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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우리는 왜 그 얼굴들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왜 그 얼굴들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얼굴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 얼굴은 대개 너무 명확하고 익숙해서 질문할 필요가 없지요. ‘미술사는 이런 얼굴들을 양식과 연대기로 정리하고 위대함을 부여해 왔지만, 그 얼굴들이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다루기는 피했습니다. 새해를 맞아,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는 그 공백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려는 의지를 다시금 다져봅니다. 그림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시 보기 위해서지요.

 

작가미상,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서기 1세기, 대리석 조각, 2.08m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떠올려봅시다. 그의 초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학자들에 의해 프리마포르타형이라 분류되는 것입니다. 미술사 책에서 한 번쯤은 꼭 보게 되는 조각이지요. 젊고 균형 잡힌 몸, 당당하게 서 있는 자세, 말을 건네는 듯한 손짓. 발치에는 큐피드가 있는데, 신의 혈통이라는 표시입니다.

 

이 조각은 오랫동안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이 영토를 넓히던 시기를 우리는 팍스 로마나’, 그러니까 로마의 평화라고 부르지요. 이 말은 전쟁과 정복을 질서안정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 정치적인 표현이지만, 지금까지도 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이 조각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사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 얼굴에는 전쟁의 흔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전투, 불타버린 도시, 저항하다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늙지 않고, 다치지 않으며, 피곤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 초상은 침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침략을 질서의 일부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조각상의 흉갑을 근접 촬영한 모습.

 

조금 더 가까이 보면, 그의 갑옷에 새겨진 부조가 보입니다. 과거 전투에서 빼앗겼던 군기를 돌려받는 장면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전투의 혼란이나 죽음이 없습니다. 대신 복종과 조화만 남아 있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아니라, 황제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폭력은 평화의 조건처럼 처리되지요. 로마의 확장은 폭력이 아니라 안정이라고, 정복은 파괴가 아니라 보호라고 조각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고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더 익숙한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지요. 현대의 정치 지도자들은 더 이상 조각으로 남지 않지만, 사진과 영상으로 끊임없이 재현됩니다. 강한 눈빛, 단호한 손짓, 국기를 배경으로 한 장면. 이런 이미지들은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감정을 빠르게 전달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9월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뉴욕AP통신)

 

도널드 트럼프의 사진을 떠올려보면 이 흐름이 잘 보입니다. 그의 사진에는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죠. 크게 움직이는 손, 강조된 표정,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 이 얼굴은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결단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대통령을 납치하고 체포해도, 영토를 빼앗겠다는 발언도 질서를 바로잡는 행동처럼 보이게 됩니다. 저는 이 지점이 늘 불안합니다. 이미지가 생각보다 먼저 도착하고, 선악을 각인시키기 때문입니다.

 

요즘 더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침략이 다시 등장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침략은 늘 있어 왔으니까요. 더 걱정스러운 점은, 이제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군사적 압박과 불법적인 체포가 석유, 자본, 거래 같은 말들과 한 문장 안에 놓입니다. 폭력은 감춰지지 않고, 계산 가능한 선택지처럼 제시됩니다. 현재는 항상 긴급하고, 침략은 평온을 위한 해결책으로 정당화됩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7월 13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대선 유세 도중 총격을 당한 직후 오른쪽 귀에 피를 흘리는 상태로 주먹을 들어 "싸우자"고 외치고 있다./사진=뉴시스(뉴욕 AP통신)

 

이렇게 된 마당에야, ‘프리마포르타형아우구스투스가 구식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침략을 질서의 말로 바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전쟁을 평화의 이미지로 감쌌고, 정복을 안정의 모습으로 만들었지요. 반면 오늘날의 극우적 정치 담론은 그런 번역조차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이익이 된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삶이 무너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침략은 설명될 필요도 없이, 그냥 계산됩니다.

 

이 변화는 트럼프의 문제로만 볼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이 제시한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의 감각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는 오랫동안 보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힘을 과시하는 태도와 단호한 시선을 믿도록 말이지요. 그래서 침략이 질서의 말로 등장해도, 이익의 계산돼도 그것을 하나의 선택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프리마포르타형아우구스투스는 오래된 조각이지만, 그 얼굴이 만들어낸 감각은 아직도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지금, ‘미술을 다시 봅니다. 오래된 조각을 다시 불러옵니다. 과거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을 읽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우리의 현재를 보여주고 우리의 미래도 만들어냅니다. 누군가의 삶을 보지 못할 때, 정의는 사라지고 우리의 안전도 사라집니다.

 

새해가 되었으니,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이미지와 미술사에 담겨있던 그림/이미지가 감추었던 세계의 이야기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선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근대적 시간 개념이 주는 압박에 대해서도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복 많이 짓고, 받고, 나누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