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봄 관계망 그리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돌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요?
그 이미지에 사람이 등장한다면 어떤 이들인가요?

이 조각은 마리아의 얼굴을 비현실적으로 젊게 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가 ‘천재 예술가’라는 근거로 자주 호명됩니다.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형상은 ‘모성의 위대함’과 ‘절대적인 헌신’을 ‘숭고’하게 재현하고 있어요. 여기서 돌봄은 한 방향(어머니 → 아들)의 행위이고, 감정은 절제되어 있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돌봄을 제공하는 이는 어머니이고, 수혜자는 자녀(특히 아들)지만, 제공자를 ‘주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느낌이 있죠.

가장 유명한 현대의 예술가 중 한 명인 피카소가 15세에 그렸다는 이 그림은 우리에게 익숙한 성역할과 자본주의 시스템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자, 즉 취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리에 여성을 배치했고, 의료적 행위를 하는 전문가의 위치에는 중년 이상의 남성을 두었어요. 수녀(원장 수녀는 ‘Mother’라고 불림)는 아기와 환자를 돌보는 모습이고요.
사회적으로 권위를 부여받은 남성 지식인의 행위는 돌봄이라는 말과 바로 연결되지 않으며, 의사는 직업인이자 행위의 주체로 인식됩니다. 남성/의사는 ‘전문지식’을 통한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경제적 보상을 받겠지요. 여성/수녀(엄마)는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한 것이기 때문에 보상을 기대하면 안 될 거예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가 성별에 따라 부여한, 돌봄을 둘러싼 위계적 구조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지요.
우리는 사회라고 불리는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생산’ 노동과 다르게, 가정이라고 불리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에 의해 무상으로 행해지는 것을 돌봄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결국 돌봄을 가족 구성원에게 의존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었죠. 돌봄은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이 맡지만, 돌봄 행위자에게 주도권은 없어요. 가정에서 ‘해결’되지 않는 돌봄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서비스’로 구매해야 한다고 여겨지고요. 돈이 없으면 누구에게도 돌봄을 받을 수 없어, 비참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떨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돌봄에 대한 통념을 전통적인 회화가 그대로 재현하였다면, 돌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게 돕는 작업이 있습니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주관으로, 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 언니네트워크,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 함께서봄의 활동가들과 함께 만든 전시 《우리의 취약함이 기어코, 》의 두 번째 섹션 ‘난잡한 돌봄’ 공간에 마련된 관객참여작업 <돌봄의 관계망 그리기>이 바로 그것이에요.
지난여름에 한국여성민우회가 시민단체들과 함께 돌봄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돌봄에 대한 생생한 경험과 다양한 감정을 통해 중요한 통찰들이 도출되었어요. 저는 CA(Creative Advisor)로서 그 소중한 이야기들을 잘 전할 수 있도록 전시를 설계하고 설치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요, 전시 공간을 다음과 같이 5개로 나누고 두 번째 공간에 <돌봄 관계망 그리기>를 배치했답니다.

<돌봄 관계망 그리기>는 커다란 종이에 햇볕, 산, 강, 바다, 학교, 병원, 광장 등의 이미지를 군데군데 붙여놓고, 참여하는 방법을 안내해서 관객이 구경꾼이 아니라 작업의 참여자가 되게 하는 작업이었어요. 참여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금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많은 분이 단계에 따라 열심히, 신나게 참여해주셨답니다.
<돌봄의 관계망 그리기>는 네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회화와 다른 접근을 시도했어요. 첫째, 전통 회화가 돌봄을 완결된 장면으로 재현했다면 이 작업은 돌봄을 지속적이고 미완의 관계적 과정으로 재정의합니다. 관객이 돌봄의 관계를 발견하고, 선으로 연결하면서 돌봄은 결과가 아니라 현재진행의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에요. 그동안 굳이 호명하지 않았던 이들을 떠올리고, 돌봄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관계를 돌봄의 관점으로 연결하면서 놀라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어요. 기존의 미술이 이미지를 생산했다면, 이 작업은 관계를 생산하는 것이기도 했죠.
둘째로, 기존의 돌봄에 대한 통념은 돌봄의 제공자와 수혜자가 이분화되어 있고 양자(兩者)적으로 관계하며 위계적인 것으로 상상되지만, 이 작업에서 참여자들이 그린 선은 돌봄이 교차하고 확장되는 관계망이라는 것을 알게 해요. 각자의 취약함이 연결될 때 그것은 더이상 약함이 아니라, 상호 의존을 통해 강력한 안전망을 만들 수 있고요. 돌봄을 제공하는 ‘미덕’이나 돌봄에 의존하는 ‘민폐’가 아니라, 돌봄을 통해 ‘함께 살아남는 기술’을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셋째, 전통 회화에서 돌봄은 모성과 연결되어 숭고함과 희생의 감정으로 미화되지만, 이 작업에서 참여자들은 현재의 돌봄 관계나 단절된 관계, 또는 단절하고 싶은 관계나 앞으로 연결하고 싶은 관계를 떠올리며 감정이 공유되고 협상하는 정치적 장으로 작동합니다. 특히, 각자의 위치성을 반영한 선들이 서로 얽히고, 인간 뿐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하나의 거점을 이루며 돌봄의 중심이 해체되기도 했어요.
넷째, 전통적인 미술은 관객이 감상자로서 완성된 이미지를 소비하지만, 이 작업에서는 관객이 참여자이자 생산자가 되고 이미지의 일부가 됩니다. 관객 참여가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하면서 돌봄의 관계망을 확장하는 데에 기여해요. 다른 이들과 연결하고 연결됨으로써 서로가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받는 역할을 하게 때문에 참여 행위 자체가 또 다른 돌봄을 만들어내는 구조였습니다.

<돌봄 관계망 그리기>는 ‘난잡한 돌봄’이라는 개념을 시각화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는데, 애초의 의도보다 참여자들에 의해 더 많은 역동을 만들어졌답니다. ‘난잡한 돌봄’이란 더 케어 컬렉티브의 책,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2021)에 언급된 개념이에요. 친족 중심을 벗어나서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난잡함이란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차별하지 않고 돌봄의 윤리를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자는 의미이기도 해요.
전시는 마쳤지만, ‘미성숙’한 존재라고 규정되어 ‘보호’라는 이름으로 통제당하는 이들, ‘장애’로 분류된 특이성을 가진 이들, 성별 이분법과 강제적 이성애 제도에 의해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 특정 질병에 대한 왜곡된 통념으로 건강권을 침해당하는 이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사회가 밀어내고 방치한 이들 등과 돌봄으로 얽혀있는 이들의 소중한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공유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불안과 공포에 내몰려서, 자신도, 주변도 돌볼 수 없게 되는 이 미친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도록, 우리, ‘돌봄 관계망 그리기’를 계속 그려나가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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