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번에는 배우 겸 가수 설리씨의 죽음 이후 이야기되는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찬/반 입장을 각각 싣습니다. 찬성 입장은 (클릭하시면)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반론과 기고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품] 편집팀(nodonged@gmail.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불특정 다수에 대한 억압, 인터넷 실명제
미루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활동가
인터넷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해결책으로 인터넷 실명제가 거론되고 있다. 실명제 도입으로 익명의 가면을 벗겨내고 실명으로 글을 쓰게 하면 이전처럼 악플을 달지 못하거나, 혐오표현 등의 수가 줄어들거나 혹은 작성자 처벌이 쉬워질 것이란 주장이다. 그런데, 인터넷 실명제 도입으로 그러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최근 인터넷 악플규제의 대안으로 ‘인터넷 실명제’가 또 다시 화두에 오르고 있다. 여론은 물론 정치권까지 인터넷 규제의 방책으로 인터넷 실명제를 떠올리는 듯하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2007년 ‘건전한 인터넷문화의 조성’을 목적으로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한 바 있다. 인터넷 실명제는 2012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로 사라지기까지 5년 동안 시행됐지만 ‘(제도의) 목적에 비해 적용 범위가 매우 광범위’한 문제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만큼의 공익적 효과를 볼 수 없음’ 등을 이유로 폐지됐다(2010헌마47, 252).
무엇을 규제할 것인가?
무언가를 규제 하려면 규제 대상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범위 설정이 필요하다. 특정 게시물이 규제 대상에 해당하는 악플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법적 기준과 규제 대상이 되는 게시물의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단어 ‘악플’ 혹은 ‘악성 댓글’에 대한 명확한 사전적 정의는 없다. 다만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우리말 샘’에서는 악플을 “인터넷의 게시판 따위에 올라온 내용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를 하여 쓴 댓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악의적인 평가’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욕설, 폭력적 표현, 선정적인 표현 등만을 문제삼아 처벌하면 해결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댓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서 원 게시물에 해당하는 온라인 기사, 블로그 게시글, SNS 게시글 등에 대해선 어떤 기준으로 규제할 것인가?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표현 및 악성 댓글은 단순히 욕설에 그치지 않는다. ‘명백한’ 혐오나 비난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아도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발언이 존재하며, 이는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소위 ‘공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향한 공격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상대에 대한 원색적 비난은 물론 소수자나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허위정보를 광범위하게 유포시키는 과정에서 사회적 억압을 재생산하고 차별을 확대하는 발언들에 대해선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등 각종 소셜미디어를 통해 혐오표현과 허위 정보가 퍼지고 있다. 실명을 밝히고, 자신의 얼굴을 수만의 시청자에게 노출하면서도 특정 집단과 개인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고 해도, 소셜 미디어에 자신의 사진과 일상을 올려둔 계정으로 타인에게 악플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실명제가 과연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단순히 최초의 글을 쓴 한 사람만을 처벌하면 해결 될 수 있을까? 이처럼 규제 대상에 대한 개념과 범위가 모호한 상태에서 인터넷 실명제를 섣부르게 도입하는 것은 실제 악플 규제에 대한 효과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크다.
인터넷에서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헌법적 가치이다. 표현의 자유는 국가나 외부 권력에 의한 억압 없이 각자의 사상과 의견을 외부에 표현 할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인 수단이 된다. 그 중에서도 익명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가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재 정권 하에서의 정치적 발언, 억압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에 반기를 드는 존재들의 발언이 세상에 드러나기 위해선 개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개인이 특정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익명 표현의 자유는 독재정권 같은 분위기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의 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에게도 필수적인 권리다.
사회적 소수자에 위치 지어진 사람들은 억압적인 사회적 구조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정치적 견해를 밝히려 해도, 성소수자, 청소년, 이주민 등의 이유로 의견이 묵살되거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명제가 없는 지금에도 온라인상 개인의 행적을 추적하고, 개인의 신상을 파해치는, 일명 ‘신상털이’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명제가 도입 될 경우 사회적 소수자 전반의 표현의 자유는 심각하게 훼손 될 수밖에 없고, 사회 전반적으로 자기검열의 강화라는 악영향을 불러올 것이다. 결국 인터넷 실명제로 인한 표현의 자유 억압은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막기보다는 소수자 당사자와 그들의 지지자들의 발언권을 약화시킬 뿐이다.
인터넷 이용자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볼 것인가?
인터넷 실명제가 우리 사회에 미칠 악영향은 사실상 이미 입증된 셈이다. 이런 악영향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실명제 도입에 대한 여론 의견이 높아질수록 정치권에서도 이에 반응하여 유사한 법안들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일명 ‘악플방지법’으로 불리우는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해 포털 사이트 운영자에게 불법정보 감시 의무를 지우고 이를 소홀히 할 경우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댓글 작성자의 IP 주소를 공개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 게시자의 IP주소 공개 등 특정 악플 게시자가 아닌 불특정 다수를 억압 할 수 있는 규제 방안을 도입하는 것은 결국 모든 인터넷 유저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상정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악플은 페이스북 같은 실명을 기반으로 한 소셜미디어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사이트의 서비스 이용을 위해 이용자들의 본인확인 과정을 거치게 하는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도 지속된다.
온라인 게시물의 내용규제 제도는 이미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해 시행되고 있으며, 특정 개인에 대한 모욕, 비방, 허위에 의한 명예훼손 등의 경우 해당 게시물의 게시자를 특정하여 처벌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방법도 있다. 불특정 다수의 모든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규제책을 도입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선동 표현, 원색적 비난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수준을 높이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 노력이 필요하다.
'이전 > PR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PRISM] 2020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며 (0) | 2019.12.19 |
---|---|
[PRISM]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이지 않다 (0) | 2019.11.18 |
[PRISM] 장애인의 노동 및 장애인일반노조 창립준비과정 (0) | 2019.10.14 |
[PRISM] 홍콩 범죄인 송환법 반대운동을 둘러싼 몇 가지 물음 (0) | 2019.09.11 |
[PRISM] 노동정치 관점에서 본 선거제도 개혁방향 (0) | 2019.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