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섯 번째를 맞은 <노동상담 이야기> 입니다. [편집자주] |
여섯 번째 이야기, 콩깍지가 되어 콩을 삶는 자
조광복
(전)청주노동인권센터 상담활동가
1.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위왕 조조가 죽고 맏아들 조비가 왕 자리를 승계했는데요. 생전의 조조는 둘째 아들 조식을 아껴 왕위까지 물려줄 생각도 했다고 합니다. 눈엣가시였던 조식이 형의 왕위 즉위식엔 안 가고 술을 먹었다고 하니 명을 제대로 재촉한 셈이네요.
조비는 당대의 명장 허저를 시켜 조식을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형제를 주제로 시 한수를 짓되 절대 ‘형제’라는 말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만약 시를 지어내지 못하면 너를 죽일 것이다.”
조식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시재(詩才)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 유명한 七步詩(칠보시)를 지어 올려 목숨을 보전합니다(소설 속의 이 장면은 사실 후대에 각색 한 겁니다).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은 솥 안에서 눈물 흘린다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왜 이리도 급하게 졸여대는가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콩깍지가 되어 제 형제인 콩을 삶는 자들의 열전(列傳)을 소개합니다. 회사 내에서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시민의 힘과 노력으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듯이 노동조합의 민주주의 또한 각고의 노력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닐 테지요.
2.
G교통은 택시회사입니다. 대표이사의 아들이 회사를 이어받았어요. 새로 대표이사가 되자마자 노조위원장에게 사납금을 인상하자고 요구했다가 거부당하고는 위원장이 과거에 저질렀던 개인 비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해서 사직하도록 만듭니다.
사납금이란 택시운전자가 회사에 납입해야 할 운송수입금을 말합니다. 보통 1일 금액으로 정하는데 금액이 클수록 노동시간이 길고 노동 강도가 높아지지요. 사납금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이 정한 이른바 ‘택시운송수입금 전액관리제’ 위반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택시회사들이 여전히 사납금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위원장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두 명이 후보로 나섰는데 그 중 하나가 회사 측이 세운 후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동안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던 기사들이 한꺼번에 가입해 조합원이 됐어요. 모두들 회사의 작업일 거라 추측했지요.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소문난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노동조합은 조합원 김길호 씨의 조합원 자격을 제명했어요. 노조 내부의 단결을 저해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유였어요. 길호 씨는 회사가 임금을 체불하자 조합원들을 대표해서 법원에 회사 재산에 대한 가압류를 신청한 터였습니다.
다시 며칠 후 위원장은 유효기간이 1년 넘게 남은 단체협약과 유효기간이 4개월 남은 임금협약을 회사와 합의해 변경했습니다. 임금협약도 법적으로는 단체협약의 하나인데요. 단체협약은 회사 내에서 근로계약이나 취업규칙에 우선하는 강력한 힘을 갖습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3조(기준의 효력)
① 단체협약에 정한 근로조건 기타 근로자의 대우에 관한 기준에 위반하는 취업규칙 또는 근로계약의 부분은 무효로 한다.
② 근로계약에 규정되지 아니한 사항 또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무효로 된 부분은 단체협약에 정한 기준에 의한다.
그런데 합의 내용이 ‘쇼킹’했습니다. 사장이 갈망했던 사납금 대폭 인상에다 심지어 월 급여 삭감! 이렇게 해서 월 총액 35만 원 정도의 임금이 깎이게 됐습니다. 삭감된 월 35만 원의 금액을 계속 보전하려면 이제부터 하루 1~2시간을 더 일해야 해요.
3.
조합원들로서는 그냥 넘기기 어렵게 됐지요. 몇몇 조합원들이 위원장 해임을 안건으로 하는 임시총회 소집 요구 서명을 받아 위원장에게 임시총회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이 보장한 절차입니다.
그러나 총회 소집권자인 위원장은 차일피일 총회 소집을 미뤘습니다. 이 경우에 대비해 법은 소집권자를 지명해달라고 행정관청에 요구할 수 있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만, 조합원들이 그 절차를 밟고 있는 사이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조 위원장과 회사가 합의하여 정년 63세를 60세로 낮춘 겁니다.
택시기사의 정년과 공기업 또는 대기업 노동자의 정년은 그것이 주는 느낌의 차원이 다릅니다. 인생 막장이라 자조하는 택시 운전 업종의 일은 사실상 정년을 두기 어렵습니다. 인력이 늘 부족하므로 건강만 허락된다면 65세 넘도록 일하는 사람이 허다해요. 그래서 G교통의 정년 63세도 사실상 무의미한 차에 그것을 60세로 낮춘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공교롭게도 단축된 정년 60세를 넘겼거나 앞둔 사람이 10명이었는데 그 중 위원장 해임을 안건으로 한 임시총회 소집요구에 서명한 조합원이 5명이었습니다. 그 중 정년을 넘긴 세 명이 스스로 회사를 떠났고 곧 정년이 도래한 두 명이 정년을 이유로 해고됐습니다. 서명을 하지 않은 5명은 촉탁직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근무했습니다.
그 와중에 회사는 여러 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했는데요, 이들은 집단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했습니다. 숫자로 밀리게 되자 노조위원장 해임은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 법적으로는 정년퇴직 조치가 부당해고임을 인정받았지만 회사와 위원장한테 찍힌 여러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남은 이들은 낙인찍힌 소수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4.
언젠가 시외버스 운전기사로 근무하는 사람의 산재처리를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요. 이 사람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었는데요. 떨어졌어요. 됐으면 1년에 1억은 들어올 건데” 조합원을 위해 헌신하는 노조위원장도 많지만 부나방처럼 이익을 쫓아서 위원장 자리를 탐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유는 법에 있습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9조(교섭 및 체결권한)
① 노동조합의 대표자는 그 노동조합 또는 조합원을 위하여 사용자나 사용자단체와 교섭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다.
법에서 체결 권한을 보장하기 때문에 조합원 전부가 반대를 해도 위원장 한 명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으면 임금도 깎을 수 있습니다. 그 대가로 얻을 떡고물 때문에 콩깍지가 되어 콩을 삶는 거지요. D운수 노조위원장 박장수도 그런 사람입니다.
시내버스 회사인 D운수 대표이사 박호식은 전 대표이사 박호정의 친동생입니다. 박호정이 지병으로 작고하자 그 아들이 후임 대표이사가 됐는데요, 박호식은 몇 년을 절치부심한 끝에 자신의 조카를 끌어내리고 결국은 대표이사 자리를 차지한 사람입니다. 묘하게도 박장수는 전 대표이사 박호정이 작고하기 전에 노조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었어요. 그 뒤 위원장 선거에서 떨어졌다가 박호식이 대표이사가 된 뒤에 다시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지요.
대표이사는 배차과장 임재경을 불렀습니다.
“박장수가 당선되면 단체협약하고 징계규정들을 바꿔주겠다고 약속했어. 그걸 문서로 확약해주겠다고 했으니 임 과장이 각서 초안을 만들어 봐.”
임재경은 “본인이 노조위원장이 될 경우 단체협약, 취업규칙, 징계규정 등 일체의 규정 변경에 관하여 대표이사에게 위임한다.”는 이행각서를 작성해 박장수로부터 직접 서명을 받아 대표이사에게 전달했어요.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박장수가 당선됐습니다.
5.
조합원 중 신재표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위원장 박장수와 사장 박호식한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사람예요. 하루는 신재표가 버스운행 시작 전 회사 내부에서 실시하는 음주측정을 받았는데 혈중 알코올 수치 1차 0.024%, 2차 0.021%가 나왔습니다. 부리나케 대표이사 박호식, 위원장 박장수, 과장 임재경이 모였습니다.
“(위원장) 신재표 얘 이번 기회에 보내버립시다”
“(대표이사) 그래? 그렇게 하지. 임 과장이 징계위원회 준비 좀 해 봐!”
과장 임재경은 해묵은 징계 규정을 들춰봤는데요. 결론은 해고 불가! 알코올농도 0.05% 이상이어야 면직(해고)할 수 있었습니다. 위원장 박장수가 배짱 좋게 말합니다. “그럼 음주수치를 0.02로 바꿔서 규정을 새로 만듭시다.”
임재경은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취업규칙의 제10조(해고, 면직)를 “10) 회사 내 자체측정 음주수치가 0.02% 이상일 때 및 2회 이상 적발했을 때”라고 변경했고 취업규칙 부속서류인 종사원징계규정 제3조를 “12. 음주 출근을 하였을 때 (자체측정: 0.02 이상) 면직”으로 변경했습니다. 당연히 신재표를 겨냥한 거죠.
하지만 노조위원장 박장수와 대표이사가 합의해서 규정을 변경했더라도 이 규정으로 해고할 수 있으려면 규정 변경 날짜가 신재표의 음주 측정 이전이라야 합니다. 여전히 해고 불가! 입니다.
이들은 다시 머리를 맞댔습니다. 마침내 대담한 발상이 시작됐습니다. 전 대표이사 박호정이 생존해 있을 때 박장수가 노조위원장을 했었던 사실, 당시의 대표이사 박호정이 작고한 날에도 박장수가 위원장이었던 사실을 떠올린 겁니다.
그들은 몰래 변경한 취업규칙과 종사원징계규정의 말미에 노사합의 날짜를 박호정이 작고한 날의 6일 전 날짜로 입력했습니다. 그리고 “대표이사 박호정, 노동조합위원장 박장수”라고 입력한 후 그것을 출력하여 대표이사 직인과 노조위원장 직인을 찍었습니다.
그들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 가장 상위 규범인 단체협약에 여전히 음주수치 0.05를 해고 사유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상담 차 노무사사무소를 찾아갔는데 노무사도 간이 부었습니다. 대담하게 단체협약의 ‘보충협정서’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면직 사유를 “회사 내 자체측정 음주수치가 0.02% 이상일 때 및 2회 이상 적발했을 때”라고 기재했고 합의날짜는 박호정 전 대표이사가 작고하기 3일 전 즉, 취업규칙과 종사원징계규정의 말미에 기재한 노사합의 날짜의 3일 후의 날짜를 기재했습니다. 역시 당시의 노조위원장 박장수 명의와 대표이사 박호정 명의를 적고 직인을 찍었습니다.
마침내 타임머신에 올라탄 규정의 종합세트가 완성됐습니다. 그런데요, 직인을 찍은 당시의 날짜에 전 대표이사 박호정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오늘내일 하고 있었습니다.
회사는 음주측정에 적발됐다는 이유로 신재표를 해고했습니다. 죽은 대표이사가 산 직원을 내쫓았습니다! 상습범이 된 이들은 대담성을 더해서 직원들을 징계할 때마다 위조한 규정을 적용했습니다. 징계사유로 음주측정 내용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위조했기 때문입니다.
6.
예상치 못하게 배차과장 임재경이 진실을 밝히면서 대표이사와 노조위원장이 벌인 엽기적인 행각이 드러났는데요. 피해 노동자들의 기자회견, 고소고발, 천막농성 등 한 동안 난리를 치르고 나서도 조합원들은 위원장을 끌어내리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위원장은 후보로 출마해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됐습니다. 선거 때마다 신규 입사한 기사가 넘쳤고 선거 끝나면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운전기사가 모자랐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박장수는 여전히 노조위원장이었습니다. 사장 박호식과 위원장 박장수는 단체협약을 변경했습니다. 정년이 도래한 조합원은 촉탁직으로 고용할 수 있고 촉탁직 고용 당시 노조위원장일 경우 그 임기 동안 고용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박장수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7.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5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국민의 한 표 한 표를 모아 당선된 대통령이 총부리를 앞세워 국회 점령을 시도한 기괴한 풍경 말입니다. 그것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1인 1표의 직접 비밀 무기명 투표 제도가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의 후퇴를 막아서는 시민의 힘은 또 얼마나 위대했던가요?
조합원이 직접 대표자를 선출하는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조합원의 1인 1표 제도가 반드시 조합민주주의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대의제의 한계라고 할까요? 지난 12월 3일 밤 목격한 극단적인 풍경이 노동조합에서도 펼쳐질 수 있습니다. 한 뿌리에서 태어나 콩깍지가 되어 제 형제인 콩을 삶는 자는 어디에든 있기 마련이죠.
상담 경험으로 볼 때 노동조합 내부의 민주주의는 직장 민주주의와 관계가 깊습니다. 사업주가 노동조합 내부 운영에 개입할 여지가 크면 클수록, 사업주가 자신이 미워하는 직원에게 불이익을 줄 방법이 많으면 많을수록 노동조합 민주주의는 반비례해서 취약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일터 담벼락을 넘어 사회와 연대하지 않고 담벼락 안에 고립된 노동조합일수록 민주주의와도 담을 쌓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상담하면서 겪은 소위 어용 노조들은 하나같이 다른 약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사회와 연대하지 않는 담벼락 안의 노동조합이었습니다. 연대의 경험은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조합원들의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매개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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