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세 번째 글로는 최근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홍콩에 대한 글을 싣습니다. 반론과 기고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품] 편집팀(nodonged@gmail.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홍콩 범죄인 송환법 반대운동을 둘러싼 몇 가지 물음
홍명교
교육원 회원, 동아시아사회운동 공부모임
‘범죄인 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의 시위가 3개월에 다다르고 있다. 6월 9일 대규모 투쟁으로 확대된 이 운동은 3개월째 국제지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시위가 촉발되자 한국에서는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부터 진보적 사회운동 조직에 이르기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홍콩 시민들을 지지한다는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 때문에 이 운동을 어떻게 봐야할지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도 많다. 단순히 ‘공산당 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위인가, 아니면 얼마 전 진보언론 ‘민플러스’가 러시아의 관방언론 스푸트니크와 중국 관방언론들의 보도를 인용해 소개한 것처럼, 미국 정부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가짜 민주화 시위인가?
어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곳에 중첩된 복잡한 역사 모순들이 겹쳐져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는 홍콩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 오늘날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청년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명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홍콩은 그저 각 논자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대입하는 하나의 조악한 예시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독자들과 함께 이 물음에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왜 유니온잭인가?
오늘날 홍콩 시위의 풍경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면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 깃발이다. 심지어 얼마 전엔 영국 비자를 갖고 있는 100여 명의 사람들이 영주권을 요구하는 작은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성조기를 든 사람들도 보인다. 민주화 시위에서 이런 풍경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식민지가 무슨 상관인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 점을 빌미로 중국 정부는 홍콩 시위가 서구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별 근거가 없다. 식민지 깃발을 드는 사람들은 시민들 중 소수에 불과하기도 할뿐더러, 그런 이유만으로 영‧미의 지원을 받는다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이 소수의 노인들은 왜 식민지 깃발을 드는가? 이 질문을 위해 우리는 19세기로 돌아가야 한다.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중국을 지배하는 자가 19세기를 지배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영국은 그것을 하려 했다. 19세기 중반 아편은 영국 동방무역의 주력 상품이었다. 대영제국은 부도덕한 무역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기면서 당시 영국은행 잔고량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유지했다. 청나라가 이에 반발해 아편을 규제하자 영국은 1840년 6월 청나라에 쳐들어가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불행히도 패배한 청나라는 1842년 영국과 협약을 맺고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영국에 할양한다. 1898년에는 신계 지역까지 99년간 임대하기로 조인해 오늘날 홍콩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이는 중국 지식인들이 제국주의와 근대에 대해 인식한 결정적 사건이었으며, 서구 제국들이 중국을 침략하는 신호탄이 됐다.
1927년 홍콩을 찾은 루쉰은 홍콩이 “하나의 섬에 불과하지만 중국 제 도시의 현재이자 미래”라 말한 바 있다. 그의 눈에 홍콩은 서양인 주인-고등 중국인-앞잡이를 제외하고 묵묵히 고생하며 살아가는 민중들에 의해 일궈지는 끔찍한 불평등 사회였다. 식민지라는 특수성과 자본주의가 만난 홍콩이 자본화‧상업화‧도시화로 갈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홍콩에도 제국주의 권력에 맞선 저항의 역사가 있다. 1922년, 홍콩항에서 일하던 중국인 선원 노동자들은 56일에 걸쳐 파업했다. 이는 1919년 중국 5.4운동 이래 막 태동하기 시작한 중국 노동자운동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당시 영국 총독부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했고, 투쟁은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는 광저우 등 광둥성 일대 노동자운동의 고조로 이어졌다. 중국 노동운동사에선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5년 상하이에서 시작된 5.30운동의 물결 역시 홍콩까지 이어졌었다. 중국 각지에서 약 600~700개의 운동 조직이 결성됐고, 170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홍콩에서는 광둥-홍콩 파업(省港大罷工)이 발생했다. 당시 홍콩에서 작성된 反영국 전단지에는 식민당국이 독이 든 물을 공급할 것이란 소문이 퍼졌는데, 이 때문에 6~7월 까지 5만 명, 7월 말까지 25만 명이 홍콩을 떠나 광둥의 다른 도시들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파업과 대규모 시위는 홍콩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힌다. 오랫동안 아주 값싼 노동력으로 일 해온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견디지 못했고, 1966년에 스타 페리 요금 인상에 대해 반발한다. 하지만 영국령 홍콩 정부는 시민들의 반발을 무시했고, 불만은 쌓여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7년,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노동 쟁의에 대해 경찰이 강경진압을 하자,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 민주적 지식인‧중고등학생‧대학생들이 동참했고, 홍콩 내 공산주의자들도 동참하면서 거대한 투쟁이 된다. 불행히도 이 투쟁은 당시 문화대혁명 후반기의 분위기에 휩쓸려 끔찍한 폭력으로 귀결되고 만다.
1981년 크리스마스와 1984년에도 도심 봉기와 택시 파업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이런 운동이 조직적인 흐름으로 이어지진 못 했다. 이는 아마도 홍콩에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했던 탓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홍콩에 왜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없었는가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식민통치의 불평등에 맞선 역사가 있는 홍콩에서 왜 유니온잭이 서슴지 않고 등장하는가. 여기에는 경제적 모순과 정치적 모순이 있다. 1997년 반환 이후 홍콩 시민들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됐다. 불평등은 심화됐고, 천정부지의 집값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식민지 시기 부동산 재벌과의 결탁으로 형성된 부동산 문제의 주체는 그저 영국 총독부에서 홍콩행정부로 대체됐을 뿐이었다. 정치적 민주 역시 보장되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시행됐던 부분 보통선거는 폐지됐고, 오늘날까지 완전한 의미의 일국양제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홍콩 반환의 과정엔 ‘시민’의 목소리가 제외돼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가 배제된, 국가와 국가 간 거래였을 뿐이었다. 신자유주의의 화신 마가렛 대처가 왜 중국에게 홍콩 반환을 약속했겠는가. 반환 이후에도 홍콩을 통한 중국과의 경제 거래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약속받을 수 있고, 게다가 홍콩이라는 경제적 거점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외양은 화려하지만 빈부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도시가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적극적 의지가 없었다. 단지 50년의 일국양제를 약속하고, 홍콩인들에게 ‘애국심’을 주입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중국의 엘리트들은 “홍콩인은 민족이나 국가의식이 결핍되어 있으며, 그들은 애국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여긴다. 홍콩인 입장에서 홍콩을 본 게 아니라, 대륙 정치엘리트의 입장에서 홍콩을 봤을 뿐이다. 그러니 중국 정부에게 홍콩이라는 이데올로기 공간을 ‘리밸런싱’하는 것은 지상최고의 임무가 된다. 정식언어를 보통화로 갈음하고, 현지 역사는 중국 국가 역사의 맥락 안으로 편입하려 했다. 홍콩이라는 독특한 문화공간 역시 ‘민족-국가’ 중국의 하위범주로 재구성하려 한다. 그래야 50년 이후의 ‘통일’을 예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홍콩을 중국과 통일하는 결과를 낳기보다는 경제위기와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경제적 모순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오히려 반중 정서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홍콩 시민들에겐 민주적인 시민사회를 구성할 기회가 주어진 적 없다. 합리적인 이들이라면 홍콩의 지역민족주의를 주장하기보다는 홍콩 사회의 민주주의와 노동권의 향상, 불평등 해소를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영국 총독부든, 중국 정부는 역사상 그 어떤 통치주체도 이런 염원을 형성을 기회를 준 적이 없다. 즉, 홍콩은 여전히 자본과 권력의 ‘식민지’인 셈이다.
빈부격차와 달팽이 아파트
현재 홍콩 시위의 주역은 두말할 것도 없이 10~20대다. 특히 각 대학 학생회들이 주도하는 학생운동은 시민사회운동 연대체인 민간인권전선과 더불어 이 운동의 투쟁 전술을 만들고 대중들을 조직해 이끌고 있다. 청(소)년들은 왜 이토록 크게 분노하고 있는가? 여기엔 중국식 감시사회에 대한 공포, 보통화 교육에 대한 문화적 반발 등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근본적 모순은 청년들이 지금의 홍콩에서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고 여기는데 있다.
홍콩의 아파트 방세는 뉴욕‧런던‧샌프란시스코 같은 세계 유명 도시의 2배에 달하고, 크기는 절반 수준이다. 반면 최저임금은 시간당 4.82달러(우리돈으로 5800원)에 불과하다. 빈부격차 역시 극심해서 전체 인구의 1/5가 빈곤층이다. 수치로 볼 때 인구 740만 도시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2017년 실시한 홍콩 달팽이방 플랫폼(全港關注劏房平台)의 조사에 따르면, 30년 이상 된 낡은 건물 중 약 42%가 쪽방으로 개조됐다. 아파트 하나를 평균 4.3개의 쪽방으로 개조한 점으로 미뤄볼 때 최소 6.7만 개의 아파트에 28만 가구가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집의 평균 임대료는 40~60만원이다. 집값도 매우 비싸서 4평짜리 초미니 아파트가 4억원에 달한다. 최근 분양되는 아파트들은 아무리 커도 9평이 되지 않는다. 이런 아파트를 분양 받는 건 대부분 8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 세대인데, 90퍼센트를 은행 대출로 마련한다. 평생 빚더미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 10년 동안 집세는 3배 이상 올랐고, 주택 중위가격은 중위가구 연간소득의 20배가 넘는다.
홍콩은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큰 도시다. 특히 최근에 그 갭이 가파르게 벌어져 반세기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2016년 스위스금융그룹 조사에 따르면 홍콩 사람들은 평균 주 50.11시간을 일하는데 이는 세계 평균보다 38% 길다. 우리나라도 노동시간이 아주 긴 나라에 속하는데 주당 42.8시간이다.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홍콩의 면적이 작아서 생긴 문제일까? 언뜻 보기에는 정말로 새로 집을 지을 공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관광객들이 자주 가는 홍콩섬이나 몽콕 같은 곳에 가면 높은 빌딩들이 옴닥옴닥 붙어있는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홍콩의 주거면적은 전체 토지의 7%에 불과하며, 녹지는 65%이다. 홍콩 사회운동은 골프장들을 폐쇄하고 공공주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600명의 부자들이 골프를 즐길 수 있는 54홀 코스 짜리 골프장 하나를 폐쇄하면 그 땅에 3만7천 명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홍콩 정부는 이 땅의 1/5도 안 되는 땅만 골라 주택을 개발하기로 했다. 정부가 소수 엘리트들의 편익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6월 9일,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 시위가 대규모 시위로 번지기 시작했을 때 미디어가 처음으로 주목한 집단은 바로 대학생들이었다. 왜 그런가? 단지 대학생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깨어있기 때문인가? 그것은 지나치게 일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생활에서의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홍콩 출신의 정치경제학자 존스홉킨스대 훙호풍 교수는 "많은 청년들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빠져나갈 길이 거의 없다고 보고 있으며, 이것이 현 상황에 대한 절박함과 분노의 배경"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단순하게 말하는 것을 피하자’
이처럼 홍콩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은 간단하지 않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서구식 민주 vs. 중국공산당 독재의 대결이 아니며, 최근 민중당 등 일부 한국 진보세력이 오판하듯 미국의 사주에 의해 작동된 ‘우익 색깔혁명’도 아니다. 극단적 독립파는 여전히 소수이며, 대다수 시민의 요구는 보통선거와 경찰 폭력에 대한 독립조사기구 구성과 사죄, 범죄인 송환법의 완전한 철회에 있다.
다시 말해 이 운동은 역사상 한 번도 민주적인 시민사회를 구성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홍콩의 인민들이 일군의 학생운동, 노동조합, 시민사회운동과 함께 민주와 평등, 자유를 위해 시작한 싸움이다. 이 안에는 다양한 입장이 있고, 서로 충돌하는 모순도 있다. 따라서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쉽게 판단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홍콩 문제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지지의 목소리를 보내야 하는가? 한국 사회가 그렇듯, 홍콩에도 복잡하게 얽힌 여러 모순들이 있다. 40만 명에 다다르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 지역민족주의와 중화민족주의의 충돌, 광둥화와 보통화 간의 문화적 대립, 독립파와 민주파 간의 의견 대립 등 복잡하다.
필자는 그 이해의 출발을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영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중국은 독재니까 영국 때가 좋았다고 하는 거지!”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그 출발일 게다. 영국 식민지 시기 홍콩의 보통 사람들의 삶은 결코 민주적이지도, 평등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았다. 이런 억압과 착취에 맞선 저항의 역사가 남긴 기억들이 오늘날의 홍콩에 남아있지 않을까?
홍콩 시위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읽을꺼리> 꼭지도 함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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