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단!마디> 꼭지는 평등사회노동교육원 단병호 대표(민주노총 지도위원, 17대 국회의원)의 노동 및 사회현안에 대한 논평과 제언을 싣습니다. 이번 호의 글은 5.18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편집자주] |
5월! 다시 광주를 생각한다
2021. 5.
5월의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보면서도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 같은 묵직한 아픔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그날이 가까워오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젖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5월의 노래’와 ‘광주 출정가’를 부를 때면 뼈 마디마디 세포 하나하나까지 분노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일 모레면 마흔 한 번째로 맞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돌아가신 영령들을 생각하며 가만히 5월의 노래를 불러본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그 옛날 힘차게 팔뚝질을 하며 부르던 때의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 시공(時空)의 차이만큼이나 어느새 역사의 외부자가 된 것 같아 두렵다. 광주의 5월은 지금도 진행형인데!
1980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효시(嚆矢)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신군부의 폭력적 만행에 결사항쟁으로 맞섰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영령들과 광주시민들의 위대한 희생으로 이 땅에 민주주의의 싹을 틔울 수 있었다. 그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받친 뜨거운 피와 항쟁 정신은 침묵하던 양심의 문을 열어젖혔다. 학원가의 학생들과 노동현장의 노동자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선 저항의 길에 나섰고, 마침내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전두환 정권을 몰락시켜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우리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자하고 발전시켜 온 자들이고, 동시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수혜자이고, 채무자이기도 하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정신을 계승하고, 감사하고, 위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광주로 향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가 기억하며 소중하게 보듬어 안고 가야할 우리의 역사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바르고 참된 역사의 이정표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광주 민주항쟁에 대해 신군부가 자행한 폭압적인 학살만행은 드러난 것보다 은폐되어 있는 것이 더 많다. 죽임을 당한 자는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다. 총에 맞은 사람은 있는데, 발포를 지시한 사람은 없다. 사라진 사람은 있는데,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온존한 역사의 자리에 올려놓으려면 이 모든 실체적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수백 명이 학살당하고 백만 명의 도시가 통째로 결단이 났었는데도 진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 중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제대로 사죄한 사람이 없다.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씨가 5·18광주민주화운동 영령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진심을 굳이 폄하해야 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사죄로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다. 진정한 사죄가 되려면 5·18광주민주화운동 학살의 전 과정을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는 노태우의 직접 증언과 자신이 가지고 있을 관련 자료들을 모두 공개하고 진실을 밝히는데 협조해야 한다. 그리고 회고록에 ‘광주 사태’ ‘유언비어로 인한 유혈 사태 발생’ 등 잘 못 기술된 내용들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러한 조치를 행하지 않는 한 그의 아들이 수십 번 묘역을 찾아 무릎을 꿇는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사죄가 될 수는 없다.
최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의해 은폐된 사실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M60 기관총을 설치해 시민을 향해 난사하고, M1에 조준경을 달아 시민을 저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또 신혼부부와 네 살배기 어린아이를 사살해 암매장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리고 ‘북한 특수군 침투설’도 거짓이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더디지만 역사는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어 다행한 일이다. 역사는 영원한 은폐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저지른 학살만행은 사법적 단죄는 비껴갈 수 있었을지언정 역사적 단죄까지는 절대 비껴가지 못할 것이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병사 등이 피해자의 유가족을 만나 진실을 고백하고 사죄하겠다는 뜻을 전해오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그들의 용기를 기꺼이 받아 안아야 한다. 그들도 정치군인들의 야욕에 동원된 희생자일 수 있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보호하고 지켜야 할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눠야 했던 그 순간 얼마나 참담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과거의 굴레에 갇혀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그 굴레를 벗어던지는 용기를 내준다면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가 더 빨리 바로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5월은 내년에도, 그 다음 해도, 또 그 다음 해도 그렇게 계속된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시간의 길이에 비례해 잊어져도 되는 역사가 아니다. 불이 꺼진 도청에서 항쟁의 마지막 순간 민주주의의 재단에 자신의 붉은 피를 뿌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좌절감 속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부활할 수 있다는 오직 그 믿음 하나로 어연하게 죽어간 영령들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암흑에 쌓인 도시에서 “시민여러분 계엄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말고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던 처연한 목소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시신 곁에서 울음마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분노하고, 행동해야 한다.
아직도 인터넷선상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 사태’로 명명하고, 온갖 수많은 왜곡된 기사들이 버젓이 나돌고 있다. 그날의 수많은 진실의 조각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학살의 주범들은 조금도 참회하지 않은 채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된 역사적 부활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나가야 할 역사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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