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e-품>에 젠더로 보는 미술사 이야기를 연재해 주시는 화사(이충열) 작가님은 지난 두 번의 교육원 후원 전시회의 기획총괄을 맡아주신 여성주의 현대미술 작가님입니다. 개인적으로 개편되는 연재 중 가장 기대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
우리 사회에서 '민중'은 누구인가?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기후 위기로 덥고 습한 날이 이어지면서 외출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마침 파리 올림픽 기간이라 공중파에서는 온통 올림픽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데요, 휴전국가답게(?) 총, 칼, 활을 세계에서 제일 잘 다루는 한국 선수들의 활약으로 텔레비전을 즐겨 보지 않는 저도 모니터 앞에 멍하니 붙어 앉아 낮동안 녹아내린 뇌를 응고시킵니다. 그런데 정작 파리 시민들에게는 외면당했다는 파리 올림픽의 마스코트를 보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프리주’라는 이름의 이 마스코트는 고대 로마에서 해방 노예에게 씌어주어 ‘자유’의 상징물이 되었다는 프리기아 모자에서 유래되었는데요, 어느 유명한 그림의 주인공이 쓰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모자로 저에게는 각인되어 있어요.
그 그림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전세계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데요, 프랑스를 상징하는 그림이라 여겨질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호명되어 각종 포스터에 등장하기도 했고 여러 가지 버전으로 패러디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태극기와 소총을 든 모습으로 패러디되어 6.25 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시청 앞에 걸려있던 적도 있답니다.
이 이미지들의 원본이 되는 작품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이고,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가 1830년에 있었던 7월 혁명을 기리며 그해 가을에 그린 그림입니다. 한반도의 역사도 잘 모르는 마당에 싸움 잘하고 배 잘 만들어서 여기저기 침략하며 문화재 도둑질을 해서 떵떵거리며 잘 사는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게 억울하기도 하고, 7월 혁명의 의미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안 나기 때문에 구체적인 배경은 생략할게요. 다만, 이전에는 교황청이나 왕과 귀족 등 지배계급이나 매우 부유한 상인이 원하는 내용만 그림으로 제작될 수 있었다면, 신분제가 붕괴되고 ‘개인’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되면서 화가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맥락만 전해드립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개인으로서 화가 들라크루아가 기존의 권력자들이 너무나 싫어했을 7월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혁명을 위해 흘린 피와 희생을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아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미술사 시간에 중요한 작품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시민 혁명을 그린 그림에 여성의 가슴을 노출시키고 부각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목에 힌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니, 아... 저 여성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여신’이었던 거군요. 그런데 ‘여신’의 가슴 노출이 바로 납득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분이 ‘여신’이면, 그 주변에 그려진 분들은 ‘남신’일까요? 아닙니다. 제목에서 알려주듯, 저들은 ‘민중’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민중’을 남성으로만 상상할 수 있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남신’이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지도 생각해볼 수 있지요.
어쨌든 이 그림에 등장하는 ‘민중’에는 어린아이, 중산층, 노동자 등 다양하지만 모두 남성일 뿐, ‘여자 사람’으로서 ‘민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찾아보면, 이 그림이 상징하는 바와 화면 구도와 색감과 배치 등을 앞다투어 칭찬하며 의미를 부여하기 바쁘더라고요. 물론 시민사회 혁명에 여성은 참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림을 변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여신’의 풍만한 가슴을 그토록 강조해야 했던 이유까지 설명할 수는 없을 거예요. 깨끗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아름답지만 무기력한 여성으로 그렸던 ‘여신’을 재현하는 전형적인 문법과 다르게, 때 묻고 힘찬 혁명의 리더로 그렸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여성인권을 지지하는 그림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 경우에도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가 ‘누드화’의 전통에 따라 여성의 가슴을 노출시켰다는 것까지 방어하지는 못할 겁니다. 만약 화가가 대부분 여성이고 미술의 소유자와 감상자도 여성이 훨씬 많았다면, 여성 누드화가 주요한 장르로서 자리 잡지 않았을 것이고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그림에도 여성의 저렇게 드문 형태의 가슴을 굳이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고요.
당시에 이 그림은 여신 재현 방식과 정치적인 이유로 비난받거나 거부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며 19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 시대와 그림이 지니는 한계는 외면한 채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과거에 의미 있었던 것에 권위를 부여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문화 식민지 대한민국의 문화는 현재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성찰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글은 웹진 품에 연재하는 제 첫 글입니다. 첫 단추는 매우 중요하지요. 그래서 이 어마무시하게 유명한 ‘민주주의’에 대한 그림을 건드리기로 했습니다. 아직까지 이 그림을 비판한 것을 본 적이 없거든요. 저만 소리 높여 이 그림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그림을 난도질하려 하니 긴장이 되었어요. 아무리 강심장인 저도 한마음으로 똘똘 뭉친 비난은 두려우니까요. 그래서 여러분께 도움을 요청해봅니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식민지교육을 받은 이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그놈의 교육은 무엇에든 숨어있는 이데올로기를 끄집어내어 비판하면 ‘순수하지 못하다’고 오히려 비난하면서 우리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게 만들고, 특히 이미 권위가 주어진 것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십사 하고 말이지요. 저는 이렇게 ‘착한 백성’ 만들기로서의 교육이 너무 못마땅하고, 눈앞의 것들을 의심하지 않는 태도가 정말이지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문화의 근원이 되는 서양의 시각예술을 헤집어보려고 합니다. 처음이라 순한 맛으로 썼습니다. 앞으로 기대해주세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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