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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우리가 꿈꾸는 세상

바쁘신 와중에도 글을 내어 주신 화사님께 감사와 연대의 말씀을 드립니다! [편집자주]

 

우리가 꿈꾸는 세상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저는 이제야 2025년을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202544일 오전 1122,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이 전국에 울려 퍼질 때까지, 위헌 계엄령이 선포된 2024123일로부터 123일 동안 인지적 혼란과 철학적 고통을 감당하느라 늘어난 주름과 증발된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 구속해서 군법이 정한 형을 집행하라 요구하고 싶지만, 민주 시민답게 절차를 지키며 끈질기게 목소리를 내려고 해요.

 

 

 

대한민국은 1987년 직선제 도입 후에도 국민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 비민주적 인사들이 정권을 잡아 왔습니다. 자본이 정치를 뒤흔들 뿐 아니라 민주정치의 중요한 원리인 삼권분립까지 심각하게 훼손되었어요.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람이라도 시험의 답만 잘 맞추면 더 나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기현상도, 국민으로서 주권을 행사하기보다 권력에 빌붙는 것을 현실적인 판단이라 착각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하고요.

 

그래서 내란 우두머리의 파면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내란 동조 세력을 단죄하고, 이제라도 적폐들을 단호하게 청산해야 해요.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에 맞서서 모두를 포함하는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불평등과 불의를 외면하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변명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기 위한 상상이 필요해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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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수괴 파면의 기쁨으로 서론이 길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과거의 그림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려고 해요. 바로 제 작업입니다. 감사하게도 2023년 여름,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의 초대를 받아 개인전을 열었는데요, 관객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누구와 연대하며 살아갈지 고민을 요청하면서 가려져 있던 여성역사유적지를 소개하는 전시였어요.

 

(좌) 전시 포스터 / (우) 서울여담재 전경

 

전시작 중에 <나들의 지도> 라는 관객참여작업이 있었는데요, 전시장 입구에서 선호와 취향, 기치관 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질문 미로: 당신은 누구십니까?>를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작업이었답니다.

 

(좌) 전시장 입구의 <질문 미로>, 이충열, 2023년, 혼합재료 가변설치, 관객참여 작업 / (우) 미로 탈출하면 ‘짠!’

 

벽의 중앙에 나 다운 나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 3가지를 선택하세요. 그에 맞는 종이에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서 분류선 안에 붙여주세요.”라는 요청문이 있고, 그 둘레로 12개의 메모지를 붙이고 각각의 구간을 구분해놓았어요. 그리고 벽 앞에 있는 테이블 중앙에도 벽과 같이 맨 위쪽 중앙에서 시작해서 시계 방향으로 직업’, ‘나이’, ‘성별’, ‘종교’, ‘출신 지역’, ‘가족의 형태와 구성원’,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고 싶은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12가지 항목이 쓰인 메모지를 놓아서 관객들이 떼어 쓸 수 있게 했어요.

 

관객들에게 자신에게 중요한 3가지와 그 이유를 고민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공감하거나 생각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어요. <나들의 지도>라는 제목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모여서 우리 사회의 가치 지형도가 그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만든 제목이었고요.

 

<나들의 지도>, 이충열, 2023년, 혼합재료 가변설치 / (좌) 관객참여 전 설치 모습 / (우) 관객참여 후

 

전시 참여자가 어떤 사람들인지에 따라 지도의 모양이 달라지겠지만, 이 전시에서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현실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요소, 직업’, ‘나이’, ‘성별등보다는 관계, 소중함, 행복, 즐거움, , 하고 싶은 일 등의 가치에 대한 선택이 많았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답변을 보면 관객들이 기존의 통념을 벗어난 해석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어요.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는 나이주의가 있어서 먼저 태어난 사람에게 권력이 부여되기도 하지만, 어느 노년 남성분은 나이를 선택하고 자기 나이 대신에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보다 먹은 후에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써주셨어요. 종교를 선택했지만 세상은 조금씩 나아진다는 믿음이라고 적어주신 분도 있었고요. “여성이라서 인권, 평화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고 써주신 분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지요.

 

<나들의 지도> / (좌) 나이 / (중) 종교 / (우) 성별

 

관객참여작업은 관객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하고 관객에 의해 완성되는 속성을 가졌지만, 이 작업에서는 관객의 역할이 지배적이었고, 저는 작가지만 관객들을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참여해주신 관객들이 남겨주신 것들을 수없이 소개하고 싶지만, 이번 글에서는 관객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나들의 지도> 관객참여-꿈

 

위에 소개해드린 이야기에 대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여러분의 몫으로 남기기로 했어요. 관객들이 주신 이야기에 제가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독자들께서 이 작업의 관객으로서 나는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질문의 답을 떠올려보셨으면 하기 때문이에요.


서울여담재는 아파트 단지에 인접한 덕분에 네다섯 살의 어린이부터 팔순이 넘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방문했는데요, 12가지 항목 중 자신에게 중요한 3가지를 고르는 것에서 꿈꾸는 세상을 고른 분이 100명이 넘었답니다. 어른이 되면서 꿈이 좌절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는 사회였지만, 100명이 넘는 관객이 자신의 꿈을 공유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몰라요.

 

국내에 유일했던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는 슬프게도 서울시장의 여성 지우기정책에 의해 폐쇄되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이해가 안 되는무수한 일들로 괴로움을 겪었죠. 하지만 계속 꿈꾸기를 멈추지 않으면 좋겠어요. 계속 꿈꾸는 세상에 대한 상상을 펼쳐서, 결국 꿈꾸는 세상으로 만들어, 끊임없이 꿈꾸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겨우 산 하나를 넘었으니, 우리, 살아지는 대로 사느라 부정의와 적폐에 익숙해지지 말고, 모두가 포함되는 세상을 꿈꾸며, 꿈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 나누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