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후정치의 시선

[기후정치의 시선] ‘하지 않는 말’에 주목한다: 반 기후연대의 등장이라는 역설

 벌써 열 번째나 된 <기후정치의 시선>입니다. 지난 달 정시마감은 우연이었나 봅니다 ㅠㅠ [편집자주]

 

‘하지 않는 말’에 주목한다: 반 기후연대의 등장이라는 역설

 

김상철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위원회 위원장

 

학생들이 보는 교과서 중 ‘정치와 법’이란 과목을 다룬 것이 있다. 이 책에서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이유로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국민은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함으로써 정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김왕근, 정치와 법, 87쪽)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거는 “선거 과정에서 후보 또는 정당 간의 경쟁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하고, 국민이 대표 선출 과정에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래서 “선거는 한 나라가 얼마나 민주적인가를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너무나 익숙하다. 실제로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언론과 정책홍보물을 통해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이 ‘정말인가’라는 되물음 앞에선 좀 주저하게 된다. 당장 대의민주주의라는 것이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 보다 더 우월하다는 데에 의문이 드는데, 대의민주주의의 전제가 되는 정당 체계가 과연 유권자로서 시민들의 선거 자유를 얼마나 보장하고 있는가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건 언제나 시간 없을 때 점심 메뉴를 고르는 과정과 비슷했다. 막상 먼데 갈 수는 없으니 가까운 곳의 식당을 정해야 하지만 선뜻 고를 만한 것이 없는 상황이다. 늘 먹던 것을 습관처럼 먹는 것도, 아니면 후회할 수도 있지만 다른 메뉴를 골라놓고 예정된 후회를 반복 하는 것이 괴롭다. 때때로 특정 식당의 악행이 드러나면 그 식당을 갈 수 없어서 불만족스러운 식당으로 가기도 한다. 말로는 식당을 고를 자유가 있다지만 결국은 주변 식당의 범위가 곧 선택의 범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더하기에서 빼기로

 

요즘 음식을 고르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무엇이 들어갔는가’라기 보다는 ‘무엇이 빠졌는가’다. 실제 편의점에 가도 음료수들은 0칼로리를 강조하고 라면이나 다른 조리음식도 특정한 무언가를 넣지 않았다는 ‘무첨가’를 강조한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많이 들어갈 수록 눈길을 끌었던 터라 이와 같은 변화에 어안벙벙하다. 이런 변화를 나름 고민해보면 무언가 더 넣어서 인심을 쓴다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낮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차적으론 새로운 것을 넣는다는 행위가 어설퍼서 오히려 맛을 해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한참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형태의 음식이 유행에서 밀려난 것도 어느 것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게 된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섞어서 나빠지는 것은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과 저것을 섞을 때 필요한 것은 놀라움 만이 아니다. 적어도 음식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맛이 있어야 하고 적정한 영양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보면 빼는 것이 더 유리한 판단일 수 있다. 처음에는 지방이 골칫거리 이더니 좀 지나 당분이 문제였다. 둘 다 건강을 위한 고민에서 비롯한 빼기다. 빵에도 글루텐을 없애는 것이 기본이 되었고 우유는 점차 유지방을 없애는 ‘건강’ 우유가 늘어났다. 그러다가 급기야 칼로리 자체를 없애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애당초 음식물을 먹는 이유가 활동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한 것인데 아예 에너지원으로 전환할 수 없는 것이 음식의 장점이 된 것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다양한 먹거리를 통해서 얻는 에너지가 많기 때문이다. 별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 뿐만 아니라 적정한 신체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스스로 먹은 에너지를 다 활용하지 못해 몸 안에 축적한다. 칼로리가 없는 음식이란 역설은 오히려 우리의 일상적인 음식이 얼마나 높은 에너지의 집적을 보여준다. 

 

무언가를 넣은 음식과 무언가를 뺀 음식 중 고른다면 무언가를 뺀 음식을 고르는 것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많이 넣었다고 말하는 음식은 대개 추가된 식재료가 기존 음식맛은 물론 음식의 영양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홍삼액에 비타민C를 첨가한 건강보조식품의 경우, 각각의 영양분들이 시너지를 낼 지 아니면 효능을 반감시킬 지 알기 어렵다. 즉 선택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알아야 할 정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반면 무언가를 뺀 음식은 좀 더 직관적이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이 들어갔는지 여부만 생각하면 된다. 다이어트를 생각하고 있다면 아무래도 칼로리가 낮은 음식이 낫다. 특정한 소화 장애가 있다면 유당이 없거나 글루텐이 없는 음식을 고른다. 채식을 선호한다면 가급적 비건이라는 표시가 된 음식을 선택한다. 이런 것들은 무언가를 추가해서가 아니라 없기 때문에 선택이 가능해진다. 

 

 

후보들이 말하는 것: 다른 후보 같은 이야기

 

유력한 대선 후보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은 초기의 공약으로 주가 5,000 시대를 만들겠다고 했다. 지금은 성장의 시대라는 것이 중요하다 말했고 그것의 지표가 주가라는 것이다. 사실 코스피 지수를 의미하는 주가는 처음으로 주식거래소가 만들어진 1980년의 산물이다. 애당초 거래가 없으면 가격이 있을 수 없으므로, 1980년 1월 4일을 기준으로 주식이 상장된 공개기업의 가치를 100으로 해놓고 시작한 것이 코스피 지수다. 처음으로 코스피지수 1,000이 넘었던 것이 1989년 3월이다. 단순하게 보면 기업의 가치가 10배 올랐다. 대표적인 성장지표 중 하나인 1인당 국민소득은 같은 기간 동안 1,870달러에서 5,736달러가 되었다. 숫자로 보면 2배가 넘어선 것이다. 코스피가 2,000을 넘었던 때는 2007년이다. 이 때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어섰다. 기업의 가치는 20배가 올랐고 국민소득도 10배 가까이 올랐다. 기업의 성장과 1인당 소득의 성장이 1980년대에는 등가로 보였지만 그 이후엔 절반 정도 밖엔 되지 않았다. 기업의 성장이 개인의 성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 기업이 성장하면 그 만큼의 낙수효과가 생겼지만 이제는 기업이 더 많이 성장해야 그나마의 낙수효과를 누리게 된 것이다. 코스피 3,000이 넘었던 시기가 2021년 1월의 일이다. 기업의 가치가 1980년에 비해 30배가 커진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6천달러 수준이었으니 20배 정도 올랐다. 이 정도면 왜 유력한 대선 후보가 성장의 지표로 주가지수를 말하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어찌되었던 기업이 성장해야 소득이 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니 말이다.

 

그런데 한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다르다. 1980년에 0.389였던 것이 0.33 수준이었다. 코스피지수가 2,000을 돌파했던 1989년은 지니계수에도 개선되기는 커녕 학자에 따라선 가장 지니계수가 악화된 시기로 꼽힌다. 기업은 성장했고 1인당 국민소득도 성장했는데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았다. 자산을 기준으로 하는 자산지니계수는 0.6에 달한다. 지니계수는 모든 사람이 소득이나 자산을 공평하게 가지고 있는 상태를 0으로 하고 완전히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상황을 1로 하여 계산하는 지표다. 코스피지수가 국민소득과 동행하는 지표라면 그것이 불평등 해소에는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시키는 지표라고도 볼 수 있다. 덧붙여 코스피 지수가 2000에서 3000이 되던 시기인 1990년에서 2022년 사이에 한국의 탄소배출량은 133%가 늘었다. 1인당 탄소배출량으로 보면 상위 10%과 하위 10%의 차이는 23배에 달한다. 상위 10%의 탄소배출량을 기준으로 하면 전 세계 1위를 보이고 있다. 정리하면 유력한 대선 후보인 이재명의 코스피 5,000은 언뜻보면 소득을 높인다는 지표 같지만, 적어도 과거와 같은 방식이라면 그 사이 불평등은 유사하거나 더욱 심화될 수 있고(특히 자산의 불평등은) 여전히 막대한 탄소배출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재명 후보의 코스피 5,000이라는 공약은 이제는 떨어졌지만 국민의힘 한동훈 후보가 말했던 국민소득 5만달러와 같은 이야기다. 서로 양 극단에 있을 것 같은 후보가 사실은 경제 공약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역설은 사람들이 각자 지지할 후보자들을 선택해놓고 오로지 그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제는 후보자들이 공약의 차별화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 시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서두에 이야기한 교과서의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란 표현은 진부하다는 것을 넘어서서 사실상 현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후보들이 말하지 않는 것: 모두가 침묵하는 것

 

현재의 선거는 공약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으로 인격화된 자신의 정치적 페르소나를 뽑는 경연장이 되었다. 이게 여타 선발대회보다 위험한 것은 선거에서 나온 후보자들의 인식 수준이 역으로 유권자들의 인식 수준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강력하게 원하는 가치가 있더라도 정작 지지 후보의 약점이 된다 생각하면 스스로의 생각을 유보하더라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정책에 대한 과소평가는 결국 앞으로의 사회에 대한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로 나타난다. 특히 현직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해 발생한 조기대선은 그 결과를 정해놓고 하는 게임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지금 시기 중요하다 말해왔던 것은 탄핵 이후의 필요성에 종속된다. 

 

하지만 올해 취임하는 21대 대통령은 임기가 2030년까지다. 공교롭게도 해당 시기는 정부가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로 설정한 1차 시한인 2030년과 같다. 정부는 이미 2018년 기준으로 2030년까지 40%를 감축하기로 했다. 에너지 전환부문으로 46%, 산업부분으로 11% 그리고 건물에 33%, 교통부문으로 38%를 감축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차기 정부의 대통령 후보자들은 누구도 이와 같은 목표와 연동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더 많은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부 스스로가 수립한 2030년까지의 목표를 달성할 수단이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이번 조기대선의 후보자들이 하나씩 등장하고 있는 지금의 기후정치가 갖는 곤람함이다. 어쩌면 이번 조기대선은 후보자들 간의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반기후 연대라는 속성을 공유하게 되지는 않을지 우려된다. 우리는 후보들이 말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면서 다가오는 대선을, 그리고 내년의 지방선거를 고민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