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단을 그리고 몰락한 화가와 자경단 뒤에 숨은 우두머리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화상 화가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빛을 잘 다루기로 유명해서 ‘빛의 화가’라고도 합니다.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손꼽히기도 하죠. 렘브란트가 인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빛의 방향은 우리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요, 인물 사진 촬영할 때 측면으로 45도, 상위로 45도의 위치에서 조명을 비추어 얼굴에 입체감을 주고 강한 인상을 만들어주는 방법이 바로 렘브란트로부터 나온 것이랍니다.
렘브란트는 열네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네덜란드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에 두고 그림만 그렸다고 해요. 다행스럽게도 그의 부모는 렘브란트에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기보다 원하는 대로 진로를 바꿔주기로 했고, 3년 동안 미술 수업을 제대로 받은 렘브란트는 열아홉 살에 개인 화실도 열게 됩니다. 스물여섯 살에는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에 가서 꿈을 펼치죠.
대도시에서 렘브란트는 외과 의사 조합의 주문으로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이라는 그림을 제작하여 초상화가로 최고의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당시 해부는 공개 수업의 형식으로 연 1회, 공인된 해부학자의 주도로 이뤄졌는데요,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협회는 5~10년마다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집단 초상화를 의뢰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니, 렘브란트는 이미 인정을 받고 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집단 초상화의 모델이 화가에게 각자 돈을 내도록 했는데요, 그림에 등장하는 모두의 얼굴이 잘 보이고 튈프 박사 외에는 다른 인물들의 비중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의뢰인들의 만족도도 높고 사회적으로도 크게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튈프 박사는 해부 수업을 이끌어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도 그림에서 주인공 역할로 그려져서 그림 비용을 두 배 이상 낸 것으로 추정된다니, 대통령의 생일 축하에 경비처 직원들과 군인들이 동원되는 현재의 대한민국보다 17세기 네덜란드가 오히려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승승장구하던 렘브란트는 10년 만에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잃게 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야경’ 또는 ‘야간 순찰’이라고 알려진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 때문입니다. 거대한 규모나 과감한 빛의 활용, 당시 그림에 등장할 수 없었던 일반인을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엄청난 악평을 받게 되었다고 해요.
이 그림은 민병대, 다른 말로 ‘자경단’의 의뢰로 그려진 것인데요, 해부 수업을 그렸을 때와 달리 등장인물들은 그림 비용 지불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들 사이로 간신히 보이거나 어둠에 숨어있는 것을 보시면 이해가 되기도 하죠. 게다가 이 그림은 우리에게 알려진 제목대로 밤에 순찰을 도는 야간 경비대를 그린 것이 아니라, 낮의 순찰 모습을 그렸다고 합니다.
최근 네덜란드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보통 그림의 일부에만 사용하는 납을 렘브란트가 그림 전체에 사용하면서 납 성분이 변질되어 그림 전반이 어둡게 변했다고 합니다. 유화를 그리는 화가로서 화학작용을 잘못 이해했다는 점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지요. 하지만 이 세계는 ‘거장’의 실수는 잘 알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렘브란트가 이 그림 이후 몰락한 것에 대해 위대한 화가가 집단 초상화의 문법을 깬 예술적 실험을 당대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해 일어난 안타까운 일로 해석되곤 하죠.
그런데 이 그림의 주인공들이 ‘자경단’이라고 하니 최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자경단을 찾아보면 ‘한 지역의 주민들이 범죄나 재난에 대비하고 그 지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조직한 경비 단체’를 의미한다고 나오는데요, 하나는 아동·청소년을 비롯한 234명을 노예로 삼아서 성착취와 성폭력을 일삼으면서 다단계 방식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조직의 이름을 “자경단”으로 만들었던, 이른바 “제 2의 N번방” 사건입니다.
“자경단”의 우두머리가 스스로를 ‘목사’라고 하고, 집사, 전도사, 예비전도사 등으로 계급을 나눴다는 것은 참 의미심장하지요. 이 사건은 내란 정국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아 너무 속상한데요, 다음 호에 조금 더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서부지방법원 침탈사건입니다. 2025년 1월 19일 새벽,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 사건이 일어났죠.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의 지지자들이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울서부지방법원 청사를 침입해 난동을 일으킨 것이었어요. 당시, 법원이 침탈됐다는 소식에 이른 아침 깨어나 뉴스를 보면서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2.3 위헌 계엄 이후로 상식을 가진 시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직업 정치인들의 언행이 계속 이어져 면역이 좀 생겼을 줄 알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무지와 폭력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인지기능이 마비될 지경이었습니다.
내란 우두머리를 지키려는, 또는 그러한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려는 이들 역시 스스로 대한민국의 질서를 지키는 ‘자경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질서’란 국가의 기본 법칙인 헌법을 무시하고 민주적 의사 결정 구조를 파괴하고서라도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고,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강자에게 빌붙어 사는 노예 상태에서도 자신이 괴롭힐 약자만 있으면 되는 것이겠지만요.
물론 예술은 정치와 다르기 때문에 렘브란트가 했던 시도와 성취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가 왜 렘브란트를 추락시켰는지 조금 더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이 그림에는 자경단을 이끄는 리더 둘 외에 인공적으로 빛을 주어 강조한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왼쪽의 소녀입니다. 당시 자경단을 상징했던 닭을 허리에 매달은 소녀는 렘브란트의 아내와 얼굴이 닮아있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게다가 그림의 중앙에 은근슬쩍 자신의 얼굴도 껴넣었죠.
민간인을 그려주는 대신에 초상화라는 목적에 맞지 않게 의뢰인들을 자신의 예술 실험의 도구로 삼은 렘브란트가 그 그림에 자신과 아내를 등장시킨 것 또한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맞물려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예술과 정치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약속은 누구든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초상화를 의뢰받았으면 의뢰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개성을 드러내면서 개개인이 잘 보이게 해야 할 것이지, 자신의 개성만 뽐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예술작품도 그러할 진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이 망상에 빠져서 자의적 판단을 하거나 사적 관계를 우선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의뢰인들이 그림 비용 지불하기를 거절한 것이 합당한 것처럼, 내란 동조자들 역시 자신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우두머리를 떠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 옛날 윤기중 씨가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들을 계속 공부시켜 사범 시험을 아홉 번이나 치르게 하지 않고, 렘브란트의 부모처럼 아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을 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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