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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누드’와 ‘네이키드’의 경계를 탐구한 실비아 슬레이

 

‘누드’와 ‘네이키드’의 경계를 탐구한 실비아 슬레이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계속 말씀드리지만, 누드화는 특정 시기에 폭발적으로 유행해서 구체적인 기능을 했던, 권력을 독점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어요. 하지만 권위를 부여받은 남성 미술사학자들은 누드(Nude)’가 엄청난 예술적 성취인 양 찬사를 보냈죠. 대표적인 인물이 케네스 클라크입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4년, 119 x 165 cm, 우피치 미술관 소장

 

케네스 클라크는 20세기 영국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알려진 미술사학자이자,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1956누드:이상적인 형태에 대한 연구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개별 인간의 몸으로서 수치심을 동반하는 네이키드(Naked)’와 비교하면서 누드는 예술적으로 승화된 완벽한 신체라며 극찬을 했어요.

 

다시 말해, 누드는 이상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편적 인간성을 상징하며, 중립적인 감상자를 위한 고상한 미학이라는 것이에요.

 

티치아노(추정), <전원 음악회>, 1509~10년, 105 x 136.5 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러한 설명은 서양미술사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신화나 종교, 영웅 서사와 결합된 누드화는 고상한 예술의 영역에 놓이면서 욕망의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재현한 것으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여성주의 미술사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답니다. 1972년에 쓴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에서 존 버거는 서양미술에서 시선의 권력관계를 분석하며 네이키드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누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기 위해 벌거벗은 상태라고 재정의했어요.

 

린다 노클린, 그리젤다 폴록 등도 누드가 단순한 미적 형식이 아니라, 권력관계가 만들어낸 시각 체계라고 분석했습니다. 누드화의 관객은 남성이고, 특히 그림을 주문하고 소유할 수 있는 권력자이며, 신체는 성별화되어 여성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감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죠.

 

이러한 비판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페미니스트 예술가 실비아 슬레이(1916~2021)도 전통적인 누드화의 문법과 다르게 옷을 입지 않은 인물에 접근했습니다. , 개별성을 지우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재현을 위해 도구화된 모델이 아니라, 특정 인물의 초상화를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그린 것입니다.

 

 

실비아 슬레이, <앨런 로빈슨>, 1968년, 88.9 x 180.3cm (출처: https://www.ortuzar.com/exhibitions/sylvia-sleigh)

 

만약 앞의 두 그림을 볼 때보다 바로 위 그림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의 시각이 누구의 시선에 맞춰져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성 화가들이 그린 여성 누드화는 온라인에서 쉽게 검색되고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공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로 승인되어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실비아 슬레이의 작품은 검색이 어렵습니다. 제가 맨 처음 실비아 슬레이를 알게 되었던 때 다운받아 놓은 작품 이미지도 지금은 작가의 홈페이지에서조차 사라진 것도 있고, 검색해도 성인 인증을 해야 볼 수 있게 가려져 있는 것도 많답니다. 여전히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시각 구도가 강력한 세계에서는 남성에게서 문명의 옷을 제거한 재현을 불온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실비아 슬레이, <누워있는 필립 골럽>, 1971 (출처: https://sylviasleigh.com/sylviasleigh/Sylvia.html)

 

가부장제 사회의 전통적인 예술 창작 공식에 따르면, 예술가는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에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과 같은 존재인 것이죠. 그 예술가의 자리에는 항상 남성이 있었고 아름다움의 대상은 여성이 되었는데, 실비아는 창조자의 위치에 자신을, 대상의 자리에 남성을 배치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선의 구조와 예술 창작이 상징하는 바를 정확히 미러링해 보여준 것이에요.

 

1950년대부터 자신의 인간관계를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했던 실비아는 다양한 사람의 나체를 끊임없이 그려내다가 누드화의 문법을 알아차린 이후, 시선의 구조를 보여주는 그림들을 패러디하기도 했습니다.

 

앵그르, <터키식 목욕탕>, 1852~59년, 1862년 수정, 108cm × 110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실비아 슬레이, <터키식 목욕탕>, 1973년 (출처: https://sylviasleigh.com/sylviasleigh/Sylvia.html)

 

실비아는 다양한 사람들을 그리면서 남성의 몸과 함께 누드의 시선을 탐구했습니다. 하지만 실비아의 그림은 남성 화가들이 그렸던 누드와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천상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며 모델이 그 누구여도 상관없이 도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을 제목에서 지시하고 있습니다.

 

실비아 슬레이, <이중 이미지: 폴 로사노>, 1974년, 142.2 × 108cm, (출처: https://www.ortuzar.com/exhibitions/sylvia-sleigh/works#10)

 

실비아 슬레이, <제국의 누드: 폴 로사노>, 1975년, 106.7 x 167.6cm (출처: https://www.ortuzar.com/exhibitions/sylvia-sleigh/works#8)

 

 

또한 특정 계층과 성별의 수요를 염두하고 제작하면서도 이상적인 형태를 연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던 기존의 누드화와 다르게, 실비아는 자신의 발견을 공유합니다. 여성을 평가하던 남성의 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태닝(Tanning)한 몸을 바라보는 관객을 응시하는 설정을 통해 시선의 이중적인 구조를 드러내고, 누드화의 전통대로 누운 포즈로 시선을 안전하게 거두고 있는 남성을 통해 낯선 감각을 유도하며 그러한 누드화의 문법이 제국주의적인 지배 양식과 닮아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성 중심의 미술사가 외면한 실비아의 그림은 여전히 인터넷 정보의 바다에서 배제되고 있지만, 누드와 네이키드의 경계에서 누드화의 문법과 시선의 구조를 드러내고 해체하려 했던 의미 있는 시도들이, 다른 이들 뿐 아니라 자신의 몸조차 평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대인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