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세 번째 글입니다! [편집자주] |
'위대함'이라는 콩깍지 벗어내기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위대한 예술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으신가요?!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의 어머니 헨델’, ‘음악의 신 베토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도 ‘르네상스 3대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도 들어본 기억이 있을 거에요. 최근에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오랜 기간 그렇게 외워서 시험을 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위대한 예술가’에 대해 논쟁의 여지 없이 정답을 만들어 외우게 했던 것이 바로 일제 식민지 교육의 특징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적은 것 같습니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고, 모든 백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지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고서야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적 교육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고, ‘말 잘 듣는 식민지 백성’ 만들기로써 공교육이 시행되었어요. 일본은 역사와 맥락을 제거하고 뭐든 납작하게 만들어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는 데 선수잖아요. 그래서 서양의 많은 지식과 정보를 재빨리 수입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여러 상황은 지워버리고 특징을 잡아서 이름표를 붙여 외우기 좋게 만들어버렸답니다.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 ‘신’이나 르네상스 ‘천재’처럼 미리 규정을 해놓아 더 이상 논쟁하거나 의심할 여지를 없애버리는 거죠. 그렇게 스스로 사고하고 비판하고 질문할 능력을 말살한 식민지 교육은 권위를 추종하고 권력에 복종하는 연습을 시켰고, 그것을 잘 받아들인 이들이 친일 행위를 하며 권력을 독점했던 시대가 있습니다.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해졌고요.
식민지교육으로 인해 우리는 ‘위대하다’, ‘훌륭하다’ 고 인정받은 인물이나 작품에 대해 비판하기 어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했다고 그의 모든 업적이 사라지지 않고, 어떤 부분의 문제가 있다고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잘못이나 문제를 감출 것이 아니라 잘 알림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안타까운 일은 뼛속까지 사대주의적이고 권위적인 미술계에서 특히 많이 일어납니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4-2001)은 어렸을 때 장티푸스에 걸려 청각장애를 갖게 되었다. 17세에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문하에 들어가 동양화를 사사하였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까지는 연속으로 4회 특선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2, 1943년에는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반도총후미술전≫, ≪애국백인일수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작가는 운포(雲圃)라는 호를 썼으나, 광복 후에는 운보(雲甫)라고 쓰기 시작했으며 일본화풍 청산을 위해 적극적인 모색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1947년에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 1920-1976)과 결혼하면서, 1947년부터 1972년까지 거의 매해 부부전을 개최했다. 한국 전쟁 때 군산으로 피난 가 있는 동안 반추상과 입체주의를 도입한 새로운 양식의 동양화를 실험하면서 점차 추상과 구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폭넓은 창작 세계를 보여주었다. 1957년에 새로운 민족예술의 개척을 목적으로 한 백양회(白陽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정청>은 김기창의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1934)의 입선작으로, 김은호의 화풍을 충실히 따랐던 초기 회화를 대표한다. 운니동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란 김기창은 건넌방에 살던 기생의 딸인 ‘소제’라는 여인을 만나고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1933년 어느 날, 김기창은 소제와 막내 여동생인 기옥을 데리고 나와 동네 의사 집의 잘 꾸며진 응접실에서 이들을 그렸는데, 당시 소제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지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전에 소제는 이사했고, 곧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작품 속 소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데, 머리 모양이나 옷은 전통적이지만 배경이 되는 응접실은 축음기, 쿠션과 의자 등이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축음기는 듣지 못하는 작가가 항상 염원하는 소리에 대한 간절함을 보여 준다. 비단 위에 식탁보의 레이스, 옷의 무늬 등 섬세한 표현이 매우 돋보이는 수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정청> 작품설명 [편집자주]
이전처럼 친일 행위를 은폐하지는 못해도, 행적과 작품을 따로 떨어뜨려서 설명함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낭만적으로 꾸미거나 의미를 부여해도, 대부분의 조선 백성이 착취당하고 억압받던 시대에 그런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환경적 조건은 친일이라는 행위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교묘하게 그 부분을 분리해내고 감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훨씬 많고, 보여주는 것을 의심하지 않던 시대에 그림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요, 이를 이용해서 권력에 빌붙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던 유명한 화가 중 하나가 바로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 화가이자 근대 회화의 시조로 꼽히는 자크-루이 다비드입니다. 프랑스 격동의 시대에 다비드는 권력을 잡은 이들의 구미에 맞는 그림을 그리며 정치 선동을 해냅니다.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었던 루이 16세에게 그림을 주문받은 다비드는 1784년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통해 국가에 충성하는 영웅들의 모습을 고귀하게 그려내어 왕정에 충성할 것을 독려했어요. 루이 16세는 매우 만족스러워했으나 곧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죠. 위험에 처한 다비드는 바로 줄을 갈아탑니다. 혁명군의 마음에 들기 위해 혁명 초기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마라가 암살당하자, 순교자처럼 그림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준 것이에요.
이 그림은 널리 찬양을 받았고, 복제품도 여럿 제작되었어요. 하지만 공화정이 몰락하고 쿠데타에 성공한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자, 다비드는 또다시 줄을 바꿉니다. 그리곤 우리가 나폴레옹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요. 실제로는 농부가 이끄는 작은 노새를 타고 조심스래 알프스를 넘었지만, 멋지게 망토를 휘날리며 백마를 타고 지휘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그린 이 그림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고 합니다.
권력자의 입맛과 대중의 선호를 잘 이용했던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권력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려냅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1808년에 그린 <나폴레옹 1세 대관식>이에요.
제목은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지만,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이미 황금 월계관을 쓴 상태로 아내 조세핀 황후에게 관을 씌어주는 장면으로 그렸습니다. 실제로 대관식에서 있었던 일을 그리면 독선적이고 거만한 나폴레옹의 성품을 온 세상에 알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에요.
나폴레옹은 대관식을 위해 바티칸에서 교황을 불러왔지만, 교황의 손에서 월계관을 빼앗아 스스로 머리에 썼다고 해요. 대관식에서 교황은 망연자실해서 맥없이 앉아있었지만, 다비드는 손가락을 세워 축복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조세핀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누이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귀빈석에 앉아있는 것으로 그렸고요. 현장에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지만 그림은 기록으로 남아서 수많은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사실이 되는 세상이니 나폴레옹에게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은 없겠죠.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작품이자 신고전주의 대표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걸작으로 전 세계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기만한 그림이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보다 인기를 누리며 감탄 받고, 권력에 빌붙어 사람들을 속인 이의 업적이 칭송되고 있는 것이에요.
나쁜 짓을 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어떤 이의 실력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감탄을 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옹호를 하는 것은 효과가 매우 다른데요, 후자의 경우 그러한 행위를 ‘해도 된다’는 잘못된 문화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또 다른 권력자의 잘못을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특정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의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2차 피해를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잘못을 했다고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미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누군가의 죄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그 영향력이 지속된다면 그 사회는 죄를 지어도 되는 사회가 됩니다. ‘예술작품은 죄가 없다.’는 말도 있지요. 하지만 예술에 대한 신비화와 이상화가 강한 사회에서 죄지은 사람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잘못된 문화를 강화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이 됩니다.
‘예술’이나 ‘위대함’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과 따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이익이 그 ‘위대함’과 연결된 경우가 많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그 사람이 그것을 할 기회를 독차지했던 것일 뿐이죠. ‘위대함’을 독점할 수 있었던 이들에 대한 콩깍지를 벗어던지고, 잘못을 너무 쉽게 용서하는 문화를 바꿔내면 좋겠습니다.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주도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 수잔 발라동 (1) | 2024.11.05 |
---|---|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표현의 자유'를 거스르는 '능욕' 놀이 (2) | 2024.09.09 |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우리 사회에서 ‘민중’은 누구인가? (2) | 2024.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