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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정치의 시선

[기후정치의 시선] 대형산불은 기후변화 탓이라는 핑계에서 벗어나는 법

산불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조속히 수습되기를 기원합니다. 그와 더불어 김상철 필자님은 9개월만에 처음으로(!) 마감일을 지키셨답니다. [편집자주]

 

대형산불은 기후변화 탓이라는 핑계에서 벗어나는 법

 

김상철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위원회 위원장

 

지리멸렬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선고와 더불어 경북지역에 발생한 산불은 심각한 사회적 우울을 일으켰다. 특히 이번 산불은 기존 강원 지역이나 경기 북부 지역의 산불과 다르게 상당히 빠른 확산속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주었다. 실제로 정부에서 해당 지역 주민에게 위험 문자를 보내더라도 문자를 확인하는 것보다 산불의 확산이 빨랐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부의 늑장도 문제고 예상치 못한 산불의 위력도 문제다. 

이에 대하여 정부는 이번 산불이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이 되었는데 이 배경에는 기후변화에 따른 건조 기후와 강한 돌풍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이런 시각은 비단 정부 측의 입장이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나왔는데 연합뉴스에서 연재하는 ‘산불대응 대전환’이라는 연속기획의 첫번째 제목이 “기후변화가 키운 불씨 … 사람 힘으로 감당 못해”이다. 즉 이번 산불은 인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후변화가 만든 환경적 측면이 더욱 크다는 인식이다. 실제로 해당 기사에 등장하는 강원대 산림환경보호학과 채희문 교수는 이번 산불이 ‘수종 문제’나 ‘산림청의 소홀’ 문제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즉 바뀐 환경에서 기존의 산불 대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같은 기사에 등장한 국립산림과학원도 ‘산림 구조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며 거든다. 그러니까 이런 입장에서 보면 기후변화에 의한 산불의 거대화는 ‘어쩔 수 없는 천재’에 가깝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앞으로의 대안을 잘 마련하는 것’이라는 걸로 이어진다. 

 

 

산불, 인재냐 천재냐

 

책임회피의 제도화가 현대 관료주의의 특징이긴 하지만 이번 산불 문제를 은근슬쩍 ‘불가항력적 사건’으로 만들어놓고 기후위기 책임 운운하는 것이 좋게 보일리 없다. 그러다보니 이번엔 ‘기후위기 핑계대지 마라’는 입장이 쏟아진다. 이를테면 온라인매체 민들레에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 유정길 소장은 ‘대형 산불 책임, 기후위기 탓으로 돌리지 마라’라는 글을 기고했다. 유 소장은 이번 산불에 대해 ‘발생원인’과 ‘확산원인’을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번 산불의 발생원인은 참묘객의 실화이고 확산원인은 산림청과 산림조합이 만들어놓은 산림카르텔에 의한 조림사업이라고 지적한다. 즉 산의 수목 관리를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다양한 숲이 아니라 손쉽게 식재가 가능하고 사업화하기 좋은 특정한 수목으로 일원화한 사업방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앞서 연합뉴스의 연재기사 결론은 산림청에 새로운 조림을 위한 사업비 증액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산림청이든 산림조합이든 산불이라는 위기가 새로운 크나큰 기회가 될 것은 분명해보인다. 

문제는 이런 공방 사이에 끼어버린 ‘기후위기’라는 의제다. 기후위기가 더 건조한 산을 만들고 한번 붙은 불을 널리 확산시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기후위기라는 현상이 자연스로운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초래한 인위적 결과라는 점에서 보면 원인으로 기후위기는 좀 어색하다. 특히 정책적 책임이 있는 측에서 자신들의 책임회피를 위해 기후변화 운운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미국 LA지역의 산불이 한창이던 지난 1월 국제기후연구단체(World weather attribution, WWA)는 해당 지역의 산불이 확산되는 데는 기후변화의 영향이 크다는 조사를 내놓았다. 기본적으로 건조한 기후를 보이는 LA 지역은 그전부터 산불에 취약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겨울까지 더 이어졌고 이 때문에 산타아나 바람의 영향과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즉 기후가 건조하면 당연히 작은 불씨에도 산에 옮겨붙어 산불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겨울철에 LA 지역에 부는 강하고 돌풍이 심한 계절성 바람이 있다. 기후위기의 영향으로 LA의 건조한 기후가 겨울철까지 이어지자 산불에 취약한 환경에 작은 불을 위험한 산불로 격상시키는 계절성 강풍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존보다 35% 정도 산불의 위험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1983년부터 2022년까지 미국의 산불빈도
1983년부터 2022년까지 산불 범위

*미국 연방환경보호청(https://www.epa.gov/climate-indicators/climate-change-indicators-wildfires)

 

 

위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있는 2000년대 이후 산불의 범위는 점차 커지고 있다. 정확하게는 대형 산불로 이어진 횟수가 많아졌다(아래쪽). 하지만 그 시기 동안 산불이 발생하는 빈도는 80년대나 90년대에 비교할 때 더 낮아졌다(윗쪽). 그러니까 현재 기후위기가 영향을 미치는 산불은 높은 횟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넓어진 범위에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두 가지 요소는 모두 인간의 대응 문제를 야기한다. 

 

 

핑계로 전락한 기후위기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올해 산불의 핵심적인 요인들은 모두 사람과 관련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발화에서부터 그렇고 소나무 중심의 수목 구성도 그렇고, 산불 제어를 위해 임도가 필요하다고 해놓고도 쓸모 없는 임도를 만들어 놓은 것도 그렇고 나아가 산 자락 가까이 잔뜩해준 각종 개발사업의 인허가가 그렇다. 무엇보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좀 더 집중적으로 원인을 파고들고 책임을 분명히 하기 보다는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피해 구제에만 집중하는 언론들의 행태는 이런 인위적인 책임들을 덮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기후위기라는 것이 위기의 이름이 아니라 인위적인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기회의 이름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얼마 만큼 현재 기후위기를 둘러싼 정치가 왜곡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때 정치는 국회를 중심으로 하는 보이는 정치가 아니라, 행정이나 언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라 부르는 인식적인 측면에서의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기후위기 운동이 가진 난맥 중 하나는 현대 사회의 문제 중에서 엄밀하게 기후위기와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문제가 별로 없다는데 있다. 그러다보니 모든 사회현상을 기후위기라는 필터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후위기 문제의 해결이 가장 최우선의 해결대상이 되어야 할 텐데 어쩐 일인지 해결책으론 넘어가지 못하고 문제에만 머물러 있다. 사회적 압력이 부족해서 인가 싶어서 더욱더 기후위기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면 강조할 수록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모두 기후위기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문제를 키우면 당연히 커지는 압력이 해결로 이어질 것이라는 연쇄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커지는 문제의식 덕분에 문제를 발생시키는 측이 너무나 손쉽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알리바이가 되고 만다. 이를테면 여름철 집중 호우로 인해 지하방의 침수 문제에 대해 주거환경 개선에 대한 법제도의 한계나 서울시 등 행정청의 부실한 대응보다는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위기담론을 실천담론으로 연결하기

 

문제의 확인이 반드시 해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문제의 규모가 커진다고 해결의 시급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문제와 해결 사이에는 불연속적인 인식의 비약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비유를 하자면 술과 불규칙한 생활이 통풍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더욱더 강조한다고 환자가 운동을 하거나 생활을 개선하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통풍이 수명도 줄이고 다른 합병증도 유발할 수 있고 한번 나빠지면 개선하기도 어려워 빨리 대처해야 한다고 겁을 줘도 그렇다. 어차피 버린 몸이라고 자포자기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술을 못 먹도록 해야 하고, 억지로라도 운동을 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하면 매일 매일 귀찮게라도 야단도 치고 하면서 말이다. 현재 기후정치의 과제는 바로 비대해진 문제와 왜소한 실천 사이의 ‘강제를 만들어내는 힘’을 고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면 바뀔 것이고 바뀌면 움직일 것이라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더더구나 현재의 상태는 어쩔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누군가에겐 가장 좋은 ‘최적의 상태’임을 기억하자.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위원회 활동을 하다보면 기후정책과 기후정치를 헷갈려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한편으로 정책과 정치가 상호 연관되어 있고 현재를 분석할 수 있는 힘이 현재를 바꿀 수 있는 힘이라는 점에서 ‘그게 그렇게 구분되나’ 싶지만 다른 한편으론 분석 자체만으로 현재의 상태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정책이나 사업이 부족한 것은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산불 사례로 가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산불의 제도적 원인 중 하나인 산림청과 산림조합이라는 기득권이 다시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등장할 개연성이 매우 크다. 침엽수로 일원화된 조림이 문제라면 이들이 다시 횬효림으로 조림을 하도록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정책적 대안이라면 정치적 대안은 다르다. 현재 조림 정책과 실행을 산림청과 산림조합에 독점시키는 것이 맞는지를 묻고 이들의 기득권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숲관리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즉 정치적 대안은 늘 세력의 교체를 수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후정치의 문제는 기후위기 문제를 ‘사람이 해결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외면하지 않는데서 시작한다. 

우리 사회가 이번 산불로부터 어떤 정치적 해법을 찾게 될 것인가. 그것은 기후변화가 원인이라는 당연한 이야기 말고 그래서 어떤 권력구조와 이해관계가 그 변화를 이용해서 이익을 봤는지를 명확하게 밝히는데서 시작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산불은 앞으로의 산불과 그대로 이어질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