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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진보] 다시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하자

이장규 회원님의 <건강과 진보>의 마지막 글입니다. 그간 애써주신 이장규 회원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주]

 

다시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하자

 

이장규

평등사회노동교육원 경남 회원, 한의사

 

현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노동시간 단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전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최근에는 좀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전세계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실제로 한국인들이 일하는 시간은 통계보다도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영세자영업자나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은 일반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새벽배송 등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생각지도 못하는 시스템이 한국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문직 등 상위중산층조차 예외가 아니다. 가령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전공의들의 집단사직 사태 또한 어느 정도는 이것과 관련이 있다. 전공의들의 노동시간이나 노동강도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5 등 민간대형병원은 전임의 등 제대로 된 의사를 채용하는 대신, 의사 중에서는 가장 저임금이고 장시간 노동을 시킬 수 있는 값싼 전공의들을 활용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어왔다.

 

지역의료나 필수의료 및 공공의료에 의사를 배치할 방안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채, 단지 2천명이라는 숫자에만 집착하는 의대 증원 역시 이대로 가면 사실은 민간대형병원 자본의 이익에만 봉사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수도권에는 대형병원 분원의 형태로 6600병상이라는 막대한 규모의 증설이 예정되어 있다. 이 대형병원 분원들이 개원하는 시기와 증원된 의대에서 의사가 배출되는 시기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 이들이 값싼 전공의를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대 증원의 진짜 목적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의료계 내부에서는 꽤 퍼져있으며, 현재로서는 그게 아니라고 쉽게 부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전공의들이 비상식적인 장시간 노동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문의 자격을 따고 나면 이후에는 상당한 고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의 기대수익을 위해 현재의 고생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의 기대수익 역시 상당수 분야는 장시간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한 경우가 많다. 공공병원이 거의 없고 민간대형병원은 전임의를 제대로 채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부분은 개원하게 되는데, 개원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지만 이는 모두 의사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또한 행위별 수가제이며 환자 1명당 수가는 외국에 비해 매우 낮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개원하더라도 투자금 회수와 높은 수입을 위해서는 더 많은 환자에게 더 많은 진료행위를 해야 하고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의사들의 의대 증원 반대가 타당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의사 숫자는 당연히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매달릴 경우 실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의사들 또한 장시간 노동을 통한 더 많은 수입 확보라는 현재의 한국을 지배하는 시스템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기업 노동자건, 자영업자건, 특수고용이건 사실은 대부분 비슷하다. 낮은 기본급을 장시간 노동을 통해 보충해야 하므로, 잔업특근이든 장시간 영업이든 새벽배송이든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서라도 더 많은 수입을 얻는 것을 추구한다. 자본 또한 주어진 시간 내에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신경쓰기보다, 장시간 노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값싸게 사람을 부려서 생기는 가격경쟁력에 주로 의존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시작된 이후 몇십년 동안 지속되어 온 시스템이기에 하루이틀에 바뀌기도 사실은 쉽지 않다.

 

장시간 노동의 폐해는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악영향을 미친다. 가령 지역정치나 시민사회단체 활동 등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고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가 소수 정치인이나 활동가 위주로 운영되는 것도 이런 공동체 활동에 참여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족들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은 판에 공동체 활동을 위한 시간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가족을 꾸리거나 아이를 낳고 기를 시간이 부족하니까 아예 결혼이나 출산을 생각지도 않는 사람도 많다. 한국의 심각한 저출생도 장시간 노동이 그 배후에 깔려있다.

 

기후위기 문제에도 장시간 노동은 악영향을 미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 위주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에선 이런 탈성장론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경제성장을 통해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현재보다 수입이 좀 줄어들더라도 더 많은 자유시간을 가지는 것이 과연 선택하지 못할 대안인가? 물론 그 대신 안정성은 보장되어야 한다. 즉 수입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도 각종 사회복지나 공공서비스가 기본적인 삶은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삶이 보장된다면 (이미 한국 경제는 규모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지금보다 경제성장이 줄어들고 수입이 좀 적어지더라도 더 많은 자유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인구가 줄어들고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이미 불가능한 앞으로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원래 사회주의자 등 좌파의 핵심적인 주장은 임금인상이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이었다. 자본론만 읽어봐도 이는 확실하거니와, 초기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요구는 8시간 노동제 등 노동시간의 단축이 주된 슬로건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노동운동은 노동시간 단축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6시간 노동 등도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데도 이런 주장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사실은 단시간 노동이나 파트타임 노동도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 이게 오히려 일자리 나누기의 역할을 하고 각종 돌봄이나 가사노동 등을 분담하게 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시간 노동이라도 노동자의 권리는 확고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이걸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래노동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노동시간은 단축되어야 한다. 아파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만 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예전의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장시간 노동과 더 많은 소득 추구라는 경쟁적인 환경은 각종 스트레스를 초래함으로써 건강에 매우 악영향을 미친다. 건강은 사회진보와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노동조건의 진보가 바로 건강의 진보이기도 하다. 다시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하자. 좌파의 핵심적인 주장을 되살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