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가 불타고 있는데, ‘미술’이 다 무슨 소용이람!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돌봄과 인권을 위한 운동 조직 내의 위계적인 문화에 문제 제기한 이를 장기간에 걸쳐 과시적으로 공격하고 저주하는 것도 모자라, 연대자들까지 협박하는 ‘선배’ 세대의 공개적인 행태를 지켜보는 마음이 참담합니다.
“페미니즘은 망조”라는 50여 개의 글로 페미니즘과 퀴어 운동, 진보 학계의 담론을 비난하고 특정인을 겨냥하여 소수자 혐오와 외모 평가 등을 시전하다, 논란이 일자 사과문을 쓰고 비난글을 삭제하며 ‘검열’을 주장할 수 있는 뻔뻔함도 목격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민물의 영장’이라는 위치에 놓고는 지구 행성과 다른 생명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고 채굴해온 인간의 ‘문명’이 지구를 불태우고 있어, 최소한의 활동 후 시체처럼 누워있어야 하는 상태를 자책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의 권력을 성찰할 수 없는 이들이 저지르는 ‘무오류의 오류’로 인한 폭력으로 수많은 마음이 다치고 있는데, 앞서 태어나 움켜쥔 권력으로 나중에 태어난 이들을 마구 공격하는 이들이 고립되고 있는데, ‘미술’이 다 무슨 소용일까요?
폭력을 간접적으로 겪으며 글을 쓰고 또 지우다가, 떠오르는 그림을 소개하기로 합니다. 바로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의 그림들입니다.

이 그림은 각종 자연재해와 흑사병, 오스만-유럽의 전쟁 등 ‘작은 천년 종말론’이 떠오르게 된 시기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불’을 떠올리게 되는 통념 속 지옥의 모습과 달리, 매우 구체적인 잔인함이 담겨 있습니다.

자본과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세속적인’ 모습이란 SNS를 이용해서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고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로 인해 자본을 축적하지 않더라도, 조롱과 혐오가 놀이가 된 시대의 사이버 불링은 엄청난 쾌락을 제공하고요.
500년도 더 된 이 그림들이 담고 있는 참혹함이 온라인에서 펼쳐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묵묵히 움직여온 이들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작가’의 전시를 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이 투여되고, 죽은 동물의 사체를 보기 위해 54만 명이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가는 대한민국에서, ‘미술’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을지 좌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입추가 지나자 불볕 더위 속에서도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변화를 믿으며, 찬찬히, 얽힌 실타래를 하나 하나 풀고, 뜯어진 곳을 한 땀 한 땀 꿰매어 가는 마음으로, 쌓고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반면교사 삼아, 끝없이 움직이며 성찰하기를 다짐해 봅니다.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며 정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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