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과 독재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자화상 중 하나는 바로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가 1500년에 그린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입니다. 이 그림은 자화상의 역사를 새롭게 쓴 걸작이라고 평가를 받아 왔어요.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착각과 야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교황권이 강했던 중세시대에 그림은 성경을 전하는 도구로 기능했어요. 그림에는 성경 속 인물들이 등장했고, 그림은 서사를 담고 있어야 했죠. 성녀(聖女)나 성남(聖男)도 그려졌지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자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을 그림으로 영원히 남기려고 했답니다. 인본주의 시대라 불리는 르네상스 초기에는 왕쯤 되어야 별도의 초상화로 그려질 수 있었는데, 3/4 측면 구성이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1500년에 뒤러가 자신을 정면으로 그립니다. 게다가 ‘축복하는 그리스도’라는 주제의 전통에 따라 자신을 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하게 재현했어요. 교황청에서 독립하고자 했던 헨리 8세도 자신을 정면으로 그리라고 했을 뿐이었는데, 그보다 앞선 시기에 일개 화가가 신처럼 자화상을 그린 것은 정말 도발적인 사건이에요.
아무리 인문학과 과학이 발달한 시기라 해도 교황권의 힘이 여전히 강했던 때에 인간을 신처럼 그린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뒤러는 손의 모양을 바꿔서 자신의 옷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대신 평범한 옷이 아니라 벨벳이 달린 고급 모피코트를 잡고 있는 것으로요. 당시에 저런 옷은 상류 지식인이나 학자, 귀족 계층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뒤러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 아니라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을 갖춘 예술가이자 상류층으로서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에요.
신 중심 사회였던 중세시대에 인간은 신의 창조물일 뿐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특정인을 영웅시하거나 스스로 과시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중시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개개인의 가치가 강조되었고, ‘자아(self)’라는 개념이 철학과 예술에서 중요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가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그림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뒤러는 이 자화상에서 아예 얼굴 바로 옆에 선명한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리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에요.
뒤러는 예술에 수학적 원리를 도입하려고 했는데, 이 자화상에서도 좌우 대칭을 매우 강조하고 있어요. 뒤러는 르네상스 지식인답게 비례와 수학적 구조를 중시했고, 미술을 통해 과학과 진리의 체계를 구현하려고 했어요. 그러한 노력은 1525년 『측량 지침서』에 담겨 있는데, 기하학과 투시도법, 원근법 등을 적용해서 3차원의 세계를 2차원 평면에 정확하게 옮기기 위한 연구 결과들을 담은 것이죠. 이 책에서는 원근법을 인체에 적용하는 방법도 자세히 다뤘답니다.
원근법은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조각가, 토목 공학자이자 기술자, 화가이자 금 세공인이었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체계화했어요. 브루넬레스키는 1435년에 『회화론』을 써서 원근법의 이론을 널리 알렸고, 이후 회화에서는 원근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해졌죠. 원근법은 신과 같이 ‘절대적’ 시선을 가지고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하기 위해 카메라의 렌즈처럼 하나의 눈을 상정한 후,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관찰하려는 대상과 자신을 완벽히 분리시켜서 보는 것이에요.
하지만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는 인간은 완벽하게 멈춰있을 수 없고, 두 눈으로 초점을 맞추며, 매우 섬세해서 주변의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요. 그러니까 원근법은 관찰법이라기보다 추상적인 이론이고, 사실은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구현한 것이죠. 만약 여러분이 어릴 적 원근법에 맞춰 그리기가 어려웠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관찰력 탓이 아니라 원근법이 이상하기 때문이에요. 서구 문명 외에 다른 문화권에는 원근법 외에 다양한 관찰법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제국주의를 펼치는 바람에 원근법이 기준이 되어버린 것뿐이랍니다.
이 그림은 뒤러의 『측량 지침서』(1525)에 나오는 그림이에요. 화가가 원근법에 맞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정사각형의 구획이 표시된 격자를 사용하여 대상을 본 다음, 역시 정사각형의 구획이 표시된 면에 그 대상을 스케치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죠. 이 상황에서 여성은 정확한 측량을 위해 최대한 가만히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여성의 상황과 감정, 신체화 반응 등은 무시되어야 합니다. 세계를 관찰하고 재현할 권력을 가지는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눈끔에 맞게 그렸나 아닌가 뿐인 것이죠.
원근법은 보는 자(주체)와 보여지는 대상(객체)는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보는 사람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요. 또한 입체적인 공간에 있는 다양한 인물과 사물 등을 평면의 그림으로 완벽하게 옮기겠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는, 실재하는 수많은 것들을 누락시키고도, 오로지 한 점에서 꼼짝하지 않고 보이는 것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기도 해요. 안타깝게도 원근법적 시선을 가진 주체는, 자신만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도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볼 수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돼요.
이런 권위적이고 편협한 원근법적 사고 안에서의 ‘사실’에 대한 인식은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뒤러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전문가 남성이 보는 위치를 독차지했어요. 객체가 되는 위치, 보여지는 대상은 여성과 약자, 소수자들이고요. 관찰의 대상으로써 도구화되고 타자화되는 존재들은 주체의 일면적인 시각에 의해서만 재현될 수 있었죠. 언어는 권력 체계의 산물이기도 해서, 약자와 소수자는 스스로의 경험과 감정을 기존의 언어라는 작은 그릇에 담기 어려웠고요.
드디어 현대 사회가 되어 아무리 약자와 소수자가 자신의 언어를 정교하게 만든다 해도, 권력을 차지한 이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요. 외면할수록 권력을 마구 휘두를 수 있으니 오히려 편하죠. 만약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자신의 특권을 인식할 수 있는 권력자가 귀를 열고 들으려고 해도, 다른 경험과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공부와 끝없는 성찰, 치열한 반성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 정도로 훌륭한 사람은 우리 사회에 너무 너무 너무 드문 것이죠.
위헌적인 비상계엄 선포를 통해 독재를 시도했던 이들을 막고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이들은 정말 다양했어요. 광장에서는 누구든 신청만 하면 마이크를 들 수 있었고, 드디어 ‘대표’들의 비슷하고 당위적인 구호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다양한 위치에서 느끼는 부조리와 불평등에 대해 생생한 언어로 들려주었어요. 하지만 대선 정국이 되자 문화식민지답게 서구에서 들여온 ‘지식’을 잘 외운 ‘시험 장인’들이 마이크를 독점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바닥이 드러나는 사건들이 있었죠.
지식과 발언권을 독점한 이들은 아무리 친절하게 알려주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워합니다. 원근법적인 세계 속에서 주체의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에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의 존재들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에요. 대놓고 혐오 표현을 하는 선동꾼은 대의 권력을 회수하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간단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서, ‘유능한 행정가’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되었다고 해도 걱정이 태산이에요.
추위와 눈보라에 맞서 광장을 지켜낸 이들이 원하는 “진짜 대한민국”은 과거처럼 숫자로 증명되는 성과를 위해 외면해온 목소리를 여전히 외면하는 곳은 아닐 겁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던 이들이 원하는 “모두를 위한 대통령”은 과거처럼 언론이 과대표하여 드러내주는 이들을 중심에 두지 않을 겁니다.
어느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는 없어요. 그렇게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살피고 더 살펴야 하는 것이지요. 21대 대통령은 다른 ‘시험 장인’들이나 자칭 ‘진보’주의자들처럼 ‘무오류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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