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후정치의 시선

[기후정치의 시선] 기후정치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새로 <웹진 e-품>에 기후정치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선뜻 연재를 수락해 주신 기후위기비상행동에서 기후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계신 김상철 위원장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편집자주]

 

기후정치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김상철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위원회 위원장

 

올바른 다이어트란 무엇인가? 기후정치를 다루는 첫 칼럼의 첫 질문으론 생소할 수 있겠다. 하지만 기후정치보다야 다이어트나 낯설지 않으니 시작점으로 잡아보자. 일반적으로 다이어트는 몸무게를 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양분을 섭취하고 살이 찌는 것은 당연한 신진대사다. 몸은 음식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운동을 통해 사용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몸에 축적한다. 우리가 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근육이나 지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축적된 에너지 덩어리가 살아있는 신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그러니까 남아도는 것 자체가 아니라 남아돌아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어트는 바로 문제가 생기는 살을 덜어내는 노력이다. 그래서 다이어트는 남아도는 살을 빼는 것이고 그것의 결과는 몸무게가 줄어드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단기간에 살을 빼는 방법은 굶는 것이다. 애당초 살은 먹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먹는 행위를 중단하면 몸무게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빠르게 무게는 줄일 수 있지만 후유증이 남는다. 역설적이게도 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다이어트가 오히려 건강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이어트의 방법은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을 조절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평소에 사용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살로 축적되는 에너지를 줄인다. 그러면 몸 전체에 남아 있는 에너지의 총량 자체를 줄일 수 있다. 먹는 것을 조절함으로서 유입량을, 운동을 통해서 에너지의 사용량을 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방법이 다이어트의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이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개인의 몫과 구조의 몫

 

다이어트의 가장 큰 적은 일상이다. 그동안 살아왔던 일상의 환경과 조건이 현재에 이르는 경로였다면 그런 일상이야 말로 현재의 몸 상태를 만들어낸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사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나. 그러다보니 ‘올바른 다이어트’의 방법은 다 알고 있지만 실제 실행해서 성공하는 사람이 적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각종 의학적이고 화학적인 요법이다. 물리적으로는 살을 인위적으로 덜어내는 외과수술을 할 수도 있고 화학적으로는 식욕을 억제하는 약이든 에너지의 흡수를 방해하는 약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이 건강한 다이어트의 방식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관건은 현재의 조건에 이루게 한 그 환경과 조건이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문제적 상황은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화학적인 요법이든 의학적인 요법이든 궁극적으론 현재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부수적인 도움일 뿐 궁극적으로는 기존에 익숙했던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직관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기후위기는 개인인 수준에서의 다이어트를 지구적 스케일로 넓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인간을 이루는 세포가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유는 그저 이미지로서 유효할 뿐이지만, 기후위기의 문제를 다루는데 필수적인 유입과 배출 그리고 사용에 따른 축적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후위기는 자연을 자원화함으로써 나타난 지구 차원의 신진대사가 만들어낸 결과다. 기본적으로 지구적 신진대사는 오랫동안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안정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지만 불과 200년이 넘을 뿐인 자본주의 방식의 신진대사는 균형 상태를 무너뜨렸다. 온실가스가 지속적으로 축적되면서 인류의 생존 조건 자체인 지구의 생태계를 위기에 빠뜨렸다. 문제는 이런 위기가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니라 인간의 억지스러운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로 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기후정치의 순간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비만을 부르는 식습관처럼 억지스러운 것임에도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번영의 상당수가 이를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또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가능케 하는 물질 조건과 더불어 개인적인 부를 형성하는 생산 과정 역시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그러니까 자연과의 신진 대사라 할 수 있는 노동을 상품화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위기라는 과정은 자칫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가능한 묘수, 그러니까 지금과 같이 먹으면서도 정기적인 수술이나 강력한 화학요법으로 체중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장 죽게 생긴 마당에 각각의 사정을 살필 순 없다고 아예 금식을 선언해서 굶을 수 있는 부분부터 굶어보자고 말할 수도 있다. 기후위기 운동이 새로운 ‘정의’ 운동과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지만 이것만으론 불충분하다.

 

우리는 온실가스의 유입과 유출 과정에만 신경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초과해버린 온실가스의 축적량 자체를 줄여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상당 기간 동안은 기존에 넘쳐버린 임계치 너머의 저량을 줄이는 데 소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대책들이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이 과정에서 ‘기후위기는 가짜다’라는 주장과 더불어 ‘좀 더 극단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양 극단이 나타날 수 있다. 다이어트의 기저효과 같은 것이 기후위기 대응과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 때 필요한 것이 기후정치다. 우리는 기후정치의 쓸모를 처방을 찾아내고 이를 적용하는 ‘처치’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기후정치가 필요한 순간은 오히려 처방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포기하는 순간’을 넘어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후정치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우리의 기후위기 운동이 밀어붙인 힘에 의한 변화가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록 이에 대한 반동이 더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정치는 단지 기존의 환경정치를 확대한 부문 정치도, 익숙한 노동정치를 대체하는 대안 정치도 아니다. 오히려 기후정치는 기존의 정치문법을 바꾸는 언어체계 같은 것이다. 노동이 지구와 인류라는 종 간의 신진대사를 가능케하는 기제라면 기후정치는 오히려 새로운 노동정치의 이름일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시대에서건 자연을 통한 신진대사가 아니라면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고 이는 결국 새로운 노동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각에서 종합으로

 

우연한 기회에 매우 특별한 매체에 기후정치에 대한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우선 1년 정도의 시간을 염두에 두고 기후정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구체적인 관점을 담아 제시하려고 한다. 이론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현상적이지도 않은 내용일 것이고 이를 통해 ‘지금-여기’의 기후정치 고민을 전하는데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조각 조작 흩어지는 방식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첫번째 글에서 제안하는 총체적인 관점으로 종합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연재를 통해서 기대하는 바가 그렇고, 이 글을 읽는 분들 역시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