을 대중교통 정류소에는 각종 탈 것이 이용할 사람들을 기다린다. 이용을 원하는 사람은 ‘대중교통지기’에게 이야기하면 된다. 대중교통 이용자들의 안전과 편리를 위해 군에서 마련한 공공형 일자리다. 한 달에 한번 군의회에서 열리는 대중교통운영위원회에 주민 대표로 참석하기도 한다.”(265쪽)
대안이라는 것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전혀 때가 묻지 않는 어떤 것이 더욱 근본적이고 급진적이라 믿는 경향이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의 구성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에 가깝다. 즉 배치의 전략인데 이런 접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우리의 저항이 왜 구체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미끄러지는가. 그리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의도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것과 매끄럽게 분리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현실의 거친면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한번에 도약하는 전환이 아니라 점진적이지만 비역진적인 변화, 그리고 변화의 축적을 임계치까지 모아두는 전략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의 낙관주의를 지키기 위한 처방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서 일상의 민주주의라는 감각을 훈련해보자. 이런 사고 실험이 저항의 피상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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