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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로맨스 각본과 설렘

 

로맨스 각본과 설렘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저는 화사라는 별칭을 1999, 그러니까 20세기부터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15년 후, 같은 이름으로 실력파 가수가 걸그룹 마마무의 멤버로 데뷔를 했지요. 이후로 요즘처럼 그 가수가 엄청난 집중을 받게 되면 제 오랜 이름을 빼앗긴 기분이 들기도 해요.

 

바로 1119일에 열린 제46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있었던 축하공연 이야기인데요, 연합뉴스에 따르면 배우 박정민과 함께한 이 영상은 1128일 기준으로 유튜브 조회수 554만 건을 기록했다고 해요. 그 여파로 공연 곡이었던 가수 화사의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 유튜브 조회수는 대한민국 인구수보다 많아졌고, 음원은 멜론과 벅스 차트 1위에 각각 올랐으며, 2016년 출간된 박정민의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은 박정민이 직접 내용을 낭독한 오디오북 역주행으로 예스24 오디오북 랭킹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짧은 공연 하나에 이렇게까지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사람들의 해석과 반응을 찾아보았습니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유행하며 영상을 반복 재생하는 '무한 루프' 현상이 일었는데 과몰입해서 심쿵하며 설렘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해요. 기존의 로맨스 각본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저는 맘카페를 중심으로 한 이토록 강렬한 반응에 대한 힌트를 로맨틱한 그림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르누아르, <연인>, 1875년, 캔버스에 유채, 130×175cm

 

전시 흥행이 보장된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여성의 얼굴만 보여주고 있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완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명화는 이처럼 커플을 당연한 듯 이성으로 구성하고, 거의 여성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지난 202411월호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이야기에서 소개했던 그림까지 보여드리면 더 확실히 알 수 있겠지요.

 

좌측부터 <부지발의 춤>, <도시의 춤>, <시골의 춤>, 르누아르, 1883

 

빈 대학 천장화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 1918)<키스>를 발표할 당시에 미완성인 상태로 전시되었음에도 오스트리아 정부가 구매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상업 디자인에 많이 활용되어 우리 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이 그림 역시 여성의 얼굴은 보이지만 남성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요. 남성의 품에 푹 안긴 여성의 감은 눈과 발그레한 등이 로맨스라는 코드(!)를 잘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1908년, 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180 x 180 cm

 

특정한 의미의 초상화가 아닌 이상, 커플이 등장하는 그림에서 여성의 얼굴을 중심으로 한 구도는 서양 회화의 전반에 걸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시선의 주체가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화가뿐 아니라 그림을 주문하고 소유하고 감상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들도 거의 남성이었는데, 소유물 또는 구경거리로서 여성을 보고자 했고,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은 대리만족을 위해 존재할 뿐 남성 관람객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면 안 된답니다.

 

서양의 회화에서 그림 속 여성은 인격체가 아니라 감상자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이미지로서 존재했고, 그러한 시각적 전통은 현대 대중매체에 고스란히 녹아있었죠. 키스 씬에서 두 사람을 비추던 카메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남성의 시선으로 눈감은 여성을 보여주던 게 얼마 전까지의 일이란 걸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재현의 문법이 이렇다 보니 성별이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도 권력을 독점한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되고, 감각하고 느끼고 행위하는 주체가 아니라 평가받는 이미지의 자리에 자신을 놓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요.

 

그런데 이번 영상은 남배우 박정민의 시선으로 여가수 화사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정민의 표정을 근접 촬영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성이 신발도 집어던지고 자유로운 몸짓을 하며 이별을 고하는데 남성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가 심지어 거절 당한 신발을 다시 챙겨주는 장면이라니, 2024년 한 해 동안 친밀한 관계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181명으로 집계되는 대한민국에서 환타지도 이런 환타지가 없을 것입니다.

 

지난 19일 청룡영화제의 가수 화사 축하공연 KBS 유튜브 캡쳐. 카메라는 박정민의 표정과 반응을 화사의 퍼포먼스만큼 중요한 비중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옷차림이나 몸짓에 대해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끼 부림으로만 해석하게 만드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로맨스 각본에 의하면, 가수 화사의 모습에 박정민은 반응해야 합니다. 아니, 반응 정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표현을 해야 하지요. 기존의 매체에서 보여준 남성들처럼 여성의 몸을 만지거나, 안거나, 키스를 하는 등 성애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정민을 그렇지 않죠. 상대의 의사 표현(이별)을 받아들이고, 그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만 볼 뿐이에요. 게다가 로 챙겨주기까지 하죠.

 

이 지점도 중요합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로맨틱하다고 여겨지던 기존의 각본과 다르게, “구두 가져가!”라고 말합니다. 붙잡아서 손에 신발을 쥐어주는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요. 데이트 폭력과 이별 살해, 스토킹이 이렇게 만연한 세상에서 저런 남성이 존재할 수 있다니..! 이게 바로 설렘의 포인트일 겁니다. 유니콘을 본 기분이 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펐습니다. 남성문화에 적응한 이성애자 남성들과 기존의 로맨스 각본에 따른 관계를 맺으며 쌓인 실망과 깨달음이, 이렇게 연예인들의 연기에 설렘을 느끼는 것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 너무 슬펐어요. 왜 애초에 성역할이분법과 위계가 명확한 과거의 로맨스 각본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성향과 성격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걸까요? 왜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관계의 성격에 대해 탐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선호와 취향이야말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려는 걸까요?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로맨스 각본에 문제의식이 큰 저는 이러한 현상이 두 연예인의 재능과 훌륭함을 재발견하게 함으로써 또 다른 소비 심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의 연애 경험이 적은 이들이 매체를 통해 학습한 설렘과 그 설렘의 이면을 경험한 이들이 발견한 새로운 설렘에 대한 차이를 펼쳐보고, 기존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연애라는 것에 대한 본격적인 의심과 질문, 성찰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