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흑’ 속에서 빛을 만들어냈던 중세 수녀들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인문학으로서 ‘사회’ 교과를 배울 수 없던 시대에, 암기과목을 너무 싫어했던 제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부분이 바로 ‘세계사’였어요. 사실은 젊고 똑똑하고 우아했던 전교조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전교에서 혼자 백 점을 맞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던 전무후무한 사건(!)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과거 교과서가 중세를 서구 중심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암흑의 시대’라고 규정했던 것과 달리, 여성주의 미술사로 본 중세는 여성의 예술 활동이 존중받고 도발적이며 재미있는 시도가 가능했던 역동적인 시대이기도 해요. 이 시기 여성들이 <바이외 태피스트리>와 같은 위대한 예술적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의 긴밀한 집단 협업 생산과 수도원을 통한 체계적인 교육 기회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중세에도 여성의 교육 기회는 신분과 환경에 따라 달랐는데, 귀족 여성과 수녀들은 책을 접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울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수녀원은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배움의 공간이었죠. 당시 귀족과 지주의 딸이 가부장제의 규율과 강제 결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합법적인 피난처’가 수녀원이었다고 하니, 똑똑한 여성들이 자수와 그림에 교묘한 정치적 풍자 코드를 숨겨놓으며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수녀들은 성서를 비롯한 종교 서적을 공부하며 필사를 했는데, 당시의 필사본은 오늘날의 책과 달리, 양피지를 준비하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금박을 입히는 여러 단계의 노동과 정교한 기술뿐 아니라 엄청난 기획력도 필요했어요. 필사본은 단순한 글의 기록물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가진 지식과 기술, 미적 감각이 집약된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수녀원에서 여성들은 성서와 신학 같은 종교적 지식뿐 아니라 라틴어와 문학, 음악 등을 충분히 접할 수 있었어요. 그 결과 단순히 남이 쓴 책을 베껴 쓰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글을 남긴 여성들이 등장할 수 있던 것이지요.
10세기 흐로츠비타(Hrotsvitha of Gandersheim, 935년경 ~ 1002년경)는 독일 작센 귀족 가문으로 태어나 간더스하임 수도원에 수녀로 들어갔고, 게르만어권 최초의 여성 작가이자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양 최초의 여성 극작가, 최초의 독일 여성 시인이 되었어요. 흐로츠비타는 고대 작센어로 “강한 목소리”를 뜻하는데, 이름처럼 남성이 주도하던 중세 문학계에서 여성의 관점으로 강렬한 지적 유산을 남겼답니다.

남성 중심적이고 엄격했던 중세 봉건 사회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라인강의 예언자(Sibyl of the Rhine)"로 불리며 독보적인 위상을 떨쳤던 여성도 있어요. 바로 신학, 음악, 의학, 과학, 문학을 모두 집대성한 ‘중세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평가받는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 1098~1179)인데요, 사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더 늦게 태어났으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르네상스의 힐데가르트 폰 비엥’이라고 해야 맞지요.
가톨릭 교회가 인정한 공식 예언가이자 성인인 힐데가르트는 최고의 학문적 업적을 남긴 성인에게만 허락되는 ‘교회학자(Doctor of the Church)’의 칭호를 받은 인물입니다. 그녀는 기록상 최초의 여성 작곡가이자 의학과 자연과학의 선구자였으며, 수녀원 안에서 비밀리에 사용하기 위해 약 900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최초의 인공 언어 ‘링구아 이그노타(Lingua Ignota)’를 창제하기도 했어요. 베네딕토회 수녀원장으로서 황제와 교황에게 교회의 타락을 매섭게 비판하는 서신을 보냈던 주도적인 사회적 리더이기도 했고요. 이처럼 그녀는 종교와 학문, 예술과 정치를 아우르며 중세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하고 영향력 있었던 ‘천재’로 평가받는답니다.

여성 필사본 화가들의 멋진 활약도 있는데요, 개인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중세의 화가들과 달리, 일부의 필사본 화가들은 종교적인 헌신이나 예술적 자부심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 속에 자신을 교묘하게 새겨 넣었다고 해요. 10세기 후반 성 던스턴(St. Dunstan, 909~988)의 서명과 자화상이 필사본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비슷한 시기 최초의 여성 채색 필사본 화가로 기록되었지만 생애 정보가 없는 엔데(Ende) 역시 자신의 서명을 남겼어요.

“Ende pintrix et Dei aiutrix(엔데, 여성화가이자 하느님의 조력자)”라는 이 역사적인 서명은 중세 미술 작품 중 시각적으로 가장 매혹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헤로나 베아투스》 말미에 등장합니다. 표현은 겸손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요,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익명으로 활동했던 당시 문화에서 엔데의 서명은 의도적인 존재 선언으로 해석됩니다.
엔데가 글로 자신의 존재를 남겼다면 필사본에 자화상을 남긴 여성들도 있었어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것은 12세기 독일의 수녀이자 필사 사제였던 구다(Guda)의 자화상이에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이 남긴 최초의 서명이 있는 독립적 자화상으로 평가받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랍니다.

구다는 설교집 본문에 나오는 단어 'Dominus(주님)'의 첫 글자인 대문자 'D'의 곡선 공간 속에 수녀복을 입은 자신의 전신을 그려 넣고, 라틴어로 “Guda, peccatrix mulier scripsit et pinxit hunc librum(죄 많은 여인 구다가 이 책을 쓰고 삽화를 그렸다)”고 쓴 띠를 쥐고 있어요. 종교적 겸손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본인이 이 책의 글을 필사하고 그림을 그린 당사자임을 선언함으로써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클라리시아(Claricia)의 자화상은 1200년경 독일 바리에른의 아우크스부르크 인근 수녀원에서 제작된 채색 필사본에 수록되어 있는데요, ‘Q’의 꼬리 장식 부분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여 문자를 장식했다는 점이 특징적이죠. 게다가 정숙한 수녀복 차림이 아니라, 머리를 가리는 베일도 없이 두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에 당시 세속 여성이 입던 소매가 넓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자신을 그려 넣었어요.

학자들은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통해 클라리시아가 정식 수녀가 아닌 수녀원 부속 학교의 학생이거나 세속의 장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문자의 일부를 자신의 신체로 대체하여 거룩한 성서 텍스트 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위트있게 심어 놓은 표현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죠. 신성함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토록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드러낸 클라리시아의 자화상은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마땅한 위대한 유산입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는 알아도, 클라리시아, 구다, 엔데의 이름은 처음 접하셨을 거예요. 왜 그럴까요? 미술사를 공부하는 일은 유명한 이름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혀 있던 이름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중세 여성들이 남긴 작은 서명과 자화상, 그리고 이름 없이 남겨진 수많은 흔적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사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다음 호에서는 수녀원이라는 공간에서 여성들이 함께 배우고 만들며 펼쳐갔던 예술의 세계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고 해요. 오래된 필사본 속에 남겨진 그녀들의 흔적을 따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미술사의 이야기를 만나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중세 여성들의 정교한 정치 풍자물 <바이외 태피스트리> (0) | 2026.09.17 |
|---|---|
|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지구가 불타고 있는데, ‘미술’이 다 무슨 소용이람! (0) | 2026.08.13 |
|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누드’와 ‘네이키드’의 경계를 탐구한 실비아 슬레이 (0) | 2026.06.10 |
|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누드화의 ‘전통’ 안에서 시도했던 ‘차이’를 존중하기 (0) | 2026.05.18 |
|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누드’ 이야기(3) : 과거의 누드화는 현대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0) | 2026.04.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