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현 교과위원님의 <노동인문학>은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박장현 교과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편집자주] |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교과위원
2-2-4) 탈성장파
탈성장 파는 이론에서도 실천에서도 앞에 나열한 여러 흐름들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론의 측면을 본다면, 탈성장 파는 어떤 성장도 생태위기의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에 따라 지속가능한 발전 또는 녹색 성장을 주장하고 있는 유엔, 각국 정부, 수권정당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탈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하는 길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길이라는 것이다.
실천의 측면을 본다면, 탈성장 운동은 학술대회, 시위행진, 불매운동, 시민불복종, 자전거동아리, 기후캠프 등 주로 풀뿌리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민사회에서 문화적 ‘주도력’(=헤게모니)을 장악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돌격전’이 아니라 ‘진지전’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탈성장파와 녹색 뉴딜파 사이의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탈성장파는 풀뿌리운동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반하여 녹색 뉴딜파는 의회주의 운동에 치중하고 있다.
‘탈성장’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2년이다. 같은 해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를 발표하여 지구 곳곳에서 ‘제로 성장주의’에 대한 토론을 촉발하였다. 그해 프랑스의 한 시사주간지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가한 앙드레 고르(André Gorz)는 자본주의와 성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묻는다.
“지구생태계의 균형은 물질적 생산의 비성장 또는 심지어 탈성장을 조건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존속과 양립 가능할까요?”
‘탈성장’이라는 단어가 책의 제목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1979년에 간행된 게오르게스쿠-뢰겐(N. Georgescu-Roegen)의 <미래는 탈성장 : 엔트로피-생태-경제>였다. 지구는 물질적으로 유한하며, 모든 물질세계에는 엔트로피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에, 유한한 물질을 사용하여 무한한 경제성장을 실현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한 책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탈성장’은 추상적인 이론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그것이 거대한 풀뿌리 운동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뒤 ‘탈성장’이라는 단어는 다시 잠적해버렸고,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눈에 띄지 않게 된다.
‘탈성장’이 다시 등장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한 계기는 2002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개발비판·광고반대’ 캠페인이었다.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파리에서 학술대회가 열렸고, 그에 즈음하여 생태월간지 ‘실랑스’ 2월호에는 <명랑하고 지속가능한 탈성장>이라는 글이 실렸다. 게오르게스쿠-뢰겐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은 글이었다.
2002년 캠페인의 연장선 위에서 프랑스 안팎의 다양한 사회단체 및 연구단체들이 ‘탈성장’ 개념을 고리로 삼아 하나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탈성장’ 개념은 다양한 운동의 공유지로 발전하게 된다. 그곳에서 2004년에 <탈성장>(La décroissance)이라는 신문이 창간되었다. 2006년에는 ‘탈성장 당(黨)’(Parti pour la décroissance)이 창당되었는데, 선거를 지향하는 활동보다는 토론과 교류의 플랫폼 역할을 했다. 탈성장 운동은 주로 문화적 경로를 통하여 퍼져나갔으며, 초기에는 그 영향력이 이탈리아, 스위스 등 남유럽 국가들에 겨우 미칠 정도였다.
그러나 20년이 지나는 동안 탈성장 운동은 엄청나게 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지구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더 강력한 담론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마치 성경 말씀이 지상에서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과연 성경 말씀대로 ‘탈성장’은 창대한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인류는 탈성장 경제질서를 정립하여 마침내 지구생태계의 균형을 회복하게 될까?
아무튼, 탈성장 운동의 중심에는 ‘조사연구와 탈성장’(Research & Degrowth)이라는 국제 연구자 모임이 있으며, 그들이 격년으로 개최하는 ‘탈성장 국제회의’가 있다. 초기에는 겨우 수십 명 정도 모였던 이 회의는 회가 거듭될수록 전세계에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2-2-5) 가속주의파
여기 오늘날 사람들의 눈길을 거의 끌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시작이 있다. 자칭 ‘가속주의’(Accelerationism) 운동이다. 가장 최근에 등장한 흐름이다.
가속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점진적으로 개혁하거나 성장을 축소시키는 대신 오히려 시스템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결함과 모순을 가속적으로 증대시켜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가속시키는 요인은 다름 아닌 생산기술의 발전이라고 본다. 21세기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마침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함과 모순이 커지는 순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여기까지는 모든 가속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인 수준으로 넘어가면 가속주의는 크게 우파와 좌파로 나뉜다.
우파 가속주의는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원용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무한히 발전하면 기술발전의 특이점(singularity)을 넘어서게 되고, 그로 인하여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곧 그것의 붕괴를 앞당기는 길이 된다. 민주주의를 강화하여 자본주의를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는 오히려 그것의 붕괴를 늦출 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붕괴된 뒤에는 무엇이 올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우파 가속주의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공상과학의 차원으로 넘어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 흐름의 대표적 인물로는 영국의 철학자 닉 랜드(Nick Land)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을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 45대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와 달리 좌파 가속주의는 맑스주의를 디지털 기술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노력을 통하여 탄생하였다. 좌파 가속주의도 우파 가속주의와 마찬가지로 기술발전이 자본주의 전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곧 기술발전의 특이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파와 달리 좌파는 ‘자본주의 자동붕괴설’을 믿지는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탈자본주의 전환 이후 세상에 대해서도 맨정신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특이점의 대혼동을 넘어서고 탈자본주의 질서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힘이 작동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성장파의 중심지가 프랑스라면, 좌파 가속주의는 영국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2013년 <#가속하라: 가속주의 정치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한 영국의 닉 서르닉(Nick Srnick)과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를 꼽을 수 있다. <포스트 자본주의 : 새로운 시작>(2015년)을 쓴 폴 메이슨(Paul Mason)도 여기에 속한다.
2-3) 동맹을 위한 마주 읽기
기후위기 부정파는 오늘날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생태위기와 노동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세력이다. 그러므로 생태운동 또는 노동해방운동이 기후위기 부정파와 동맹을 맺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편, ‘지속가능한 성장’과 ‘녹색 성장’은 사민주의·자본주의 정치세력이 녹색 의제를 일부 수용하여 만들어낸 흐름이다. 여기에 관리적 개혁 수준의 전환을 추구하는 일부 생태운동과 노동운동도 동참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상호약속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사이비 동맹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적록동맹이 구조적 개혁 또는 그 이상의 전환을 지향하는 동맹이 되자면, 그것을 결성할 수 있는 흐름은 셋뿐이다. 녹색 뉴딜, 탈성장, 가속주의다. 세 흐름 모두 ‘탈자본주의’를 정신적 공유지로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 전환을 성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흐름은 아무도 없다. 세 흐름이 힘을 합치더라도 될까 말까 한 일이다.
그러나 세 흐름이 동맹을 형성하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아 보인다. 내가 볼 때, 가장 큰 장애물은 ‘성장’ 문제를 두고 세 흐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의견 차이에 있다.
탈성장파는 모든 성장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성장이 바로 생태위기의 주범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탈성장파가 기술발달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혐오하는 태도를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탈성장파는 21세기 디지털 기술을 포함한 모든 기술발달을 자본주의식 경제성장과 등치시키고 있다.
한편, 녹색 뉴딜파는 ‘성장’에 대한 입장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여기에 녹색 뉴딜파의 딜레마가 있다. 만약 ‘탈성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면, 의회정치에서 입지가 축소될 것이다. 만약 ‘성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면, 탈성장파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이런 어정쩡한 태도가 탈성장파와 녹색 뉴딜파 사이의 동맹에 장애물로 작동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속주의파는 자본주의식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기술발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디지털 기술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안에서부터 파괴하는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생태 친화적인 풍요를 생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가속파와 탈성장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가장 큰 장애물로 보인다. ‘탈성장주의’와 ‘가속주의’는, 이름만 듣고 판단한다면, 마치 물과 불처럼 도저히 서로 결합될 수 없을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내고 살펴본다면 첫인상과는 다른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탈성장파와 가속주의파 사이를 가르고 있는 절벽은 실은 ‘성장’이 아니라 ‘기술발달’이라는 점이다. 특히 21세기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의견 차이만 해소한다면, 두 흐름의 동맹을 가로막고 있는 대다수 장애물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녹색 뉴딜파가 딜레마에서 빠져나와서 동맹에 결합할 수 있는 계기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장’과 ‘기술발달’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나면, 더 이상 어정쩡한 유보상태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적록동맹의 가장 비옥한 공유지는 ‘탈자본주의’에 있다. 특히 탈성장파와 가속주의파는 그것을 공공연하게 천명하고 있다. 두 흐름이 동맹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은 오늘날 두 흐름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치유해나가는 과정으로 될 것이다.
2002년 파리 캠페인에서 볼 수 있듯이, 탈성장파는 처음부터 생태연구자들의 과학적 발견과 인민대중의 뜨거운 가슴을 연결해내려고 노력하였고, 지금까지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에 반하여 가속주의 운동은 아직 연구자들의 책상 위에 머물러 있으며, 그들만의 운동으로 진행되고 있다. 인민대중의 심금을 울리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을 가속주의 운동의 최대약점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가속주의 제안이 인민대중의 가슴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아마 가속주의 운동은 책상머리 운동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한편, 가속주의 운동에는 있지만, 탈성장 운동에는 없는 것도 있다. 두 가지다. 첫째, 가속주의파는 오늘날의 변화를 삼중 소용돌이로 통찰하고 있다. 특히 생산기술의 변화를 소용돌이의 으뜸 구성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탈성장파는 이 점을 실수로 간과하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둘째, 가속주의 파는 21세기 자본주의 경제질서 안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자기파괴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생태학자들이 주축을 형성하고 있는 탈성장파는 자본의 운동법칙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이 두 가지를 탈성장파의 최대약점으로 꼽을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지 못한다면 탈성장 운동은 탈자본주의 운동으로 되기 힘들 것이다.
탈성장파와 가속파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저마다 홀로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치유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서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호의존을 통하여 상호보완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제 준비운동을 끝내고 지금부터 두 책을 맞대보며 읽으면서 상호의존과 상호보완의 길을 찾아보기로 하자. 역지사지(易地思之), 비판하고 논쟁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 상호치유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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